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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투항… 나는 한없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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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2-2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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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 빈민운동가 와니다의 이야기 II- 밀림에서 도시로, 다시 박문댐으로

험난한 밀림은 들머리에서부터 애송이 혁명가들을 시험했다. 가도가도 끝없는 밀림행군, 정부군의 추격을 피해 낮에는 숨을 죽이고 한밤중에만 이동을 했던 그 고통의 시간들을 나는 살아오면서 결코 잊은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지쳐 쓰러져가는 도시산 애송이들을 업고 짐까지 들고 길을 잡아나가던, 그 공산당 동지들의 뜨거운 가슴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동지애, 그리고 교조주의와의 투쟁

사진/동지와 함께. 밀림에서의 꿈은 접었지만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혁명의 깃발은 결코 내리지 않았다.
그무렵, 탈진한 우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었던 동력은 빨래였다. 공산당 동지들이 챙겨주던 정성스런 먹을거리보다는 그들이 몰래몰래 빨아주던 땀에 젖은 우리의 옷, 그 빨래가 우리를 하나둘씩 일으켜 세웠다. 인간의 심성 가운데서도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감사와 존경심이 우리를 이끌었던 셈이다.


이 행군 과정에서 우리는 타이와 말레이시아 그리고 중국으로부터 혁명을 위해 모여든 각기 다른 무장투쟁세력들을 만났다. ‘봉건잔재 청산’, ‘자본주의 격파’, ‘제국주의 타도’…. 사람이 구호 아래 형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내 눈으로 처음 확인했고, 국적도 인종도 필요 없는 혁명가들을 본 감동은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밀림행군 한달이 지난 어느 새벽녘, 우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발길을 멈췄다. ‘타이혁명을 위해’. 이 노래는 우리가 타이공산당의 임시 총사령부에 도착했다는 상징적인 신호였다. 우리는 기뻐 날뛰었다. 그러나 밀림행군의 끝이 또다른 고통으로 이어지는 시작이었음을 우리 가운데 예감했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 육체적 고통은 지난 한달 동안의 밀림행군으로 만성이 돼갔지만 시시각각 부딪히는 정신적인 압박이 새로운 고통거리로 떠올랐다.

‘범주화’. 바로 이놈이었다. 타이공산당은 도시에서 온 학생들을 ‘지식인’으로 분류해 특권을 누린 계층이라 여겼고, 우리는 출신성분의 한계라는 원죄의식으로 괴로워했다. “머리만으로는 안 된다. 가슴도 공산주의자의 길로 돌려라.” 타이공산당원들은 자본주의에 익숙해져 있던 우리를 공산주의자로 용접시킬려고 무진 애를 썼다. 초동단계에는 나를 비롯한 모든 젊은이들이 논쟁없이 타이공산당의 이론을 받아들였다. 난삽한 정권을 무너뜨리고 사회를 개조하기 위해서는 무장투쟁만이 유일한 대안이고 따라서 타이공산당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중국공산당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타이공산당의 정강·정책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에 섰다. “마오이스트, 이 지독한 혁명규율과 교리를 곧이대로 타이사회에 접목시킬 수 없다.” 나는 우리 가운데 가장 먼저 회의를 느낀 인물로 꼽혔다. 이건 ‘뒤집어보기’를 즐겼던 어린 시절부터의 개인적 호기심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중국공산당의 강령은 정치·경제·지리적 조건을 비롯해 어느것 하나 타이사회에 적용할 수 없는 ‘고물덩어리’로 인식되었다. 특히 혁명의 조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결정적 시기’의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화두를 놓고 중국공산당의 하부기구 같은 타이공산당의 이론가들과 끝없는 논쟁을 벌였다. 호락호락 승복하지 않았던 나는 결국 자본주의에 오염된 아이로 찍혔고, 그 덕에 심심찮게 ‘호강’을 했다. 호강이란 다름 아닌 징계였다. 밀림의 징계는 감옥 대신 아무도 없는 마을에 혼자 남겨두는 것이었는데, 이건 내게 참으로 귀한 시간이었다. 조직 생활 속에서 때때로 혼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겐 징벌이 아니라 소중한 행운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 징계 탓으로 나를 비롯한 대여섯명의 동료들은 결국, 모두가 최대의 영광으로 여겼던 ‘공산당원’으로 인정받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자본주의를 만끽하다

그런 중에도 혁명의 꿈은 영글어갔고 함께 왔던 동료들은 대부분 명예로운 ‘혁명전사’가 되었다. 우리 모두는 무기 사용법을 익혔고 적을 죽이는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몇달 뒤, 가슴뛰는 실전 배치의 시간이 다가왔다. 그러나 우리는 처음으로 대오분열을 경험했다. 누구 할 것없이 모두 전투요원만을 자원한 탓이다. 후방투쟁을 불명예로 여기며 아무도 양보하지 않는 팽팽한 상황이 며칠이나 계속된 끝에, 결국 나를 비롯한 일부 동료들이 혁명의 수레바퀴를 돌리기 위해서는 ‘뒷심’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나는 군복을 만들고 양식을 조달하는 밀림의 후방투쟁조에 배치되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일했다.

“앞을 보지 말자.” 이렇게 맹세하고 달려온 밀림의 혁명투쟁, 그러나 그 밀림에도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타이공산당의 주력이 와해되기 시작했고 지도부는 하나둘씩 중국으로 망명해 갔다. 1980년, 나는 4년 동안의 밀림투쟁을 눈물 한 자락으로 접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정부는 모든 공산당원들에게 법적인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투항을 강요했고, 학생들에게는 안전한 복교와 학업을 보장했다. 하나둘씩 무리지어 떠나는 동지들 뒤에 남겨진 나는 밀림으로 들어간 뒤 처음으로 미래를 생각했다.

투항, 좋다. 이 밀림을 떠나자. 나는 한없이 울었다. 다음날 밀림을 나섰다. 그러나 나는 방콕 대신 타이공산당의 일부가 아직 생존해 있다는 소문을 따라 무작정 라오스국경 밀림으로 향했다. 며칠 뒤, 라오스국경 밀림에 도착한 나는 비로소 현실을 깨달았다. 타이공산당의 와해와 밀림투쟁의 전멸. 내가 돌아갈 곳은 도시뿐이었다. 비록 공산당원이라는 명예를 얻지는 못했지만, 나는 ‘깃발’을 차곡차곡 접어 가슴에 담고 도시로 돌아왔다. 타이공산당, 그 종말은 타이사회의 현실을 보지 않고 중국공산당을 추종했던 교조주의의 한계였고, 그 뿌리없는 투쟁은 결국 공산주의와 혁명에 대한 오해만을 남긴 채 사라져 갔다.

밀림에서 도시로, 무장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 방콕으로 되돌아온 나는 의식과 양식 모든 면에서 일대 전환이 필요했다. 밀림투쟁을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로 여겼던 나는 이내 도시의 삶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깨달았다. 방콕으로 되돌아온 내게 주어진 첫 번째 과업은 자본주의 속의 생존투쟁이었다. 그동안 소홀히 했던 가족을 보살피는 일이 혁명보다 더 중대한 일로 다가왔다. 탐마삿대학에 복학한 나는 예전처럼 다시 공부보다는 직업을 먼저 찾아야 했다. 생명보험 외판원, 여행사 가이드, 옷장수 등 닥치는 대로 일하며 돈을 벌었고 가족들의 생활에 성공적인 보탬이 되었다. 자본주의를 만끽했던 시절이다. 특히 남동생과 함께 옷장사를 하면서 제법 돈을 벌었는데, 이 과정에서 나는 자본주의를 진실로 깨달았다. 나의 성공을 위해서는 좀더 잔혹하게 상대를 눌러야 하고 좀더 교묘하게 사기를 쳐야 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성질임을. 그러나 양심적인 가책은 만질 수 있는 돈의 양만큼 불어났다. “이제는 떠나자”, “이제는 그만두자” 하루에도 골백번씩 다짐했지만, 정직하게 말해, 돈맛을 느낀 내가 사업을 그만두는 일은 정부에 투항하던 일보다 더 어려웠다. 정치적 투항에 넉달이 걸렸다면 자본주의 사업 포기에는 4년이 걸렸다.

나는 부활한 심정으로 정치투쟁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타이사회의 현실 속에서 결국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은 시민운동밖에 없었다. 나는 가장 민중의 삶 속에 깊이 파고들 수 있고 한편으로는 자연을 향한 어릴 적 내 꿈을 펼 수 있는 길이라 여긴 환경운동쪽으로 방향을 잡아나갔다. 그무렵 나는 환경운동이 가장 노골적인 반자본주의 전선이며 동시에 정치투쟁으로 연결해낼 수 있는 현장이란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막상 환경운동을 업고 현장으로 뛰어들었을 때, 그동안 내가 거쳐왔던 사회운동이나 밀림의 무장투쟁이 신음하는 민중에게 가닿을 수 없는 매우 추상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박문댐 반대투쟁의 위대한 실험

사진/박문댐 주변의 선상시위. 와니다는 이 박문댐 현장에서 처음으로 자연과 인간이 함께 공존한다는 사실을 배웠다.(정문태 기자)
각종 공룡급 국책 프로젝트에 짓밟힌 마을은 나에게 새로운 배움을 요구했다. 은근히 프로페셔널운동가임을 자부하고 있던 나는 남몰래 부끄러움을 느끼며 많은 고민을 했다.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인 1991년 2월, 나는 박문댐 반대투쟁 현장으로 들어갔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이 싸움이 나의 인생에 전환점이 된 셈이다. 당시 몇몇 마을 주민들이 댐건설로 수몰되거나 파괴되는 마을을 놓고 정부와 맞장을 뜨고 있던 중이었다. 나는 이 박문댐현장에서 처음으로 자연과 인간이 함께 공존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같은 시간 방콕에서는 부패한 찻차이 정부를 몰아낸 군부가 국민평화유지위원회란 간판을 내걸고 권력을 장악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군부는 박문댐이 자리잡은 우본랏차타니에 계엄령을 선포해 박문댐 반대투쟁을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렸다. 이 불량한 군부는 결국 1992년 5월 방콕민주항쟁을 피로 물들였고 동시에 박문댐 건설을 시작했다. 당시 나는 방콕의 민주화투쟁과 박문댐 반대투쟁 현장을 오가며 양쪽을 모두 이끌어가야 하는 바쁜 투쟁의 나날을 보냈다.

비록 박문댐 반대투쟁이 댐건설을 포기시키지는 못했지만, 타이사회에 처음으로 대형 국책공사의 정부 보상이라는 이정표를 세웠다. 그리고 일정한 보상을 받아내고도 10년이 넘도록 박문댐 반대투쟁은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향한 위대한 실험으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물고기와 인간을 하나로 보는 박문댐 반대투쟁은 타이 현대 민중투쟁사에 새로운 장을 하나씩 열어가고 있다. 박문댐 반대투쟁을 지원하면서 결성한 전국적인 빈민회의(AOP)는 이제 타이의 모든 투쟁현장을 하나로 묶어 민중정치의 장한 싹으로 자라나고 있다. “민중이 뭉치면 승리할 수 있다.” 이 단순하고 기본적인 테제의 확인이 바로 박문댐 반대투쟁과 빈민회의가 일궈낸 가장 빛나는 성과일 것이다.

“정부가 정치를 이용해서 민중을 억압한다면 민중은 즉각 정치를 반격할 것이다.” 이걸 우리는 ‘민중정치’라 부른다. “민중이 자신들의 미래를 말할 수 있고, 정부의 의사결정과 사회개발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이걸 우리는 ‘민주주의’라 부르기로 했다.

민중정치, 민주주의, 아직은 타이사회에서 너무 생소한 말이다. 소외당한 일부와 시민단체, 학생, 학자들이라는 제한된 인원이 참여하고 있는 게 정직한 현실이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양보다는 질이다. 양은 질의 조건일 뿐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좀더 많은 이들이 진실을 보게 될 것이고 결국 진실이 어둠을 몰아낼 날이 올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오늘도 나는 내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깃발을 올리고 있다.

와니다 탄티위타야피탁(Vanida Tantiwitayapitak)/ 타이 빈민·환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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