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쥐’는 외로워…
등록 : 2001-01-30 00:00 수정 :
사진/신문을 팔며 생활비를 버는 모스크바의 한 봄쥐.
지난 1월19일 새벽 2시께 모스크바의 덴마크대사관에 괴한이 침입했다가 경보기 소리에 출동한 대사관 경비들에게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가 경찰서에 인계돼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덴마크대사관에 스파이가 잠입하다 체포됐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 때문에 기자들이 경찰서로 몰려와 법석을 피우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날 대사관쪽 공식발표로 이 소동은 스파이와는 거리가 먼 한 ‘봄쥐’가 일으킨 해프닝으로 밝혀졌다.
약자로 ‘봄쥐’(BOMJ)라는 말은 ‘일정한 거주지가 없는 사람들’을 총칭해서 일컫는 말이다. 이번 해프닝의 주인공인 라니크 우스마노프는 모르도비야 지역에서 상경한 20대 초반의 젊은이였다. 그의 경찰진술에 따른다면 “사랑하는 여자를 찾아 함께 새로운 삶을 건설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 갓 군에서 제대해 직업도 없는 그를 애인이 외면하고 거리로 내쫓자 주머니에 단돈 1카페이카도 없는, 영락없는 봄쥐 신세가 되고 말았다. “어떻게 하면 한끼를 때울 것인가”만을 생각해왔던 그는 3일간이나 굶자 배고픔을 못 참고 “단지 남의 부엌을 좀 뒤지기 위해” 괜찮아 보이는 집의 침입을 결심하게 됐다. 모스크바 지리도 잘 모르는 그가 첫 번째 공략대상으로 삼았던 것이 ‘재수없게도’ 대사관 건물이었던 것이다.
대개 봄쥐가 많이 사는 곳은 지하실, 건물 옥상과 계단, 전철역 주변의 지하도 등이다. 낮에는 생계활동에 나서는데, 가장 기본적인 생계수단은 ‘구걸’이다. 또 대도시 지하철역 주변 등의 간이식사 코너 주변에 얼쩡거리다가 남들이 먹다남긴 빵 조각을 주워서 배를 채우거나 빈 맥주병들을 모아 팔아 양식을 조달하기도 한다. 또 주택단지의 큰 휴지통을 정기적으로 점검해서 쓸 만한 물건을 찾아 이를 직접 사용하거나, 재수가 좋아 제법 그럴듯해 보이는 물건을 찾아내는 횡재(?)를 하면 이를 손질해 인근 시장의 길목에서 판매하는 것도 꽤나 잘 알려진 ‘사업’이다.
봄쥐 현상은 러시아 현대사의 비극적 단면을 드러내는 하나의 주요한 표식이다. 그 출현 원인에 대해 상트 페테르부르크시 봄쥐대책위원회 상담책임자 타티야나 블라소바는 “근본적으로 소련의 몰락시점으로 거슬러올라간다”고 못박았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소련 시절에는 그나마 직장별, 지역별로 봄쥐 계층의 사람들을 한곳에 동원해 비록 강제적이었을망정 일을 부과했다. 그리고 그들을 수용할 대소규모 기숙사도 마련돼 있었다. 하지만 페레스트로이카로 가속화된 사유화 조처 이후 과거와 같은 공공 흡수력이 마비되자 이들은 다시 차가운 거리로 내몰리게 됐다. 따라서 앞으로 전 연방 차원에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재원마련 및 시설확충 등 근본적 사회복지대책이 서지 않는 한 앞으로도 봄쥐는 계절을 막론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출현해 크고 작은 사회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우울한 결론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박현봉 통신원
parkhb_spb@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