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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나의 교실은 농촌과 공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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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2-0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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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 빈민운동가 와니다의 이야기 I- 76년 ‘피의 10월’을 겪은 뒤 밀림 속으로


와니다 탄티위타야피탁

빈민운동가

1956년 중국계 이민 가정에서 태어난 와니다는 현재 타이의 대표적인 정치투쟁가이자 빈민투쟁가다. 와니다는 1973년의 10월항쟁에 고등학생으로 참가하면서부터 타이 현대사의 정치적 변혁기에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대학 시절 노동운동에 뛰어든 그는 하라노동자투쟁을 주도하면서 타이 노동운동의 역사적인 한획을 그었고, 1976년 10월항쟁에는 학생지도부로 상황을 주도했다.

그뒤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초까지 절정에 달했던 타이공산당의 무장투쟁에 참여했던 와니다는 타이공산당의 와해로 다시 도시로 돌아와 민중정치를 외치며 노동·빈민·인권·환경을 비롯한 타이의 거의 모든 사회운동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2년 다시 방콕민주항쟁을 주도하면서 타이 사회운동의 핵심적인 위치를 확인시켰다. 현재 와니다는 타이에서 가장 저변이 강하고 조직이 치밀하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빈민의회’의 고문으로 일하면서 10여년간 계속되고 있는 박문댐반대투쟁을 주도하고 있다.



사진/73년 10월 타이의 학생봉기. 군부는 포고령 제4호를 내세워 학생지도부를 마구잡이로 잡아갔다.(The Nation)
나는 1956년 방콕에서 중국계 가족의 일곱 아이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굶주림에 지쳤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젖먹이 어머니를 업고 풍요로운 땅이라 믿었던 타이로 이주해 왔다고 한다. 아버지는 스무살 무렵 중국이 공산화되는 과정을 보고 타이로 도망쳐온 인물이다. 아버지 말로는 “공산당을 믿을 수 없었고 공산화 과정이 두려웠다”고도 하고 때로는 “새로운 삶과 자유를 찾아 타이로 왔다”고도 한다.

우리 같은 이주민 가족들이 행상으로 살아왔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지만, 어머니의 교육열만은 여느 중국인들 못지않았던 것 같다. 행상으로 일곱 자식을 모두 학교에 보냈으니. 특히 어머니는 대개의 중국계 이민들이 집요하게 따지는 뿌리교육- 중국어, 중국문화를 잊지 않도록 중국계 학교에 보내는- 대신 좀더 진보적이라고 믿었던 천주교학교의 신부에게 우리를 맡겼고, 되돌아보면 어머니의 그 결정은 내게 참 큰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교복, 나의 첫 번째 선생님

이 천주교학교는 개종을 하지 않은 아이들도 입학을 허용할 정도로 학생들에게 자유로운 의식을 가르쳤고, 이 학교로부터 배운 자유의 정신은 지금도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로 남아 있다. 비록 우리 일곱 아이들이 학비를 단 한번도 제때 낼 수 없었던 아픈 기억을 지녔음에도 이 학교는 꿈을 꾸기에 충분한 공간이 돼주었다.

가난한 소녀의 꿈은 이랬다. 물고기가 넘쳐나는 아름다운 시냇물을 따라 끝없이 뻗어 있는 산자락, 쪽빛 하늘에서 내려쬐는 부드러운 햇살이 마당에서 뛰어노는 병아리의 가슴에 가닿고, 하늘 끝과 맞닿는 데까지 펼쳐진 풍요로운 논, 그런 곳에 집을 짓고…. 내게는 성장의 의미가, 이런 꿈이 현실과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내게 현실을 가르쳐준 첫 번째 선생님은 다름 아닌 ‘교복’이었다. 물려받은 낡은 교복은 길이가 짧아 어린 내게 처음으로 가난의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던 슬픈 대상이기도 했다. 천주교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모두 부잣집 자식들이라고 소문나 있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너는 부잣집 아인데 왜 낡은 교복을 입고 다니니?” 이런 유의 질문들은 어린 나의 가슴에 못을 박으면서 꿈과는 다른 색깔의 현실이 있음을 서서히 깨닫게 했다.

고등학교로 진학할 무렵, 부모님들은 내가 기술학교에 진학해서 빨리 사회로 진출하기를 바랐지만 나는 정규학교를 우겼고, 결국 부모님들은 내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나는 이 과정에서 다시 ‘자유’의 가치를 느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가난한 학생들이 진학하는 기술학교 대신 부자 아이들처럼 고등학교를 택함으로써 가난에 대한 부끄러움을 가려보겠다는 심리가 지배하고 있었다. 의사가 되려면 고등학교를 가야 한다고 우겼지만.

진통 끝에 진학한 고등학교, 그러나 대학 진학만을 다그치는 그 고등학교는 꿈을 좇았던 내게 ‘버르장머리 없는 년’이라는 별명을 달아주었고, 결국 교과서나 교실은 내가 지닌 꿈도 사회에 대한 의문도 해소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과정 속에서 내가 부끄러워했던 가난은 더이상 나의 원죄가 아님을 느끼면서 나는 교실을 떠나 정치집회장으로 분주히 옮겨다니는 ‘못된’ 소녀가 되어갔다.

이게 1973년이었다. 당시 타이는 16년간이 넘도록 사릿타나랏 장군에서 타놈킷티카촌 장군 그리고 프라팟 자루사티안 장군으로 군부독재를 대물림하고 있던 중이었고, 타이사회는 막 정치적 각성기에 접어들고 있던 때였다. 그리고 이 무렵 대학생과 고등학생이 연대한 타이국민학생센터(NSCT)- 그뒤 타이국민학생동맹(NSFT)으로 확대개편- 가 조직되어 본격적으로 민주화를 외치기 시작하던 때이기도 했다.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처음으로 학교로부터 도망쳐 대학생들의 시위에 참여했던 건, 당시 인타논트산 꼭대기에 설치하고 있던 레이더 기지에 대한 반대운동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학교 대신 매일 사남루앙(타이의 상징적인 민주화 광장)으로 직행했고, 주제 넘게도 탐마삿대학의 정치강좌에 귀기울이며 거리시위에 참여했다.

사회가 내게 처음으로 ‘기쁨’을 가르쳐준 날들이었고, 나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군사독재에 반대했던 1973년 10월14일의 역사적인 학생봉기에 참여하게 되었다. 학생들이 평화적으로 외쳤던 ‘군부독재 종식’, ‘헌법수호’가 순식간에 방콕을 넘어 타이 전역으로 확대되자, 군부는 “5명 이상이 모일 수 없다”는 군사혁명위원회 포고령 제4호를 내세워 학생지도부를 마구잡이로 연행해 갔다. 결국 이 10월민주항쟁은 미완으로 끝났지만, 학생들에게는 새로운 사회를 찾아 길을 떠나는 자극제가 되었고, 이들은 사회 곳곳으로 파고들어가기 시작했다. 한편 이런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아시아 전역이 외형상 경제성장기에 접어들던 때라, 타이에서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그리고 도시와 농촌의 격차가 심각해지고 있었다. 이런 사회적 현실 속에서 학생들은 저마다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을 가슴에 담고 새로운 길을 찾아나섰다.

'하라투쟁'에서의 해방노동

이듬해 1974년 나는 탐마삿대학 정치학과 야간부에 진학했다. 가난했던 나는 낮을 공부보다는 생존을 위해 일하는 시간으로 활용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대학에 진학해서도 자연스레 사회를 배우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내 가슴 속에는 ‘평등’이라는 화두가 싹텄다. 그 화두는 ‘자본주의 노예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좌우명으로 발전해 나갔다. 나는 교복과 교실을 버리기로 결심한 뒤 스스로 ‘살아 있는 교실’이라고 불렀던 농촌과 공장을 향해 길을 떠났다. 대학 4년 대신 나는 현장노동과 시위판에서 4년을 때웠다.

1976년, 결국 나는 타이 노동해방투쟁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기록된 이른바 ‘하라투쟁’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5개월간 계속된 이 투쟁에서 우리는 직장을 폐쇄한 사업주에 맞서 노동자들이 모은 푼돈으로 기계를 돌려 바지를 생산했고, 이걸 싼값에 내다팔아 그 수익금으로 투쟁자금을 마련하는 해방노동을 실현했다. 우리 500여명의 노동자들은 기계에서 바지가 하나씩 나올 때마다 울었다. 그 눈물 하나로 5개월을 버텼고, 이 일은 노동투쟁에서 최초로 한 국가의 총리(쿠에크릿 프라못)가 노동자를 고발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결국, 나를 포함한 50여명의 ‘악질노동자’는 폭동진압경찰에 개 끌리듯이 끌려갔고, 그 개보다 못한 악질노동자들은 모조리 징역 6개월을 살면서 개밥을 먹었다. 노동투쟁사의 기록과 달리, 이걸 우리는 참 부끄러운 ‘훈장’으로 여겼다. 왜냐하면 당시는 수많은 학생·노동자·농민 지도자들이 우익들에게 학살당하던 시대였고, 따라서 투쟁가들 사이에는 살아남은 것 자체가 그리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인식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1976년 10월항쟁의 날이 성큼 다가왔다. 10월5∼6일, 바로 내 눈앞에서 타이인이 타이인들에게 학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시절 사회적 분위기는 공산주의 박멸에 혈안이 돼 있었고, 나를 포함한 학생들은 10월학살이 있기 전부터 공산주의자들이 현 정치상황의 치명적인 희생자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 왔다. 따라서 우리는 당시 미국의 입장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냉전의 광풍이 휩쓸고 다니던 그 시절, 베트남에서 패배한 미국은 인도차이나반도의 유일한 자본주의 생존국이었던 타이로 향한 ‘레드 도미노’를 차단하겠다는 노골적인 태도를 드러내고 있었다.

결국 당시 우익 쿠에크릿 정부는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76년 10월항쟁을 피로 물들이는 대량학살극을 저지르고 말았다. 타이사회가 최초로 미국의 본질과 마주치게 했던 이 ‘피의 10월’은 73년의 10월항쟁과 달리, 학생들을 곧장 무장투쟁의 길로 인도했다. 피의 학살극이 끝난 뒤, 분노한 학생들은 지식인의 의무에 대해서 깊이 고민했고, 사회에 대한 절망감과 책임감을 동시에 느낀 이들 사이에는 무장투쟁만이 시대적 요청이고 유일한 선택이라는 신념이 급속히 확산되어 나갔다. 선도하는 이도 없이 나를 포함한 수백명의 학생들은 타이공산당을 찾아 앞다퉈 밀림으로 들어갔다. 이 대열에는 고등학생과 교수들 그리고 노동자와 농민들도 함께했다.

내 생애 가장 위대한 경험

한편 타이공산당은 1969년 동북부에서 혁명군을 조직해 정부군과 맞선 뒤 70년대 초 무렵 이미 전국적인 군사조직체계를 완성해 있었기 때문에 무장투쟁을 꿈꾸었던 학생들에게는 기댈 수 있는 큰 언덕으로 여겨졌다. 내 밀림생활의 출발은 상록수가 우거진 타이-말레이시아 국경으로 결정되었다. 걸어서 도착한 국경도로로부터 약 100m 들어간 지점에서 우리는 최초로 얼룩무늬 전투복에 붉은별이 빛나는 베레모를 쓴 혁명군을 만났다. 그들은 악수를 청한 뒤 우리를 뜨겁게 환영했고, 이내 우리를 ‘동지’라 불렀다.

동지, 이 말은 그동안 내가 살아오면서 들었던 그 어떤 호칭보다 따뜻하게 느껴졌고, 형제와 자매의 정이 솟아나면서 내 가슴에는 이들에 대한 전폭적인 믿음이 생겨났다. 동시에 염려했던 신변안전에 대한 의구심이 사라지면서 여기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혁명군은 우리를 ‘청년혁명가캠프’로 인도했다. 이렇게 해서 내 생애 가장 위대한 경험은 시작되었다.

우리를 생각하며 울고 계실 어머니의 모습을 내 심장에서 떼놓기 위해 나는 위대한 이데올로기를 위해 봉사한다는 사명감을 스스로에게 주입시키며 깊고 깊은 밀림으로 들어갔다. 밀림, 나를 포함해 ‘노동자를 위한 평등한 사회’를 외쳤던 동료들에게 야생으로 뒤덮인 밀림은 첫날부터 가혹한 시험으로 다가왔다. 특히 우리가 들어갔던 밀림지역은 혁명군 사이에도 가장 거친 지역으로 소문난 곳이었다.(다음에 계속)

와니다 탄티위타야피탁(Vanida Tantiwitayapitak)/ 빈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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