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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언제쯤 ‘과거’에서 벗어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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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11-1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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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 종식 20년, 진실규명 요구 시위는 여전히 의회광장과 마요광장의 ‘볼거리’…지난해 ‘사면법은 위헌’이란 판결이 내려졌으나 군부세력의 저항은 만만치 않아

하영식의 남미통신 ② 아르헨티나

▣ 부에노스아이레스=하영식 전문위원 willofangels@yahoo.co.kr

가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날씨를 보일 우리나라와 달리 아르헨티나에서는 겨우내 차가운 바람이 가시고 화창한 봄이 들어서고 있다. 그렇다고 언제나 봄의 온기만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축복하지는 않는다. 조금이라도 따스해지는 날이면 이를 시샘하듯 찬비가 내리면서 다시 겨울로 돌아가는 듯한 추위가 몰려오기도 한다.


의회광장에서 시민들이 거리행진을 벌이고 있다. 민주화의 찬란한 봄을 맞은 지 20여 년 세월이 흘렀지만, 아르헨티나 사회는 여전히 군사독재의 망령과 싸우고 있다.

물론 꽃샘추위가 왔다고 해서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한번 와버린 봄은 결코 겨울로 되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와버린 아르헨티나의 민주화가 독재의 암울했던 시대로 뒷걸음질칠 수 없는 이치와 마찬가지다.

최종진술 전날 실종된 로페즈

로사 할머니(631호 78~80쪽 참조) 인터뷰를 마친 뒤, 수용소에서 태어나 군부정권 참여 인사의 가족이 키운 마리아 호세(28)를 만났다. 마리아의 어머니는 당시 임신한 몸으로 수용소로 연행된 뒤, 그곳에서 마리아를 낳고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리아는 지금 컴퓨터 회사에서 일하며 수용소에서 태어나 군부에 의해 키워진 아기들을 찾는 일을 하고 있다. 물론 마리아가 말하는 ‘아기’들은 이미 20대 후반의 성인으로 성장했다. 현재 실종된 임산부가 수용소에서 낳은 뒤, 군인들이 가로챈 아기들은 500명 이상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망설이다 “부모를 살해한 군인들에 의해 키워졌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땠느냐”는 질문을 했다. 마리아의 표정은 순식간에 격정적으로 변했다. 그가 자신의 신상에 대해 알게 된 것은 6년 전이었다.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겪었지만, 나중에 나를 낳아준 부모의 사진을 보고 친척들을 만나면서 다소 진정할 수 있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아르헨티나 민주화의 상징인 의회광장이 있다. 의회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으면서 7년 동안 문이 굳게 닫히기도 했다. 고전적인 이탈리아식 의회 건물은 화려한 건축미로 찾는 이들로부터 언제나 경탄을 자아낸다. 의회 건물 주변에선 항상 시위가 벌어지는 것도 ‘볼거리’다.

며칠 전 의회 건물을 찾아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낮부터 은퇴한 노인들 30~40명이 피켓을 들고 의회로 통하는 도로 한켠을 점거한 채 연금 인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노인들의 시위는 곧이어 벌어질 본격적인 시위의 예고편에 불과했다. 곳곳에서 깃발을 앞세운 시위대들이 모여들었고, 오후 5시로 접어들자 시위대는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학생 시위대의 한 그룹은 아르헨티나 출신 혁명가인 체 게바라의 얼굴이 그려진 깃발을 들고 행진하기도 했다. 특별히 이날 시위를 위해 시골에서 온 수백 명의 인디오들만으로 조직된 시위대도 눈에 띄었다. 이들은 생존권의 보장을 요구하면서 행진을 벌였다. 가족이 실종된 할머니와 어머니 단체에서도 실종 가족들에 대한 진실을 밝힐 것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는 최근 발생한 ‘로페즈 실종사건’의 진상을 밝히라는 요구가 기름값 인하 요구와 함께 양대 의제였다.

군부독재 종식과 함께 집권한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은 독재정권 부역자들에게 사면령을 내렸다(왼쪽). 지난해 6월 사면법에 대해 위헌 판결이 내려지자 마침내 얻어낸 승리에 시민들이 기뻐하고 있다.

실종된 훌리오 호르헤 로페즈(77)는 군부독재 시절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가 복역한 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들 중 한 명이다. 그는 군부정권 당시 경찰 수사관이 저지른 고문을 비롯한 반인륜적 행위와 수용소의 처참한 조건을 법정에서 증언했다. 그는 최종진술을 하기로 한 공판 전날인 지난 9월18일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목요일 3시30분, 어김없이 모이는 어머니들

의회광장과 더불어 부에노스아이레스 민주화의 요람은 단연 ‘마요광장’(5월광장)이다. 이곳이 유명해진 것은 분홍색의 대통령궁과 피라미드탑, 화려한 꽃들이 만발한 정원이나 웅장한 주위의 건축물 때문이 아니다. 바로 사랑하는 자식과 가족을 잃은 어머니들과 할머니들의 행진 때문이다. 매주 목요일 3시30분이면 마요광장에선 어김없이 흰 스카프를 머리에 두른 어머니들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행진을 시작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이 목요일이었지만, 비가 억수같이 퍼부은 탓에 꼼짝없이 1주일를 더 기다려야 했다. 다시 목요일, 마요광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봄의 햇살까지도 아르헨티나의 민주화를 기뻐하는 듯 찬란했다. 광장 주위에 모여든 모든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오후 3시30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장사꾼들도 한몫하고 있었다. 공원 바닥에 늘어놓은 체 게바라의 엽서나 사진들을 사기 위해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모습도 보였다. 이곳에서 게바라의 ‘상품적 가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드디어 흰 스카프를 머리에 두른 할머니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자식들의 이름을 새긴 흰 스카프는 ‘마요광장의 어머니’라는 조직의 상징이 됐다. 1977년 4월30일, 최초로 실종된 자식들을 찾아헤매던 어머니들이 마요광장으로 몰려들어 행진을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됐다. 매주 목요일 오후 3시30분이면 정기적으로 어머니들이 행진을 하면서 아르헨티나 민주화 운동의 굳건한 중심으로 성장했다. 군부독재 시절엔 모두가 함께 행진하는 것이 금지돼, 서너 명씩 나눠 마요광장의 피라미드탑 주위를 돌았다. 무엇보다 당시에는 행진하던 어머니들까지 군인들이 비밀리에 붙잡아가 살해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살아 있음을 호소하면서’라는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를 든 채 행진하는 이들은 이제 대부분 80대에 접어들었다. 후아레스 할머니는 벌써 90살을 넘어섰지만 여전히 행진에 참가하고 있다. 그는 “처음에는 실종된 아들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행진을 시작했지만 이제는 아르헨티나의 민주화를 위해 행진한다”고 말했다. 어머니들은 피라미드탑 주위를 계속해서 30분가량 돈 뒤 해산했다.

마요광장의 어머니들이 지금도 행진을 멈추지 못하는 것처럼, 아르헨티나도 여전히 30년 전 군부독재 시절 벌어졌던 학살 문제에서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 거리에 붙어있는 선전물들이나 TV, 신문에 나는 기사 상당수가 군부독재 시절 일어난 일들과 관련돼 있다.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가 지금도 아르헨티나를 억누르고 있음은 애써 탱고춤이나 축구시합에 빠져들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쉽게 눈치챌 수 있을 정도다. 아르헨티나는 언제쯤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군부정권의 학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회에 특별히 설치된 국가인권위원회를 찾아가 이에 대해 물었다.

“군부는 당시 우발적 학살이 아닌 계획적 대량 학살을 자행했다.” 브루노 훅(39) 국가인권위원회 사무국장의 첫마디다.

지난 9월18일 고문 경찰관에 대한 법정 최종진술을 앞두고 고문 피해자이자 인권운동가인 훌리오 로페즈가 실종된 뒤, 인권단체 회원들이 항의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뒤 반군부 인사들을 체포해 학살하기 시작하면서, 어머니와 함께 브라질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반군부 활동가였던 어머니 때문에 영문도 모른 채 브라질에서 망명생활을 해야 했던 그에게 어린 시절은 상처로 남아 있다. 그는 현재 인권위에서 실종된 사람들이 묻힌 장소를 찾아내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물론 비행기에서 바다로 던져진 사람들의 행적을 찾기는 불가능하지만, 그나마 당시 실종된 사람들의 매장지로 추정되는 장소가 가끔씩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주검이 발견될 경우, 이들의 DNA를 추적해 가족을 찾아주는 일이 지금도 아르헨티나 인권위가 주로 하는 일이다.

애타게 실종자들의 매장지를 찾아서

군부독재 기간 중 3만 명 이상의 아르헨티나 시민들이 학살됐지만, 누구도 제대로 처벌받은 일이 없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비델라 장군과 마세라 장군에 대한 처벌 문제를 들 수 있다. 이들은 군부정권이 끝난 1983년 학살과 고문, 절도 등의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구금됐지만, 4년 뒤 군부의 압력에 의해 석방됐다. 당시 군부의 압력을 받고 이들을 석방시킨 정부는 군부정권 부역 인사들을 보호하는 ‘사면법’까지 제정했다. 그때부터 2005년까지 군부 인사들은 법의 심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난해 아르헨티나 대법원이 군부정권 출신 인사들에 대한 사면법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사면법은 폐지됐다. 독재의 망령에 대한 법의 심판이 가능해진 것이다. 과거사 정리 절차가 가속화하리란 기대감이 높아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과거사 정리는 멀고도 험난하기만 하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은 ‘로페즈 실종사건’은 법의 심판을 피해가려는 군부세력의 저항이 여전히 만만치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군부독재가 무너진 지 20여 년째, 아르헨티나의 과거사 정리 과정을 바라보며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한국이 자꾸만 떠오른다. 처벌하지 못한 쿠데타와 학살의 주범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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