갸넨드라 국왕이 ‘의회 복원’약속했지만 시간 끌다 꼼수 둘 지도… 정파간 분열에 군부 준동 위험도… ‘공화국’으로 가는 길 험난해라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요 지트 카스코 자나타코.”(민중은 승리했다)
“함로 안돌란 자리 차.”(투쟁은 계속된다)
“비르 사히드 아마르 라훈.”(열사여 영원하라)
7개 정파가 연합하여 총파업 주도 히말라야 산악국가 네팔을 뜨겁게 달궈온 민주화 시위가 4월24일 마침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절대왕정의 항복 선언을 이끌어냈다. 지난 4월6일 네팔의회당(NCP)과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당(CP-UML) 등 주요 7개 정파의 주도로 총파업이 시작된 지 19일 만의 일이다. 이 기간에 줄잡아 300만~400만 명의 네팔 국민이 온 나라의 거리로 몰려나와 “민주주의 만세”를 목놓아 외쳤다. 시위 과정에서 수천 명이 체포됐고, 수백 명이 다쳤으며, 10여 명은 목숨까지 잃었다. 끝 모르게 터져나오는 민주화의 외침에 굴복한 갸넨드라 국왕이 이날 밤 11시30분께 ‘의회 복원’을 약속한 뒤 들뜬 시민들은 밤새 카트만두의 거리를 돌며 승리를 자축하고 투쟁 과정에서 스러져간 동지들의 넋을 기렸다. 이로써 1768년 프리트비 나라얀이 문을 연 네팔의 샤 왕조는 230여년 만에 존망의 기로에 서게 됐다. [%%IMAGE4%%] 이번 시위를 주도해온 7개 주요 정파도 사태가 여기까지 이를 것으로 예상하진 못했을 것이다. 지난 4월21일 갸넨드라 국왕은 총리 지명권을 민주화 운동 진영에 내주겠다는 양보안을 내놨지만 성난 민심은 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의사와 엔지니어, 교사와 변호사가 일찌감치 거리로 나선 ‘민중’과 어깨걸이에 나섰다. 은행과 공공부문 노동자, 언론인들까지 나서 모든 업무를 거부하고 시위대열에 합류했다. 통행금지령이 내려진 수도 카트만두에서는 연일 10만 명이 넘는 시위 인파로 채워졌다. 이를 두고 미 일간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는 네팔 현대사연구소 록 라즈 바랄 소장의 말을 빌려 “이런 규모의 대중시위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으며, 1990년대 민주화운동 당시와 비교해도 규모나 참가자들의 범위 면에서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고 전했다. 네팔의 민주주의는 1989년 당시 비렌드라 국왕이 입헌군주제를 받아들이면서 사실상 첫선을 보였다. 하지만 의회는 출발부터 불안정했고, 1994년 선거에서 네팔의회당 지도자 기리자 프라사드 코이랄라가 의회선거에서 패배하고 물러나면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중앙 정치에 참여해온 마오주의 공산당은 1996년 산간벽지를 무대로 왕정 폐지를 위한 ‘인민의 전쟁’을 시작했다. 이들은 현재 네팔 전역의 작게는 50%(유니세프 추정)에서 많게는 80%(국제난민기구)를 장악한 것으로 추정된다. 반군세력과 네팔 보안군의 충돌 과정에서 고문과 학살이 난무했으며, 지금까지 모두 1만2500여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2001년 마오주의 반군과 중앙정부가 휴전에 합의했지만, 상황은 4달 만에 다시 파국으로 치달았다. 유혈 사태가 재개됐고 갸넨드라 국왕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셰르 바하두르 데우바 당시 총리를 파면했다. 이후 로켄드라 바하두르 찬드와 수르야 바하두르 타파 등이 총리에 올랐지만, 국민적 반발에 밀려 잇따라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갸넨드라 국왕은 결국 2004년 6월2일 데우바 총리를 재임명했지만, 8달 만에 총리를 포함한 내각 전원을 해임한 뒤 의회를 해산하고 의원들을 가택연금시켰다. 정치권의 부패와 반군 진압 실패를 구실로 내건 무혈 쿠데타였다. 국왕은 또다른 쿠데타를 모의할 것인가 군부를 앞세운 갸넨드라 국왕은 반대파를 짓누르는 한편 반군 진압에 나섰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네팔의 주요 정치세력은 ‘의회 복원’의 깃발 아래 하나가 돼갔다. 지난해 8월 말 네팔 내 각 정파들은 입헌군주제를 포기하고, 완벽한 형태의 의회제를 목표로 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마오주의 반군 진영의 목표와 마찬가지여서 둘의 연대가 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반군 진영은 일방적 휴전을 선포하는 한편 지난해 11월22일 인도에서 7개 주요 정파와 회담을 열었다. 당시 회담에서 두 진영은 ‘압제적 왕정’ 타파 등의 내용을 담은 12개 항목에 합의했다. 당시 반군 진영은 복수정당제를 받아들이는 한편 국제기구의 감시 아래 궁극적으로 반군세력의 무장해제도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IMAGE3%%] 이들이 적극적인 연대에 나섰음에도 갸넨드라 국왕의 행보엔 거침이 없었다. 그가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꺼내든 카드는 ‘지방선거’ 실시였다. 이를 통해 자기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한 뒤 자신의 통제 아래 둘 수 있는 의회를 소집하는 한편 이를 통해 주변국의 지원을 끌어내겠다는 포석이었다. 그러나 지난 3월에 치러진 지방선거 결과는 그의 의중과 정반대로 나타났다. 주요 정치단체가 ‘투표 참여 거부’를 선언하면서 선거가 실시된 절반가량의 지역에서 후보가 전혀 나오지 않았고, 나머지도 1인 후보 선거구가 대부분이었다. 최종 투표율은 20% 남짓에 머물렀다. ‘파국’이 감지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의회 복원을 목표로 내걸었던 네팔의 7개 주요 정파는 갸넨드라 국왕이 이를 받아들임에 따라 즉각 네팔의회당 지도자 코이랄라를 중심으로 임시정부 구성 논의에 들어갔다. 애초 국왕의 ‘항복’을 ‘또 하나의 꼼수’라고 비판했던 네팔 마오주의 반군 진영도 4월27일을 기해 3개월 동안의 휴전을 선포하고 수도 카트만두로 향하는 도로에 대한 봉쇄를 풀었다. 반군 지도자 프라찬다는 이날 성명을 내어 “의회 복원 선언이 제헌의회 소집으로 이어져 거리의 민중이 열망하는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공화국 수립으로 이어지리라 믿는다”고 밝혔다. 중단됐던 대중교통 운행이 재개됐고, 시장은 다시 물을 열었다. 깨진 보도블록과 타다 만 바리케이드용 나무 둥지도 어느새 치워졌다. 카트만두는 빠르게 일상을 되찾아갔다. 하지만 ‘카트만두의 봄’이 이대로 손쉽게 ‘해피 엔딩’을 맞을 것으로 믿기는 아직 이르다. 갸넨드라 국왕에게 군·경 등으로 구성된 15만 명에 이르는 정예 보안군이란 마지막 ‘기댈 언덕’이 있기 때문이다. 인도 일간 <힌두스탄타임스>가 카트만두 법학연구소 유바라즈 상룰라의 말을 빌려 “국왕이 또 다른 쿠데타를 모의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한 것도 이 때문이다. 상룰라는 “(1990년 제정된) 현행 네팔 헌법은 국왕에게 칙령 반포를 통해 의회를 복원시킬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자발적으로 의회 복원 결정을 내림으로써 갸넨드라 국왕은 “자신이 여전히 절대적 권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 셈”이라는 것이다. 이번 시위 과정을 통해 나타난 네팔 국민들의 열망은 분명하다. 제헌의회를 구성해 헌법을 바꾸고, 선거를 통해 네팔이 입헌군주국으로 남을지 공화국으로 나아갈지를 직접 결정하는 게 이들의 바람이다. 하지만 상룰라는 “현행 헌법엔 이런 형태의 국민투표를 실시할 수 있는 근거 규정이 없다”고 못박았다. 자생적 마오세력 ‘낙살라이츠’로 골머리 결국 복원된 의회는 우선 현행 헌법을 개정하기 위해 근거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비록 형식적인 것이지만 국왕의 재가를 얻어야 한다. 현행 헌법은 의회가 헌법 개정안을 국왕에게 제출하면, 국왕은 두 달간 이를 심의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기간이 지나면 국왕은 개정안을 재가하든가, 개정안에 대한 재개정 권고안을 첨부해 의회로 돌려보내야 한다. 물론 의회가 국왕의 개정 권고안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같은 개정안을 국왕에게 다시 보낸다면 그는 이를 재가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시간이다. 헌법 개정안이 의회와 왕실을 오가는 사이 노회한 갸넨드라 국왕이 충분히 ‘딴 맘’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7개 주요 정파 사이에서 분열의 싹을 틔울 수도 있고, 자기 휘하에 있는 군부를 직접 동원하는 모험을 할 수도 있다. 상황이 이쯤 되면 휴전을 약속한 마오주의 반군 진영의 인내심도 바닥을 드러낼 것이다. 여기에 ‘낙살라이츠’로 불리는 자생적 마오주의 무장세력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이웃나라 인도 역시 사태를 두고만 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민주화의 봄’을 맞은 네팔의 고민은 오히려 이제부터가 시작인 셈이다.
7개 정파가 연합하여 총파업 주도 히말라야 산악국가 네팔을 뜨겁게 달궈온 민주화 시위가 4월24일 마침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절대왕정의 항복 선언을 이끌어냈다. 지난 4월6일 네팔의회당(NCP)과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당(CP-UML) 등 주요 7개 정파의 주도로 총파업이 시작된 지 19일 만의 일이다. 이 기간에 줄잡아 300만~400만 명의 네팔 국민이 온 나라의 거리로 몰려나와 “민주주의 만세”를 목놓아 외쳤다. 시위 과정에서 수천 명이 체포됐고, 수백 명이 다쳤으며, 10여 명은 목숨까지 잃었다. 끝 모르게 터져나오는 민주화의 외침에 굴복한 갸넨드라 국왕이 이날 밤 11시30분께 ‘의회 복원’을 약속한 뒤 들뜬 시민들은 밤새 카트만두의 거리를 돌며 승리를 자축하고 투쟁 과정에서 스러져간 동지들의 넋을 기렸다. 이로써 1768년 프리트비 나라얀이 문을 연 네팔의 샤 왕조는 230여년 만에 존망의 기로에 서게 됐다. [%%IMAGE4%%] 이번 시위를 주도해온 7개 주요 정파도 사태가 여기까지 이를 것으로 예상하진 못했을 것이다. 지난 4월21일 갸넨드라 국왕은 총리 지명권을 민주화 운동 진영에 내주겠다는 양보안을 내놨지만 성난 민심은 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의사와 엔지니어, 교사와 변호사가 일찌감치 거리로 나선 ‘민중’과 어깨걸이에 나섰다. 은행과 공공부문 노동자, 언론인들까지 나서 모든 업무를 거부하고 시위대열에 합류했다. 통행금지령이 내려진 수도 카트만두에서는 연일 10만 명이 넘는 시위 인파로 채워졌다. 이를 두고 미 일간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는 네팔 현대사연구소 록 라즈 바랄 소장의 말을 빌려 “이런 규모의 대중시위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으며, 1990년대 민주화운동 당시와 비교해도 규모나 참가자들의 범위 면에서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고 전했다. 네팔의 민주주의는 1989년 당시 비렌드라 국왕이 입헌군주제를 받아들이면서 사실상 첫선을 보였다. 하지만 의회는 출발부터 불안정했고, 1994년 선거에서 네팔의회당 지도자 기리자 프라사드 코이랄라가 의회선거에서 패배하고 물러나면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중앙 정치에 참여해온 마오주의 공산당은 1996년 산간벽지를 무대로 왕정 폐지를 위한 ‘인민의 전쟁’을 시작했다. 이들은 현재 네팔 전역의 작게는 50%(유니세프 추정)에서 많게는 80%(국제난민기구)를 장악한 것으로 추정된다. 반군세력과 네팔 보안군의 충돌 과정에서 고문과 학살이 난무했으며, 지금까지 모두 1만2500여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2001년 마오주의 반군과 중앙정부가 휴전에 합의했지만, 상황은 4달 만에 다시 파국으로 치달았다. 유혈 사태가 재개됐고 갸넨드라 국왕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셰르 바하두르 데우바 당시 총리를 파면했다. 이후 로켄드라 바하두르 찬드와 수르야 바하두르 타파 등이 총리에 올랐지만, 국민적 반발에 밀려 잇따라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갸넨드라 국왕은 결국 2004년 6월2일 데우바 총리를 재임명했지만, 8달 만에 총리를 포함한 내각 전원을 해임한 뒤 의회를 해산하고 의원들을 가택연금시켰다. 정치권의 부패와 반군 진압 실패를 구실로 내건 무혈 쿠데타였다. 국왕은 또다른 쿠데타를 모의할 것인가 군부를 앞세운 갸넨드라 국왕은 반대파를 짓누르는 한편 반군 진압에 나섰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네팔의 주요 정치세력은 ‘의회 복원’의 깃발 아래 하나가 돼갔다. 지난해 8월 말 네팔 내 각 정파들은 입헌군주제를 포기하고, 완벽한 형태의 의회제를 목표로 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마오주의 반군 진영의 목표와 마찬가지여서 둘의 연대가 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반군 진영은 일방적 휴전을 선포하는 한편 지난해 11월22일 인도에서 7개 주요 정파와 회담을 열었다. 당시 회담에서 두 진영은 ‘압제적 왕정’ 타파 등의 내용을 담은 12개 항목에 합의했다. 당시 반군 진영은 복수정당제를 받아들이는 한편 국제기구의 감시 아래 궁극적으로 반군세력의 무장해제도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IMAGE3%%] 이들이 적극적인 연대에 나섰음에도 갸넨드라 국왕의 행보엔 거침이 없었다. 그가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꺼내든 카드는 ‘지방선거’ 실시였다. 이를 통해 자기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한 뒤 자신의 통제 아래 둘 수 있는 의회를 소집하는 한편 이를 통해 주변국의 지원을 끌어내겠다는 포석이었다. 그러나 지난 3월에 치러진 지방선거 결과는 그의 의중과 정반대로 나타났다. 주요 정치단체가 ‘투표 참여 거부’를 선언하면서 선거가 실시된 절반가량의 지역에서 후보가 전혀 나오지 않았고, 나머지도 1인 후보 선거구가 대부분이었다. 최종 투표율은 20% 남짓에 머물렀다. ‘파국’이 감지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의회 복원을 목표로 내걸었던 네팔의 7개 주요 정파는 갸넨드라 국왕이 이를 받아들임에 따라 즉각 네팔의회당 지도자 코이랄라를 중심으로 임시정부 구성 논의에 들어갔다. 애초 국왕의 ‘항복’을 ‘또 하나의 꼼수’라고 비판했던 네팔 마오주의 반군 진영도 4월27일을 기해 3개월 동안의 휴전을 선포하고 수도 카트만두로 향하는 도로에 대한 봉쇄를 풀었다. 반군 지도자 프라찬다는 이날 성명을 내어 “의회 복원 선언이 제헌의회 소집으로 이어져 거리의 민중이 열망하는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공화국 수립으로 이어지리라 믿는다”고 밝혔다. 중단됐던 대중교통 운행이 재개됐고, 시장은 다시 물을 열었다. 깨진 보도블록과 타다 만 바리케이드용 나무 둥지도 어느새 치워졌다. 카트만두는 빠르게 일상을 되찾아갔다. 하지만 ‘카트만두의 봄’이 이대로 손쉽게 ‘해피 엔딩’을 맞을 것으로 믿기는 아직 이르다. 갸넨드라 국왕에게 군·경 등으로 구성된 15만 명에 이르는 정예 보안군이란 마지막 ‘기댈 언덕’이 있기 때문이다. 인도 일간 <힌두스탄타임스>가 카트만두 법학연구소 유바라즈 상룰라의 말을 빌려 “국왕이 또 다른 쿠데타를 모의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한 것도 이 때문이다. 상룰라는 “(1990년 제정된) 현행 네팔 헌법은 국왕에게 칙령 반포를 통해 의회를 복원시킬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자발적으로 의회 복원 결정을 내림으로써 갸넨드라 국왕은 “자신이 여전히 절대적 권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 셈”이라는 것이다. 이번 시위 과정을 통해 나타난 네팔 국민들의 열망은 분명하다. 제헌의회를 구성해 헌법을 바꾸고, 선거를 통해 네팔이 입헌군주국으로 남을지 공화국으로 나아갈지를 직접 결정하는 게 이들의 바람이다. 하지만 상룰라는 “현행 헌법엔 이런 형태의 국민투표를 실시할 수 있는 근거 규정이 없다”고 못박았다. 자생적 마오세력 ‘낙살라이츠’로 골머리 결국 복원된 의회는 우선 현행 헌법을 개정하기 위해 근거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비록 형식적인 것이지만 국왕의 재가를 얻어야 한다. 현행 헌법은 의회가 헌법 개정안을 국왕에게 제출하면, 국왕은 두 달간 이를 심의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기간이 지나면 국왕은 개정안을 재가하든가, 개정안에 대한 재개정 권고안을 첨부해 의회로 돌려보내야 한다. 물론 의회가 국왕의 개정 권고안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같은 개정안을 국왕에게 다시 보낸다면 그는 이를 재가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시간이다. 헌법 개정안이 의회와 왕실을 오가는 사이 노회한 갸넨드라 국왕이 충분히 ‘딴 맘’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7개 주요 정파 사이에서 분열의 싹을 틔울 수도 있고, 자기 휘하에 있는 군부를 직접 동원하는 모험을 할 수도 있다. 상황이 이쯤 되면 휴전을 약속한 마오주의 반군 진영의 인내심도 바닥을 드러낼 것이다. 여기에 ‘낙살라이츠’로 불리는 자생적 마오주의 무장세력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이웃나라 인도 역시 사태를 두고만 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민주화의 봄’을 맞은 네팔의 고민은 오히려 이제부터가 시작인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