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코올 중독자의 수공예품?
등록 : 2006-10-26 00:00 수정 :
에스키모 파이프 공예문화가 꽃피우게 된 알래스카 이누이트 굴곡의 역사… 19세기 서양 식료품·기호품과의 물물교환용이 일반인의 취미생활이 되기까지
▣ 배로(알래스카)=글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이누이트(에스키모) 토마스 코요테(52)는 조그만 판자때기 건물에서 백열등을 켜고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크기는 불과 두세 평 남짓. 노란 불빛 속으로 하얀 뼛가루가 튀었다. “오늘 아침부터 시작했어요. 지난해 잡은 고래 갈비뼈로 담배 케이스를 만들고 있어요. 내일 정도 완성이 될 겁니다. 완성되면 지역문화센터에 가서 팔 거예요.”
마리화나 끽연가의 필수품
알래스카 배로에 사는 토마스는 원주민 기업인 배로도시공사(UIC)에서 일하며 틈틈이 조각을 한다. 지난해에는 아예 작업장까지 만들었다. 토마스가 만드는 조각품은 귀걸이나 목걸이, 팔찌와 같은 액세서리부터 모형 배와 같은 장식품을 망라한다.
조각 재료는 북극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다. 토마스는 사냥에 성공한 이웃을 찾아가 얼마간의 돈을 쥐어주고 고래뼈와 바다코끼리의 상아(아이보리), 북극곰의 이빨 등을 가져온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토마스의 아내 하젤 코요테(40)가 멋진 게 있다며 집안에서 조각품을 가져왔다. 말로만 듣던 ‘에스키모 파이프’였다. 에스키모 파이프는 다른 액세서리와 달리 양질의 재료와 정교한 기술을 필요로 한다. 특히 바람 구멍을 알맞게 내줘야 하고, 뼈를 오랫동안 찬바람에 말려 윤기를 내야 한다. 적게는 한두 달에서 길게는 일 년까지 걸린다. 표면의 수분과 유분을 제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누이트들은 다들 에스키모 파이프를 가지고 있어요. 기성품인 궐련도 피우지만, 담뱃잎을 손수 구해 파이프 속에 넣고 피우지요.”
사실 이누이트들은 에스키모 파이프로 잎담배보다는 마리화나를 태우는 경우가 많다. 궐련 형태의 담배는 보통 사서 피우니, 에스키모 파이프가 마리화나 끽연가들의 필수품이 된 것이다.
에스키모 파이프는 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을까. 그건 담배 문화가 독특한 전래 방향을 따라 북극에 들어왔고, 바로 이곳에서 파이프 공예가 꽃피었기 때문이다. 담배라는 작물을 발견하고, 처음 피운 이들은 다름 아닌 아메리카 인디언이었다. 기원전 5천 년 전에 페루 안데스 산맥 지방에서 재배됐고, 고대 마야 제국에서 기원전 1500년부터 2500년까지 담배를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그 뒤 북아메리카로 북상한 담배는 인디언의 생활 문화가 됐다. 인디언들은 둘러앉아 담배를 피웠고, 일종의 환각 물질로 이용했다. 그런데 담배의 북상은 거기서 멈췄다. 예전부터 아메리카 인디언과 교류했던 북극의 이누이트에겐 전해지지 않은 것이다.
지구 한 바퀴를 돌아 전래되다
대신 담배는 스페인인들을 통해 유럽으로 전해졌다. 기호품으로 확산된 유럽의 담배는 중국 등 동양으로 전파됐다. 이와 함께 러시아의 담배는 시베리아에 사는 추크치 이누이트에게 전해졌고, 이것이 베링해를 건너 알래스카로 건너온 것이다. 직선적인 문화 전파가 아니라, 지구 한 바퀴를 동에서 서로 돌아온 ‘순환적인 전파’가 이뤄진 것이다.
담배와 함께 이누이트에게 유럽의 외래 문명을 본격적으로 전한 이들은 고래잡이배들이었다. 19세기 초까지 베링해와 알래스카 북극해 연안은 유럽 전역에서 몰려든 고래잡이배로 북새통을 이뤘다. 산업혁명 시대의 가로등 연료와 기계 윤활유로 고래 기름이 쓰였기 때문이다.
본토의 ‘인디언 대학살’과 달리, 유럽 고래잡이 선원들과 이누이트는 잘 어울렸다. 이누이트는 고래수염과 수공예품을 유럽인들에게 주는 대신 생전 맛보지 못한 단맛의 식료품과 담배·술 같은 기호품을 받았다. 키어런 멀바니는 <땅끝에서>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존 보크스토크의 책을 재인용해 그 당시 상황을 묘사한다.
“그들(이누이트)은 자신들의 의상과 바다코끼리 상아를 선물로 가져왔으며, 우리는 그 대가로 그들에게 담배를 주었다. 모두 피는 담배와 씹는 담배를 즐겼고-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도를 넘게 담배를 좋아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원주민 생활에 변화가 생겼다. 이누이트들이 힘을 들여 물범이나 고래를 잡으려 하지 않고, 유럽인과의 물물교환을 위해 수공예품 만드는 데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그나마 담배는 이누이트 문화와 저항감 없이 어울렸다. 문제는 교환 품목으로 가장 인기가 있었던 술이었다. 곡물이 나지 않는 북극에 애초에 술이 있을 리 없다. 난생처음 취해본 이누이트들은 이내 알코올 중독이 됐고 너도나도 수공예에 뛰어들었다.
과도한 음주는 많은 이누이트를 숨지게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많은 기록들은 술 취한 이누이트들이 밖에서 얼어죽고, 고래잡이배를 습격해 많은 사상자가 났다고 전한다. 1878년부터 1879년까지 1년 사이 베링해 세인트로렌스섬의 인구 3분의 2가 숨질 정도였다. 과음과 함께 영양 결핍, 유럽인에 묻어온 인플루엔자가 주원인이었다.
이런 격랑의 역사를 뒤로하고 최근 들어 이누이트 마을에는 조각 열풍이 거세지고 있다. 이누이트 조각은 고래잡이의 시대가 끝난 20세기 중반 뒤에는 일부 전통 예술가의 전유물이 되었지만, 최근에는 지역 문화센터에서 열리는 강습 프로그램이 가득 찰 정도로 대중화됐다. 알래스카에 유전이 개발된 뒤, 원주민 가구(4인 기준)가 한 해 2천만원의 원주민기업 배당금과 알래스카 종신기금을 받는 등 나아진 경제 사정도 한몫을 했다. 역사의 굴곡을 뚫고 전통 조각이 인기 있는 취미활동이 된 것이다.
문화센터 강습이 가득 찰 정도로 인기
하젤은 “지난해부터 친구들과 함께 이누이트 조각을 배우고 있다”며 “주말엔 바람을 쐴 겸 도시 밖으로 아이보리를 주우러 간다”고 말했다. 그는 사촌이 사는 베링해 근처 웨인라이트 마을에서 주운 1m가 넘는 암갈색 아이보리를 보여줬다. 수십 수백 년 전 바다코끼리가 죽은 뒤, 이제야 바닷가에 당도한 아이보리일수록 진귀하다. 아이보리는 세월을 먹을수록 어두운 색을 품는다. 하젤이 들고 있는 암갈색 에스키모 파이프가 누런 백열등 아래서 깊게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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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이트는 이글루에 살지 않는다‘에스키모’에 대한 진실 혹은 오해
*에스키모? 이누이트?*
에스키모(eskimo)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에스키모는 ‘날고기를 먹는 사람들’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경멸하는 느낌이 담긴 이 말 대신 최근에는 ‘이누이트(Inuit)’라는 표현이 늘어났다. 이누이트는 이누이트어로 ‘사람’이라는 뜻. 캐나다 북극권 연안에서는 이누이트라는 표현이 정착됐으나, 아직 미국 알래스카에서는 에스키모라는 표현이 많이 쓰인다.
*이누이트는 술고래다?*
술을 마시고싶어도 마실 수 없다. 비극적이었던 술 전래의 역사에서 체득한 교훈과 겨울철 ‘동사’의 위험 등으로 알래스카 대부분의 원주민 마을에서는 음주가 제한된다. 이누이트 마을인 배로의 경우 우편 주문으로 매월 할당된 양만 주문해 마실 수 있다. 또 다른 북극권 원주민인 그위친족 마을인 아크틱 빌리지에서는 일체의 음주가 금지된다. 만약 몰래 술을 먹다가 적발될 경우 벌금을 내야 한다. 이처럼 마을에 따라 규정이 다른데, 술을 팔 수 있는 곳을 ‘웨트’(wet)라고 부르고, 팔 수 없는 곳을 ‘드라이’(dry)라고 부른다. 물론 드라이 지역에서는 종종 높은 값에 밀주가 거래된다.
*이누이트는 이글루에 산다?*
배로에 사는 리처드 파코닥(52)은 “배로에서 이글루를 지을 줄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라고 말한다. 이글루는 원래 겨울에 긴 바다 사냥을 나갈 때 일시적인 캠프로 사용되곤 했다. 이누이트는 대체로 1층짜리 목조주택에서 산다. 최근엔 되레 관광용으로 이글루가 지어지기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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