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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누 할아버지, 분화구에 사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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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3-1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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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천지의 30배나 되는 응고롱고로 분화구에 사는 누와 얼룩말
문을 열면 하늘을 빼곡히 매운 별들이 쏟아지는 아프리카의 밤이여

▣ 구혜경 방송작가·세원, 윤재 엄마 hk21bh@hanmail.net

그저 펼쳐진 것이라곤 초원뿐인데, 이곳 어디에 동물들이 숨어 있을까? 특별히 나무도 많지 않아 보이는 응고롱고로 분화구. 분화구이기 때문에 이 안에 사는 동물들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 여기서만 산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곳에 과연 동물이 있을까 싶었다.

여러 동물들의 특징을 따왔다?


응고롱고로 분화구는 백두산 천지의 30배나 된다. 가로지르는 데만도 1시간이 넘게 걸린다. 분화구 위에서 내려다보면 검은 점처럼 보이는 것이 동물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넓다. 누떼나 얼룩말, 버펄로, 타조는 그나마 색깔이라도 짙어서 짐작할 수 있지만 사자나 치타가 과연 여기서 살 수 있나 싶은데, 있다고 한다. 치타가 저기 있다고 해서 자세히 살펴보니 앉은키를 덮을 정도의 풀에 치타가 앉아 있다. 아마도 눈 좋고 익숙한 사파리 운전사가 아니면 알아차릴 수 없을 듯하다.

응고롱고로 분화구의 주인공은 누다. 누의 흰 수염은 호통치는 할아버지 같다.

세렝게티나 응고롱고로 분화구의 주인공은 뭐니뭐니 해도 누와 얼룩말이다. 300만 마리에 이르는 엄청난 개체 수와 계절에 따라 케냐의 마사이마라와 탄자니아 세렝게티로 이동하는 그들의 모습은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차를 타고 초원을 누비면 누떼가 차 소리에 놀라 뛰어가기도 하지만, 어떤 누는 때로 길 한가운데 버틴 채 멀뚱히 쳐다보며 비키지 않는다. 마치 “넌 누구냐?” 하고 묻는 듯이. 아마도 무리의 대장인 듯싶다.

아프리카 민화에 하느님이 많은 동물을 창조한 뒤, 아이디어가 떨어져서 여러 동물들의 특징을 골라 만든 것이 누라고 한다. 누는 소의 뿔과 양의 털, 말의 꼬리를 가지고 있다. 소도 아니고 양도 아닌 묘한 생김새를 지녔다. 많은 누를 보았으되 정확하게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 이유는 특징 없이 각각의 동물 형상을 따왔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얼룩말처럼 선명한 무늬를 지닌 것도 아니요, 버펄로처럼 양 갈래로 나뉜 촌스런 헤어스타일이 인상적인 것도 아니다. 코뿔소나 기린처럼 확연한 신체적 특징을 가지지도 않았다.

게다가 나는 누의 생김이 초라하다고 느껴진다. 전체적으로 거무스름한 색깔이다. 하지만 머리와 갈기, 꼬리는 한층 검고, 턱 아래에 난 수염은 흰색이라 마치 수염을 기른 할아버지가 “이놈!” 하고 쳐다보는 듯하다. 누는 보통 얼룩말과 함께 다니는데, 얼룩말은 눈이 좋고 누는 소리를 잘 듣는다고 한다. 또 누는 긴 풀을 먹고, 얼룩말은 짧은 풀을 먹기 때문에 사이좋게 서로 협력할 수 있다고 한다. 특히 강을 건널 때는 얼룩말이 앞장서고 그 뒤에 누가 뒤따르는 것을 볼 수 있다. 강을 건넌 누떼는 아직 건너지 않은 동료에게 신호를 보낸다. 그 신호를 듣고 있자면 동물의 세계에도 상부상조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누는 서로 힘을 모아 천적에 대항하기도 한다. 한번은 치타가 서너 마리의 새끼들을 데리고 누떼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누떼들이 하나둘씩 모이더니 치타를 향해 일렬로 섰다. 아마도 치타가 자신들을 사냥하려고 생각한 듯한데, 누떼가 일렬로 서서 대항하는 모습을 보이자 치타는 새끼들을 이끌고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어 가버린다. 사실 치타도 사자나 하이에나에게서 새끼를 지켜야 하는 처지다.

코뿔소는 세계적으로 보호하는 동물 중 하나다. 코뿔소의 뿔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만큼 많은 수의 코뿔소들이 사냥으로 또 지금도 밀렵에 의해 희생당하고 있다. 코뿔소의 큰 뿔 하나는 지금도 7천달러에 거래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응고롱고로에는 코뿔소들만을 지켜보는, 총을 든 감시자(레인저)가 따로 있다. 응고롱고로 분화구를 열심히 달리던 운전사가 “코뿔소가 있다”고 소리쳤다.

물 밑에 엎드린 코뿔소나 코끼리도 모두 분화구의 주민들이다.

200m는 떨어진 듯한데, 뭐가 있긴 하다. 차를 세우고 숨죽여 보고 있는데, 점점 더 다가오더니 우리가 있는 차를 가로질러 길을 건넌다. 카메라 셔터 소리밖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저마다 자신에게 다가온 코뿔소를 가슴에 담았으리라.

사자, 새끼를 낳는 누를 공격하다

지금 세렝게티와 응고롱고로에는 새끼를 밴 누떼들이 많다. 사자들의 주된 사냥감은 누와 버펄로, 얼룩말인데, 사자들은 가끔 새끼를 낳는 누를 공격한다. 아, 생과 사는 무엇인지. 태어나자마자 사자의 먹이가 되는 누의 새끼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저 단순히 자연의 섭리라고 하기엔 너무 비참하다.

동물들이 사는 곳인 만큼 사파리를 온 사람들이 숙박할 수 있는 로지도 많지 않다. 야생동물이 사는 곳에 지어진 집인 만큼 비누나 세제를 가급적 쓰지 않도록 하거나, 완전히 정수되지 않은 흙물이 나오기도 한다. 장소에 따라서는 동물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로지의 경우, 밤이면 버펄로가 길을 따라 올라오기 때문에 밤에 로지 안을 다닐 때도 무장한 레인저와 동행해야 한다. 또 다른 로지에서는 방문을 열면 바로 초원이기 때문에 아침이면 코끼리가 바로 앞까지 오는 것을 볼 수 있고, 낮에는 임팔라나 가젤들이 앞에서 뛰놀고, 밤이면 토끼나 하이에나 때론 사자가 어슬렁거리며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문을 열면 하나를 더 만들어 달기도 벅찰 만큼 많고 빛나는 별들을 볼 수 있고, 내가 정말 어디에 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깊고 검은 밤을 만나게 된다. 그대, 모든 것을 소진했다고 느낄 때, 아프리카로 가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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