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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아로요, 당신도 조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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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1-3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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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트라다를 구속하지 않으면 ‘피플파워3’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하는 필리핀

사진/‘피플파워2’의 후광을 업고 대통령 자리에 오른 아로요. 쉽게 대통령직에 오른 만큼 그 자리를 지켜가기 위해서는 값비싼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SYGMA)
지난 1월20일 정오가 지날 무렵,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는 필리핀의 제14대 대통령으로서 취임 선서를 했다. 정치가로서는 드물게 입이 무겁고 표정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는 이 신임 대통령은 다양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시민들 사이에는 맵시있는 여성으로, 기자들 사이에는 지나치게 신중한 정치가로, 정치분석가들 사이에는 깊이를 측정할 수 없는 인물로.

아직은 축배를 들지 말라

그런가 하면, 1995년 인터뷰에서 아로요는 “정치지도자로서 나의 가장 큰 장애물은 나의 기질이다”고 말한 바 있듯이, 그의 참모들은 불 같은 아로요의 성질을 전하고도 있다. “아로요가 화를 낼 때는 모습이 완전히 달라져버린다. 피나투보 화산의 분출구 같은 그의 입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벗어나는 것이 상책이다.”


다양한 인상만큼 다양한 기대를 모으며 ‘예비했던’ 대통령직에 오른 아로요는 ‘핏줄 정치가’의 길을 순탄하게 걸어왔다. 아버지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이 대통령에 취임할 때(1961∼65) 열네살의 어린 소녀로 이미 미래의 꿈을 아버지에게서 발견했던 아로요는 미국의 조지타운대학에서 빌 클린턴과 동문 수학한 뒤 경제전문가란 꼬리표를 달고 필리핀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아로요는 곧 상류사회와 지식층의 환호를 받았고, 억만장자라는 그의 가족적 배경은 고급 재계와 ‘결합’하는 일에도 모자람이 없었다.

1998년 대통령 선거운동 당시 신 추기경이 정치지도자의 도덕성을 내세워 에스트라다를 ‘술주정뱅이’ ‘오입쟁이’로 혹평하며 거부할 때부터 아로요는 차기를 위해 호흡을 가다듬어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빈민가 출신으로 배우를 거쳐 부패로 얼룩진 아시아의 정치판에서 필리핀 사상 최대의 표몰이를 하며 당당하게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에스트라다가 결국 부패의 사슬에 걸려 퇴장하던 날, 그와 정반대의 인생을 살아왔던 아로요는 공교롭게도 ‘피플파워2’의 후광을 업고 대통령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아로요가 지금 축배를 들 만큼 여유롭다거나 개인적인 승리감에 도취되어도 좋다고 여기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아로요가 쉽게 대통령직에 오른 만큼 그 자리를 지켜가기 위해서는 값비싼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저명한 칼럼니스트 콘라도드퀴로스의 말처럼. “아로요에게 권력을 안겨준 건 아니다. 시민들이 가장 진실하고 가장 순결한 정서로 자신들의 새 세상을 만들어보겠다는 것이 ‘피플파워2’의 본질이고 따라서 아로요는 이걸 개인의 정치적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된다.”

시민 롤란도도 무거운 화두를 던져놓았다. “우린 이미 두번씩이나 대통령을 축출한 경험이 있다. 다시는 이같은 불행한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피플파워3’은 다시 일어설 것이다.”

지금 아로요에게는 정치적 부패의 사슬을 절단내는 일뿐만 아니라 하루 1달러에도 못 미치는 수익으로 살아가는 4천만명의 절대빈곤층을 돌보는 일, 붕괴된 경제 아래 신음하는 사업가들을 달래는 일, 희망잃고 헤매는 젊은이들에게 기운을 불어넣는 일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라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로요가 당면한 최대의 시련이자 도전은 에스트라다의 처리 문제고 그 결과에 따라 그의 정치적 운명도 결판날 것으로 보인다.

레예스 참모총장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피플파워2’의 주인공들은 아로요가 취임 선서를 하고 있는 동안 에드사 성당에서 이미 아로요 대통령 정부가 내려야 할 첫 번째 명령에 대한 주문을 외치기 시작했다. “에스트라다를 구속하고 처벌하라.” 이런 감정들은 <데일리 인콰이어리>와 같은 언론을 통해서도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당신이 단순히 대통령 선서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게 아니다. 시민들이 당신의 손을 잡아준 의미는 에스트라다를 처단하라는 준엄한 명령이다. 우리는 당신의 시민이고 우리는 당신을 지켜볼 것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아로요가 대통령집무실에서 수행해야 할 첫 번째 업무는 에스트라다를 감방에 집어넣는 일”이라는 의견들이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에스트라다 탄핵재판에서 특별검사로 활약했던 변호사 시메온 마르켈로는 현재 시민들의 정서에 대해 아로요가 후회없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시민들의 반응을 볼 때 ‘피플파워1’이 아직 종결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국가를 약탈한 뒤 도망쳐버린 마르코스를 처단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덮어버린 것이 결국 피플파워2를 불렀다는 뜻이다. 시민사회에서도 “두번은 없다” “그때보다 지금은 우리도 성숙해 있다”는 말들로 에스트라다 처벌에 강한 집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아로요는 모호한 표현으로 ‘균형잡기’에 치중하고 있는 인상이다. 에스트라다 처리 문제에 대한 그의 입장을 담은 첫 번째 성명서는 사면을 강조했다. ‘법률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라 ‘여론’이 필요하다는 점을 들면서 사면의 가능성에 초점을 맞췄다. 그뒤 아로요는 다시 그의 정부가 “에스트라다의 범법행위를 추적할 것”이라는 발표를 통해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며 ‘떠보기’를 하고 있는 인상을 풍겼다. 현재 아로요 진영에 참여하고 있는 한 법률고문은 에스트라다 사안의 어려움을 이렇게 토로했다. “의견만 난무할 뿐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 어떤 결정이든 문제부터 드러나니….”

이런 가운데 시간이 흐를수록 시민사회가 요구하는 ‘척결론’보다는 ‘피플파워2’를 주도했던 신 추기경과 코리 전 대통령이 처음부터 주장했던 ‘절충론’쪽으로 중심을 잡아가는 것이 아닌가라는 추측이 늘어나고 있다. 절충론은 에스트라다의 퇴진을 종용하던 중재 단계에서 최소한 에스트라다와 그의 가족 재산 가운데 부패하지 않는 부분은 인정해주고 에스트라다를 외국으로 떠날 수 있도록 하자는 협상용이었다.

한편 에스트라다 처리 문제를 놓고 아로요의 개인적인 감정도 상당한 어려움으로 작용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로요는 특히 피플파워2의 ‘마지막 바람’으로 에스트라다를 날려버리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던 레예스 참모총장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는 마음을 숨기지 않았는데, 레예스 장군이 에스트라다에게 최후통첩을 보내면서 그의 안전보장을 약속했고 따라서 축출당한 대통령에게 관용을 베풀자는 입장을 지닌 것으로 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에스트라다와 ‘거래’ 있었나

아로요에게 최대의 시련이자 도전은 에스트라다의 처리 문제다. 그 결과에 따라 그의 정치적 운명도 결판날 것으로 보인다.(SYGMA)
이른 진단이긴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에스트라다가 외국으로 달아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이미 아로요와 에스트라다 사이에 충분한 ‘거래’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도 있다. 또 일부 법률가 집단에서는 에스트라다가 전통적으로 지루하기 한이 없는 필리핀의 재판절차를 통해 결국 시간만 때우면 된다는 확신을 지닌 것으로 보기도 한다.

어쨌든 아로요는 ‘피플파워2’에서 신세를 진 ‘고위급 친구’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고 한편으로는 정치적 부패에 대해 인내심을 잃은 시민들- 마르코스를 쫓아내는 데 20년이 걸렸던 것을 에스트라다의 경우는 2년 만에 해치운- 의 감정을 두루 살펴가야 하는 복잡한 심사를 지닌 채 시험대에 올랐다. 그리고 ‘피플파워2’의 주인공들은 적어도 아로요에게 ‘뭔가’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믿으며, ‘뭔가’를 되돌려 받고자 한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 ‘뭔가’가 에스트라다에 대한 처리 문제로 집약되고 있으며, 아로요에게는 ‘솔로몬의 지혜’가 요구되고 있다. 결국 ‘에스트라다’라는 화두는 선거라는 정치 행사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궁에 진입하게 된 아로요가 지닌 한계며 동시에 그가 치러야 할 값비싼 대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주님께서 힘든 일을 앞에 둔 필리핀 역사의 바로 이 지점에 나를 보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아로요가 대통령 취임사에서 했던 이 말은 해석하기에 따라 강한 자의식을 담은 표현으로도, 한편으로는 훗날 애석한 한 대통령의 운명을 상징하는 말로도 쓰일 수 있는 표현이다. 이 말들이 어떻게 시민들에게 받아들여질 것인가는 모두 그 자신에게 달렸다. 분명한 것은 누가 진실로 ‘피플파워2’를 위해 싸웠으며 그들은 ‘피플파워2’가 무엇을 위해 싸웠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아시아 네트워크 팀장
마리테스 시손(Marites Sison)/ 전 <마닐라타임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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