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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러시아 소녀가 미국인 노리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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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4-0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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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입양된 어린이 인권침해 심각해지자 러시아 국가의회서 청문회까지 소집… 허술한 법망 악용하는 브로커 활개… 해외여행 위장에 원정출산 뒤 팔고 오기도

▣ 상트페테르부르크=박현봉 전문위원 parkhb_spb@yahoo.com

3월 들어서만 벌써 두 번째 어린이 불법 해외입양 사건이 벌어져 러시아가 떠들썩하다. 3월28일 케메로보 주정부는 러시아 어린이를 뉴질랜드로 불법 입양시키는 과정에서 드러난 대규모 비리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케메로보 주 내무장관과 지방 연방보안국, 인터폴 등이 공동 발표한 내용을 보면, 러시아인 입양 브로커가 지난해 하반기 뉴질랜드로 입국하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인정 많은’ 양아버지의 정체가 탄로나다


‘엠’이라고 불리는 이 브로커는 현지에서 대대적인 광고를 통해 러시아 어린이 입양 희망자를 모았다. 정부 인가도 받지 않았음에도 그는 입양 희망자들에게서 ‘급행료’를 명목으로 모두 9만유로에 이르는 거액의 입양수속비를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이후 종적을 감춘 그는 러시아로 귀국해 케메로보주 보보시비르스크 일대를 돌며 해외입양 문서 위조를 해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노보시비르스크 출신 알렉세이 마나니코프 전 상원의원이 연루된 것으로 드러나 함께 조사 중이라고 당국은 밝혔다.

러시아 블라디미르 지역의 한 보호시설에서 입양을 기다리며 생활하고 있는 어린이들. 러시아는 루마니아에 이어 유럽에서 두 번째로 해외입양아를 많이 배출하고 있다. (사진/ AFP VALEFY MELNIOV)

이에 앞서 3월15일 볼고그라드주 지방법원에선 또 다른 불법 해외입양 브로커 나데쥐다 프라티에 대한 3차 공판이 진행돼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러시아와 이탈리아의 이중 국적자인 그는 지난 2001년 해외입양 과정에서 공문서와 인장을 위조하고, 관련 공무원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구속됐다. 그는 1993년부터 약 8년 동안 모두 600명이 넘는 러시아 어린이들을 불법으로 해외로 입양시킨 혐의를 받고 있다.

불법 해외입양 단속을 위한 러시아 사법당국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이처럼 당국이 ‘정신을 차리게 된’ 것은 지난해 하반기에 공개되면서 충격을 던져준 어린이 포르노물의 주인공이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불법 입양된 12살 소녀로 밝혀지면서부터다. 지난해 11월 중순 러시아 국영 텔레비전 은 이 소녀가 미국으로 불법 입양된 뒤 지난 1998년께부터 미국인 양아버지의 성적 노리개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보도하면서 충격을 줬다. 경찰 발표 등을 종합하면, 이 소녀는 5살 때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불법 입양됐으며, ‘인정 많고 애정이 넘치는 성실한 엔지니어’로 알려졌던 양아버지 매튜 만쿠조에 의해 포르노 사진 촬영을 강요받은 것은 물론 주기적으로 성적 학대를 당했다.

불법으로 해외입양된 어린이들이 인권침해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러시아 국가의회 두마는 정부 관련 부처 책임자를 긴급 소집해 특별청문회를 여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섰다. 청문회 과정에서 해외입양 어린이들의 학대 사례가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특히 지난 10년 동안 입양된 어린이 가운데 모두 15명이 숨졌으며, 이 가운데 14명은 미국으로 입양된 어린이들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해외판매 아기의 ‘가격’은 1만5천달러

러시아 어린이의 해외입양이 합법적으로 가능해진 것은 1996년 러시아 가정법 개정 이후다. 러시아 내에서 입양을 거절당한 어린이들만 해외입양 선청 대상이 될 수 있는 등 입양 조건은 상당히 까다롭다. 이런 어린이들은 심각한 병에 걸렸거나 발육부진 상태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러시아 교육·과학부의 발표를 보면, 최근 15년 동안 러시아에선 국내입양이 2배 가까이 줄어든 반면 해외입양은 4.5배가 늘었다. 지난 2004년에만 모두 9400여 명의 러시아 어린이가 해외로 입양된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돈만 있으면 해외입양의 ‘제반 절차’가 쉬워진다는 얘기다. 이런 가운데 각종 비리가 난무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니나 오스타니나 국가 두마 여성·가정·어린이 문제 특위 부위원장이 내놓은 조사 결과를 보면, 러시아 어린이 입양 희망자들은 허술한 법망을 뚫고 원하는 어린이를 입양하기 위해 적게는 1만5천달러에서 많게는 8만달러까지 ‘급행료’를 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고가에 ‘팔려나가는’ 어린이들은 휴양이나 치료를 위해 외국으로 나가는 것처럼 ‘반출’되는 사례가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심지어 가정을 제대로 꾸릴 수 없는 출산이 임박한 임산부들에게 해외 ‘출장분만’을 유도해 현지에서 갓 태어난 아기를 돈을 주고 넘겨받는 사건도 드물지 않게 벌어지고 있다. 러시아 경찰당국의 조사 결과 이런 현대판 ‘씨받이’를 중개하는 이들은 대개 임산부가 평소 다니던 산부인과 관계자나 조산소 직원들로 밝혀졌다. 또 외국에서 낳아 ‘판매’되는 아기의 ‘평균 가격’은 1만5천달러이며, 산모에게 돌아가는 금액은 이 가운데 7분의 1가량이 고작인 것으로 드러났다.

현재 러시아에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보다 4만여명이나 많은 72만여명의 고아가 있음에도 국민 절대 다수가 입양에 부정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사진/ EPA/ EDUARD KORNIYENKO)

허술한 법망을 적절히 악용하는 국제적 규모의 해외 입양기관들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오스타니나 부위원장은 최근 러시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러시아 어린이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면서 각종 입양 관련 단체들이 우후죽순으로 늘면서 해외입양이 일종의 수익성 높은 사업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표적 사례로 지난 1월 러시아와 미국 공동 수사팀에 의해 전모가 드러난 국제입양 전문업체 ‘유노나’를 꼽을 수 있다. 지난 1990년대 중반에 문을 연 이 업체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본사를 두고 러시아 크라스노다르에서 지사를 운영하고 있으며, 러시아는 물론 우크라이나·과테말라·베트남 등지에서 해외입양을 전문적으로 알선하면서 거액을 챙겨왔다. 지난해 미국으로 입양됐다 양어머니의 잦은 폭행으로 끝내 목숨을 잃은 6살 난 러시아 어린이 알렉세이 게이코 역시 이 업체를 통해 불법 입양된 것으로 드러났다.

고아 72만명, 2차대전 직후보다 많아

해외입양을 둘러싼 러시아 내부의 부패도 심각한 수준이다. 알레르트 리하노프 러시아어린이재단 이사장은 “러시아 어린이에 대한 해외입양 수요가 늘면서, 사회적 봉사 임무인 입양이 사업으로 변질되고 있다”며 “고위 공직자들은 사사건건 돈을 요구하고 있으며, 입양 희망자들에게 원하는 어린이의 나이와 성별은 물론 심지어 눈 색깔까지 맞춰주면서 별도 비용을 요구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현재 러시아에는 모두 72만여 명의 고아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전쟁고아가 넘쳐나던 제2차 세계대전 직후보다 4만여 명 많은 수준이다. 그럼에도 여론조사 전문기관 가 지난해 말 내놓은 조사 결과를 보면 러시아인 72%는 “입양을 고려해본 일이 없다”고 답했으며, 이 가운데 40%는 “어떤 경우에도 입양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주거환경 등 상당한 외부 지원이 따른다면 “한 번쯤 입양을 생각해볼 수 있다”고 답한 이들은 응답자의 22%에 그쳤다. 반면 외국인 해외입양에 대해선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자신들은 입양할 의사가 없으면서도, 고아들이 외국으로 ‘팔려나가는’ 것은 싫다는 이중적 태도다. 러시아가 루마니아에 이어 유럽에서 두 번째로 입양아를 가장 많이 ‘수출’하는 나라로 꼽히고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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