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민족의 힘, 섹시코드와 만나다

622
등록 : 2006-08-08 00:00 수정 :

크게 작게

‘어머니/아내’ 아니면 ‘요부’, 남성우월주의 시선이 개입된 여성스포츠… 여체의 군사화 고도화된 북한의 여성체육 영웅들은 ‘수령의 육탄’으로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요즘 몇 년간 필자와 같은 성씨인 박씨들이 해외에서 우리 선수의 우수성을 만방에 알리느라 바쁘다. 미국에서 박찬호와 박세리, 영국에서 박지성… 세 명이 다 같은 성씨인데, 한 가지 차이점은 분명하다.

여자축구에서 북한은 최강국이다. 하지만 가부장제를 버리지 않는 북한에서 아버지·남편·국가에 복속돼 있는 이북 여성의 처지는 변하지 않는다.

몇 년 전에 박찬호가 국내 결혼 알선업체의 조사에서 몇 번이나 ‘1등 신랑감’으로 뽑힌 일이 있었고, 최근 박지성도 ‘1등 신랑감’의 영예를 안게 됐다. 유교 전통에다 근대적인 ‘교육을 통한 출세 이데올로기’가 중첩되는 한국적 풍토에서는 이상적인 남성다움의 표상에서 ‘근육질’이란 서구에 비해 훨씬 덜 강조되지만, 일단 그 정도로 해외에서 성공했다면 국내 결혼 시장에서 ‘1등’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과연 해외에서 아무리 성공한다 해도 여성 프로 선수가 국내 결혼 시장에서 이와 같은 수준으로 주가를 올릴 수 있을까? 과문의 탓인지 모르지만, 국내 매체에서 박세리를 ‘1등 신붓감’으로 지칭하는 언사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요정이거나, 엽기이거나

표피적으로 성차와 무관하게 ‘균등한 기회’를 주는 것처럼 보이는 스포츠 부문에 투신하는 여성의 비극이라 할까? 국내 스포츠의 주된 목표 중 하나인 ‘국위 선양’의 달성에 여선수들이 기여해온 바 크다. 1976~96년간 한국인 선수들이 국제올림픽에서 따낸 금메달 중에서 여성이 따낸 메달은 40% 정도나 된다. 그럼에도 스포츠계에서 여성은 늘 ‘소수자’다. 전국의 프로 선수 중에서는 여성이 13%밖에 안 되고, 각급 스포츠 지도자(코치) 중에서는 10%, 국가대표팀 지도자 중에서는 4%만 각각 차지한다. 사실 외국도 마찬가지지만, 국내 텔레비전 방송의 편성에서는 여성 스포츠를 보도하는 시간이 남성 스포츠를 보도하는 시간의 1할이라도 되면 다행으로 여겨야 할 수준이다. 아무리 외국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해도 여성 선수는 박찬호와 박지성만큼 ‘국민적 영웅’이 되지 못하고, 여자를 ‘얼굴이 예쁜 가사 노동자’로 보는 보수적인 가족 관념에도 잘 들어맞지 않는다.

일부 연구 결과에 따르면 나중에 프로 운동 선수나 스포츠 지도자가 될 체대 여학생과 여선수 사이에도 스포츠가 여성성을 가꾸는 데 장애가 된다는 편견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사회가 근육질의 여성을 바람직한 인생의 반려자로 보려 하지 않고 일부의 스포츠계 여성까지도 ‘여성성’과 ‘근육질’을 대조적 개념으로 보는 주류의 시각에 영향을 받는 동시에, 여성 근육질의 성적 매력이 또 남성 관객의 눈요깃감으로 되기도 한다. ‘몸매’ ‘섹시’ ‘테니스의 요정’ 코드로 통하는 쿠르니코바나 샤라포바처럼, 박지성이나 박찬호의 이미지가 과연 성애화될 수 있었겠는가? ‘요정’이 아니라면 특히 폭력성이 강한 대항전 종목의 여선수가 국내외에서 ‘엽기’로 인식되기도 한다. 예컨대 같은 여선수는 물론이거니와 잘 훈련된 남성 군인까지도 때려눕힐 수 있는 구마가이 나오코 같은 킥복싱의 스타를 서양 남성들이 어떻게 봐왔는가? 오리엔탈리즘의 원칙상 연약하고 온순해야만 하는 ‘동양 여성’이 서구 남성보다 힘이 훨씬 세다는 사실의 ‘예외성’에 자극받기도 하고, 구마가이 류의 일본 킥복싱 여선수들을 가학·피학 섹스의 ‘도미나’(domina·남성에게 가학 섹스를 제공하는 여성)와 연결시켜 동일시하기도 한다.

구미 중산계급의 여성 해방 운동가들이 근육질 여체의 과시가 남녀 평등의 촉진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로 자전거 타기와 수영·정구에 열을 올렸던 1880~90년대에, 여성이 남성처럼 유니폼을 입고 남이 보는 앞에서 활발한 신체 동작만 취한다면 여권이 당장 신장될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남성 본위의 사회가 남성처럼 운동장에서 뛰어다니는 여성들까지도 남성의 탐욕스러운 시선을 충족시키는 도구로 만들려 하는 것이다.

여성 스포츠란 남성의 탐욕스러운 시선을 충족시키는 말초신경 자극제로 전락한다. 샤라포바는 한국을 방문했을 때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신기하기만 한 존재, 여선수가 남선수와 본질적으로 달라야 한다는 인식은, 조선 여선수들이 최초로 경기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1920~30년대에 강했다. 건장한 남아를 낳아 기를 현모양처의 발육·성장을 위해 수영·정구 등 일부 종목들이 그때 주류 여성 잡지에서 자주 권장됐다. 중앙 일간지들까지도 테니스를 치는 여선수를 보면서 일차적으로 “조선 민족의 어머니들의 건전한 체력”을 생각했다. 예컨대 정구대회를 두고 쓴 사설에서 <동아일보>가 “조선 민족의 모성의 참의미에서 출발한, 참의식에 입각한 여성의 사회생활에의 진출”을 축하했다(1928년 5월26일). 남성들의 스포츠를 두고 신문들이 “제2세 국민의 건강을 위해 열심히 뛰라”고 격려해주고 “스포츠가 아름다운 자태와 어여쁜 얼굴 갖기에 도움된다”는 식의 ‘덕담’을 해줄 일은 당연히 없었지만, 여성 스포츠를 보는 주류의 시각은 이 수준이었다.

이북 체육은 가부장제를 극복했는가

그러기에 여선수에게 요구되는 사항은 남선수와 달랐다. 1930년, 제8차 조선여자올림픽대회에서 울려퍼졌던 대회가의 가사처럼, “싸우는 속에 예절을 보이고, 용감하면서도 온순하더라. 마음을 합하고 법도 맞춘다”는 것은 바람직한 여선수의 모습으로 제시됐다. 그런데 여선수에게는 ‘여성다운 온순함’까지 기대되는 동시에 ‘단련된 여체의 섹시함’도 늘 인식됐다. 주로 남성이 쓰는 1920~30년대의 여성 경기나 여학생의 스포츠 댄스 연습 현장의 관람기를 보면 눈에 띄는 것은 스포츠 여성의 ‘뛰어난 몸매’나 댄서들의 ‘엄청나게 짧은 치마’를 남자들이 관음증적으로 주목했다는 부분이다. ‘어머니/아내’ 아니면 ‘요부’로만 여성을 파악하는 남성우월주의는 여성 스포츠를 보는 시각에 그대로 개입됐다. 1937~38년 이전까지 여성 체육이 조선의 (남성 본위의) 민족주의에 좌우됐다면 전시의 ‘고등 국방국가 체제’에서 여성의 신체 발달에 비상한 관심을 돌린 것은 군국 일제였다. 1938년 3월에 고등여학교령이 개정돼 여학생들이 주당 5~7시간 동안 검도·유도, 심지어 수류탄 투척까지 학교에서 익히게 됐다. 국민 전체가 한 명의 전사처럼 움직여야 하는 군국주의적 관념하에서는, 국민적 신체의 일부로서의 여성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여학생들까지도 칼빈총을 가지고 ‘북괴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으로 사격 연습을 했던 1970년대 남한의 모습에서도 일제 말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지만, 동아시아에서 ‘여체 군사화’의 모범적 사례는 아마도 같은 제국주의적 유산을 넘겨받은 북한일 것이다.

얼핏 보면 여성 스포츠가 가장 주류화된 동아시아 국가 중 하나는 북한이다. 북한의 체육 영웅들을 보면 ‘여인천하’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태권도 부문에서만 해도, 1994년에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4개나 획득한, ‘180도 돌아 옆차기와 손타격의 여왕’ 장경옥 선수가 북한을 대표하는 스타가 됐으며, 또 하나의 ‘효자 종목’인 유도에서도 1996년 16살의 나이로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기적이다 싶은 우승을 거둔 초특급 영웅 계순희가 있는가 하면, 그녀를 계승하겠다 싶은 ‘여자 유도의 샛별’ 차현향도 1998년부터 국제무대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그 외에도 북한이 여태까지 본궤도에 쏘아올린 국제 수준의 여성 스타들이 수십 명에 이를 것이다. 우리의 고정관념으로 상상하기 쉽지 않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북한에 여자 복싱까지 보편화되기 시작했으며 ‘싸우는 여성’의 이미지가 텔레비전에서도 꽤나 잘 보인다. 6년 전에 방송됐던 극영화 <청춘이여>는 여성의 프로 체육 활동을 부정적으로 보는 편견을 비판적으로 다룬 작품이었는데, 그 영화에 태권도 지도자 은경이 데이트 상대자인 남성을 보호하면서 불량배들을 ‘시원스럽게’ 때려눕히는 액션신이 나온다.

이북 동포 여성의 이와 같은 체육 성과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이 절로 뿌듯해진다. 그런데 과연 이북 체육의 목표는 가부장제의 극복과 여성 각자의 주체적·자율적 자기 계발에 있는 것인가? “체육산업은 결국 조국의 부강 발전을 이룩하고 나라의 방위력을 강화하며 인민들의 건강과 민족의 융성을 보장하기 위한 사업”(‘체육을 대중화하여 체육 기술을 빨리 발전시킬 데에 대하여’, 김정일, 1986년 담화문)과 같은 지도부 발언에서 알 수 있듯이, 체육의 목표가 체제 보존을 위한 남녀 ‘전사’들의 동원과 훈련이며 이 ‘인민 총동원’을 주도하는 이북의 지배계급은 가부장제적 관습과 윤리를 버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체육 분야에서 여성이 당·국가로부터 특급 대우를 받을 수 있어도, 당·국가의 위계질서에서 남성만큼의 출세를 꿈꿀 수 없다.

페미니스트라면 격투기와 싸워야

자본주의적 일본·남한 체육계의 소수자, 성애화된 ‘요정’, 간판만이 사회주의인 이북 체육계의 “수령의 은혜에 보답하는 당과 수령의 육탄”…. 바람직한 여자 스포츠의 모델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복싱과 같은 공격적인 유해 스포츠에의 여성의 진출을 여권 신장의 상징으로 보는 것보다는, 남녀가 힘을 합해 돈을 위해 인간의 건강을 망가뜨리는 복싱·격투기의 퇴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페미니스트적 실천으로서 더 낫지 않을까? 더 많은 아마추어 여성이 더 적은 부담으로 더 쉽게 참여해 자신의 ‘움직임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소프트볼·등산 등이 위험 부담이 높은 무술 등에 비해 조금 더 낫지 않을까? 어쨌든 여성 스포츠, 여선수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일그러진 우리 모습의 정확한 그림이다.

오슬로 국립대·한국학

참고 문헌:

1. 정동길, <북한 체육 스포츠 영웅>, 다인미디어, 2001.

2. 이학래 외 엮음, <북한 체육 자료집>, 사람과사람, 1995.

3. 김경일, <여성의 근대, 근대의 여성>, 푸른역사, 2004.

4. 우이니시 야스후미 외, <현대 일본의 스포츠 비즈니스 전략>, 책소리, 2001.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