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유랑하는 나의 만화여

347
등록 : 2001-02-21 00:00 수정 :

크게 작게

견딜 수 없이 치명적이었던 검열과 투옥… 망명의 길에서 재기를 다짐한다


윈툰(Win Tun)

‘미스터버마’로 국제사회에 익히 알려진 윈툰은 1953년 마궤에서 태어났고, 1990년 타이로 망명한 뒤 버마의 대표적인 시사만화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시사만화들이 아시아의 여러 언론에 실리면서 40년 가까이 군부독재에 억압받고 있는 버마의 상황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교사였던 아버지가 마을 운영위원회에 참여했던 탓으로 어릴 적부터 나는 사회 문제에 관심을 지닌 아이로 자랐다. 그뒤 1962년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가 1년 뒤 버마사회주의계획당(BSPP)이라는 유일 합법정당을 들고 나와 1988년까지 갖은 불법과 불평등을 유포시키며 시민들을 압박하는 동안, 나는 버마에서 지역민들의 진정한 바람이 무엇인지를 뿌리로부터 보고 느껴왔다. 당시 주민들은 사회주의의 뼈대에다 관료주의를 결합했던 이른바 ‘버마식 사회주의’에 대해 많은 의심과 토론들을 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고등학교를 마친 뒤, 1970년부터 1978년까지 군부가 세운 읍의 협동농장에서 회계감사원으로 일했던 나는 주로 지방의 협동농장들을 돌아다녔고, 그 과정에서 사회의 진실을 읽는 소중한 기회를 얻었다. 당시 현장실사를 맡은 나는 정부가 주관하던 모든 기업과 사업들이 심각한 상황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부가 불어대던 성공의 나팔소리 신.

“모든 것이 잘되고 있다.” 이건 군부를 두려워한 지방 관리들과 하급 공무원들의 허위 보고일 뿐, 결국은 지방의 하부구조로부터 중앙의 상부구조까지 모두들 진실을 은폐하고 현실을 위장 보고하는 가운데 버마 자체가 ‘빈 깡통’이라는 끔찍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믿음!

이런 상황들을 바라보면서 묘한 호기심이 솟아났다. “이걸 익살과 풍자만화로 만들어 관료들을 비판하고 사회적인 화젯거리로 만들면 어떨까?” “많은 시민들이 이런 만화를 보고 싶어할까?” 당시 나는 유명한 시사만화가 우바잔의 만화에 심취해 있었다. 물론 그의 영향이 이런 개인적인 호기심을 자극했던 배경일 테지만.

만화를 그리자. 그때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내 꿈을 실현시키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그러나 시사만화가의 길은 쉽지 않았다. 1962년부터 지금까지 버마 군사정부는 방송과 신문, 잡지, 인터넷을 비롯한 모든 언론을 철저하게 감시하며 어떤 형태의 정치적 입장이나 의견도 발표하지 못하도록 차단해 왔다. 예술가들에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표현의 주제와 심지어 소재까지 제한당하고 검열당하는 상태에서, 특히 시사만화가들은 누구보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쓰러졌다. 수많은 시사만화가들이 감방에 처박혔고, 아직도 수많은 시사만화가들이 감방에서 고통받고 있다. 수많은 언론사들이 폐쇄당했던 것과 운명을 같이하면서.

내가 무엇보다 힘들어 했던 건, 검열당국과 군정보부에서 툭하면 데려가 시민들이 당국에 충성할 수 있도록 선도하는 만화를 그리라는 압박이었다. 결국 나는 1990년 5월 아웅산 수지가 주도했던 민족민주동맹(NLD)의 총선압승이라는 결과를 다시 무력으로 짓밟아버린 군부의 강압에 쫓겨 타이 국경을 넘었다. 나의 망명과 함께 나의 만화도 조국을 떠나 유랑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 나의 만화는 내가 조국을 떠나는 순간 이미 생명을 다했다. 내 만화들이 여러 언론 매체에 실려나가고 있는 현실과는 달리.

조국 버마가 민주화되고 언론이 완전한 자유를 얻을 때, 결국 나의 만화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믿음과 함께, 그날 우리는 다시 시사만화의 의미를 말하게 될 것이다. 내 만화를 살려내는 날까지 나는 비록 ‘가짜’ 시사만화가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묘사하고 표현하며 살아갈 것이다.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