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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일본생활, 악몽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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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2-2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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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까마귀와 ‘조’자 신문, 그리고 끔찍한 먹을거리들과 익숙해지기까지

▣ 도쿄=황자혜 전문위원 jahyeh@hnmail.net

“으악, 이건 악몽이야!”

벌떡 깨어나니 온몸이 땀에 절어 있다. 간밤의 진도 3.5 지진으로 공포에 휩싸인 탓이리라. 게다가 화장실의 두루마리 휴지까지 눅눅해지고 커튼에 곰팡이가 스는 두 달여 장마와의 장기전, 아침부터 장난 아니게 까악대며 뒤통수를 쪼는 듯한 기세로 쓰레기봉투를 헤집어놓는 까마귀의 공포는 ‘미저리’ 이상이다.

그래도 살아야 하리,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감? 이 집에 조간신문이 오던가? 잠에서 덜 깬 눈으로 신문을 찾는다. 룸메이트가 헤쳐놓은 광고전단에 깔려 캑캑대고 있는 신문을 집으려는 순간 나까지 ‘헉’ 숨이 막히고, 눈이 번뜩 뜨인다.


“아니, 이놈의 신문. 여기까지 뿌려대나?”

식당에서 규동을 먹는 사람들. (사진/ EPA)

눈에 들어오는 아침 ‘조’자에 모 일간지를 떠올린다. 복도에 주저앉아 설마하고 들춰보니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이다. 나의 일본 악몽기의 첫 페이지다.

메뉴를 정해 식권을 사고 카운터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먹는 값싼 ‘규동야’(소고기덮밥집)에서 아침 메뉴인 ‘사카나테쇼쿠’(생선구이 정식)를 먹는다. 딸려나온 ‘낫토’, 이건 또 어떻게 먹는 물건인고? 주변 손님들을 곁눈질한다. 나무젓가락으로 휘저으니 미세한 실 같은 것이 끈적끈적 늘어난다. 맛은 둘째치고 먹는 모양새가 경박하게 느껴진다. 젓가락으로 휘저어서 밥그릇을 입에 대고 내용물을 쓸어넣는 형국이라니, 뭐 입이 쓰레받기도 아니고 말야.

‘소바야’(모밀국수집)는 또 어떻고. 푸석푸석한 소바를 그냥 간장 같은 것에 찍어 먹으라네. 아흐, 내가 맛 짠 건 봐주겠는데, 인간들 진짜 짜다 짜. 그 흔한 단무지 한 조각 안 주고. 이건 또 뭐야. 희멀건 국물이라 곰탕에 라면을 만 것인 줄 알았는데, 돼지뼈를 우렸다네. ‘돈코쓰라멘’? 아아, 아무튼 김치 없이 이런 게 넘어가다니 이해할 수 없어. 삼겹살 먹을 때 생마늘 먹는 것을 보고 혀를 두르는 일본 사람들은 다음날이 휴일이 아니면 되도록 마늘을 먹지 않는다. 마늘 냄새를 없애는 약과 껌이 따로 시판될 정도다. ‘바사시’(말고기 회)도 된장하고 마늘 없인 입에 못 대고, ‘다코야키’니 ‘야키소바’니 하는 일본 포장마차 간식거리도 김치 없이는 니글거려 못 먹는 내게, 자연히 악몽은 지진과 까마귀에서 먹을거리로 이어졌다.

머리카락이 뭉텅뭉텅 빠지는 스트레스로 숱이 반으로 줄었다. 간만에 한국 식당 가면 걸신 들린 사람처럼 끝장내는 기분으로 김치를 넣어주어야 생체리듬이 회복되는 듯하나,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이면 여지없이 탈이 났다.

술 문화는 어떻고. 처음엔 무조건 맥주, 그리고 다음에 “오늘 술 뭐로 할까?” 묻는다. 다 마시지도 않은 술을 자꾸 채워준다. 예의인 줄 알고 따라주는 족족 마시면, 짬뽕에 과음으로 숙취와 두통이 약속이나 한 듯 기다리고 있다. 또 목조건물의 겨울은 한국인에게는 유난히 춥다. 일본에서 자기 전에 욕조에 물을 받아 온 가족이 순서대로 들어가는 이유는, 온돌이나 보일러가 없는 냉바닥에서 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뜨거운 물에 들어가 몸을 데우고, 데워진 틈에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방 안에 하얗게 입김이 선다. 덕분에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동상도 걸렸다. ‘그 겨울 그 목조주택’도 악몽 중의 악몽이었다.

일본 생활 6년차인 지금은? 인간, 적응력 탁월하고 입은 간사하다 했던가. 일본식 매실 장아찌 ‘우메보시’를 처음 먹고 이거 인간이 먹는 거냐 묻는 나의 반응을 악몽처럼 기억하는 일본인 룸메이트가 무색하게 이젠 아침마다 시디신 우메보시를 먹고, 속 풀고 싶을 때 가장 당기는 게 ‘소바’가 됐다. 낫토는 일본 사람들보다 더 발랄하게 먹어치우고, 남의 잔 선제공격으로 자신의 알코올 농도를 조절하게 된 나를, 그리고 무엇보다 진도 4 정도의 지진에 일본 사람보다 더 무뎌지고, 까마귀에도 아침신문 ‘조’자에도 놀라지 않는 나의 담대함이 더 악몽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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