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넘버4’ 이탈리아 도약하는가

606
등록 : 2006-04-19 00:00 수정 :

크게 작게

베를루스코니의 중도우파연합 겨우 누르고 집권한 프로디의 중도좌파연합… 미국보다는 유럽연합에 밀착, 제1외교정책을 이라크 철군으로 삼을 듯

▣ 브뤼셀=도종윤 전문위원 ludovic@hanmail.net

4월9~10일 이틀간 이탈리아에서 총선이 실시됐다. 결과는 중도좌파연합의 신승. 이탈리아 내무부는 하원(630석)의 경우 로마노 프로디가 이끄는 야당인 중도좌파연합이 49.8%, 현 총리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이끄는 중도우파연합이 49.7%의 득표율을 기록했다고 전했다. 득표 수로는 2만5천 표, 지지율은 불과 0.1%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다수당에 의석을 몰아주기로 한 지난해 12월 통과된 새 법률에 따라 중도좌파연합이 과반수인 348석을 얻었다. 반면 우파연합은 281석을 얻는 데 그쳤다. 상원(315석)에서도 158석 대 156석으로 근소하게나마 좌파연합이 승리했다.

세계 25위 부자와 학자의 대결


양대 정파를 이끈 두 사람의 스타일은 매우 대조적이다. 3개 텔레비전 방송채널 소유주로 <포브스>가 선정한 2005년 세계 부자 순위 25위(자산 약 120억달러), 명문 축구클럽 AC밀란의 구단주이자 가끔은 대머리에 모발 이식을 하는 멋쟁이. 이런 것이 베를루스코니를 규정하는 표현들이다. 그는 끊임없는 스캔들 메이커이기도 하다.

4월11일 이탈리아 총선에서 중도좌파연합을 이끈 로마노 프로디 전 총리가 로마에서 총선 승리를 축하하고 있다.(사진/ AP Photo/ ANDREW MEDICHINI)

파시스트 베니토 무솔리니를 찬양하며 “무솔리니 정권에서 부당하게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해 구설수에 올랐고, 2001년에는 “서유럽인들이 이슬람인들보다 우수하다”고 말해 무슬림들의 분노를 샀다. 실제로 무솔리니의 큰딸 알렉산드라가 몸담았던 극우 정당 ‘국민연합’은 베를루스코니를 지지하기도 했다. 그에 대한 해외 언론의 평가도 대체로 부정적이다.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4월 둘쨋주 머리기사를 “베를루스코니에게 패배를 안겨주어야 할 때”로 삼았다. 이어 사설에선 그가 소유한 기업의 이익 부풀리기, 조세 회피, 불법적 부동산 투자, 자신과 친구들에게 유리하도록 꾸민 여러 법률안을 들먹이며 그가 도덕적으로 부패했다고 일갈했다.

반면 로마노 프로디의 경력은 대부분 학자 이력으로 채워졌다. 밀라노 가톨릭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프로디는 산업정책 전문가로 학자의 길을 걸었다. 1963년부터 1999년까지 볼로냐대학 정치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산업구조와 산업정책을 주로 강의했다. 1978년엔 좌파 정부 밑에서 산업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으나, 그는 여전히 학자로 머물렀다. 그러다 1995년이 돼서야 좌파 정당 ‘올리브나무당’의 총재에 취임해 본격적으로 정치에 나섰다. 이듬해 총선에서 승리해 총리가 되기는 했으나, 연정 파트너였던 재건 공산당이 지지를 철회해 2년 만에 중도 하차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1999년에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돼 5년간 유럽연합을 이끌며 강한 유럽으로 나아가는 토대를 만들었다. 유창한 영어·프랑스어 구사 능력에 조정자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면서, 2001년에는 미국 따라잡기 프로그램인 ‘리스본 어젠다’를 이끌어내는 기획력을 보였다. 또 2002년에는 유로화를 성공적으로 출범시켰고, 2003년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비난하는 유럽연합의 입장을 정리하기도 했다.

공공지출 줄이지만 상속세는 부활

이번 선거의 쟁점은 무엇보다 경제 문제였다. 베를루스코니가 집권한 지난 5년간 이탈리아 경제는 계속 내리막길을 걸었다. 유럽연합 25개국을 기준으로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100으로 보았을 때, 이탈리아는 지난 2001년엔 112였으나 2005년엔 103.7을 기록했다. 오는 2007년엔 102.3까지 떨어질 것이란 예측도 나왔다. ‘유로스탯’의 자료를 보면, 2003년과 2005년엔 두 차례나 실질 GDP 성장률이 0%에 머물렀다. 이는 유럽연합 25개국 중 최악의 경제지표다. 2006년 정부 재정적자도 GDP의 3.8%에 이를 것으로 예상됐다. 유럽연합이 가이드라인으로 삼고 있는 3%를 초과할 위기에 처해 있다.

이번 선거에서 프로디는 베를루스코니 정부가 그동안 시행한 각종 세금 감면 조치를 폐지하고, 정부 재정적자를 줄이겠다는 처방을 내놓았다. 우파 정부가 폐지한 상속세를 부활하고 증권 거래에 세금을 부과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베를루스코니는 텔레비전 토론에 나와 “프로디의 공약은 노동자 계층만을 중시하고 중산층을 고려치 않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자신은 “재산세를 감면하겠다”고 역공을 가했다. 그러나 프로디는 “상속세 부과는 수백만유로 이상의 재산을 가진 부유층을 겨냥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봉급 생활자에게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그는 재정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공공 지출을 대대적으로 줄일 수밖에 없다는 점은 인정했다.

[%%IMAGE4%%]

외교적으로 베를루스코니가 친미적이었다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그는 다른 유럽연합 국가들과는 달리 영국과 함께 이를 지지하며 군대까지 파견했다. 반면 새로 들어설 프로디 정부는 미국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유럽연합에 더욱 밀착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비록 선거 직후 프로디가 “몇 가지 견해 차이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연대는 계속 유지해나갈 것”이라고 말했지만, 한계가 있을 것임은 분명하다. 벨기에 일간지 <르수아>는 “부시가 2004년 스페인 선거에서 호세 마리아 아즈나르 총리를 잃은 데 이어 또 하나의 동맹을 잃었다”고 지적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프로디가 가장 먼저 추진할 외교정책은 그가 내건 공약대로 이라크에 파견한 이탈리아 군대를 이른 시일 안에 철수하는 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는 그동안 유럽연합에서 ‘넘버4’에 불과했다. 강대국으로 치기엔 다소 부족하고, 약소국으로 치기엔 다소 넘친다는 게 이탈리아의 고민이다. 그러나 프로디의 등장은 유럽연합 내에서 이탈리아의 입지를 강화시켜줄 것으로 보인다. 유럽연합이 사활을 걸고 있는 ‘리스본 어젠다’를 그만큼 잘 아는 유럽의 현역 지도자는 없다. 그가 친유럽연합적이라는 것은 유럽헌법 부결로 비틀거리는 유럽연합에 활력이 될 것이 분명하다. 좌파임에도 프로디가 유럽연합이 설정한 재정적자 가이드라인을 지키기 위해 공공 지출을 줄이겠다고 언급한 것도 유럽연합을 존중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다만 최근 불거지고 있는 유럽연합 회원국들의 보호주의 정책 강화에 프로디 정부가 어떤 태도를 보일지, 공공 지출을 줄이면서 어떻게 경제를 회복시킬 수 있는지는 아직 미지수다.

해외의 이탈리아인들 처음으로 투표

무엇보다 프로디에게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선거 후유증이다. 선거에서 이겼다고는 하지만, 여론조사나 투표 뒤 출구조사에서 4~5%가량 앞설 것으로 예측한 것에는 못 미치는 진땀 나는 승리였다. 베를루스코니가 패배를 선뜻 인정하지 않고 재검표를 요구하고 있는 것도 부담이다. 프랑스 일간 <르몽드>는 4월12일치 사설에서 “이탈리아는 둘로 나뉘었다”고 우려를 표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좌우 대연정을 제시한 베를루스코니의 제안은 독일의 예를 보건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벨기에나 프랑스 언론도 이런 제안을 한 베를루스코니를 ‘나쁜 패배자’라고 비판했다.

한편 이번 선거를 통해 또 한 가지 주목을 끈 것은 해외의 이탈리아인들에게 처음 선거권이 부여됐다는 점이다. 선거가 박빙으로 치달으면서 하원에서 12석, 상원에서 6석이 할당된 해외 유권자들의 표심이 캐스팅보트가 됐다. 베를루스코니가 개표 막판까지 패배를 인정치 않은 것도 해외 표에 기대를 걸었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를 통해 해외 유권자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