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착취제도였던 한·중·일의 십장, 바오궁터우, 나야가시라…위기에 봉착한 후기 자본주의는 왜 그때 그 시절의 무기를 다시 꺼내들었나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한국의 현대 노동 역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두 해를 든다면 1987년과 1997년을 이야기할 수 있다. 1987년의 대투쟁은 대기업의 숙련 남성 노동자들에게 부분적으로 중산계급으로의 신분 상승의 길을 열어주었다. 육체노동이 빈곤을 의미해온 사회에서 일부 노동자라도 중산층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은 같은 해에 이뤄진 제도적 민주화보다 어쩌면 더 뜻깊은 일일 수도 있었다.
세적 살인, 생솔잎을 태워죽이다 그러나 체제와 타협한 대가로 조직화된 노동자들이 얻은 자본가의 양보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997년부터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사항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한국 부르주아는 노동 조건을 1987년 이전의 시대로 돌리기 시작했다. 비정규직이 새로운 시대의 화두가 됐고, 유럽 등과 달리 경영 참여는 생각도 못하는 등 생산 수단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됐던 한국 노동은 그 자체가 ‘일용품’ 성격의 저가 생산수단이 되고 말았다. 1997년 이전의 노동자는 그나마 온정주의적 생산문화 속에서 ‘직장의 가족’과 유대감을 키울 수 있었지만 1997년 이후 은행 창구나 자동차, 금속공장의 계약직이나 파견직은 사용자가 ‘그때그때’ 싼 가격으로 썼다가 필요 없을 때 안 쓰는 ‘재료’의 대접을 받는다. 우파 언론들은 비정규직 박대의 원인을 정규직 ‘귀족 노동자’의 고액 연봉에서 찾느라 야단이지만 그것은 강도 맞은 보행자에게 “저 옆에 가는 사람이 강도를 안 맞았기 때문에 당신이 맞게 됐다”고 말하는 셈이다. 정규직이 비정규직들과 잘 연대하지 못해온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80%가 넘는 ‘귀족적’ 정규직이 비정규화에 대한 불안을 느낀다는데, 그것이 절대 공연한 불안은 아니다. 극소수의 관리자와 기간 노동자를 제외한 대다수를 비정규화해 노동의 종합적인 사회적 배제를 통한 이윤 극대화를 취하려는 것이 한국 자본계급의 핵심 전략이기 때문이다. ‘역동적인 시민사회’는 지배자들이 늘 ‘국정 홍보’에 써먹지만, 노동은 ‘시민사회’에서 자리를 빼앗기고 사회의 주변으로 몰린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수백만 명의 근로자가 사내 하청·파견 등 중간착취가 태심한 조건에서 일하는 것을 두고 ‘노동시장의 유연화’(?)라고 자랑한다. 그런데 노동자가 직장의 안정을 잃는 것이 과연 평생 고용제에 비해 진일보인가? 1997년 이후의 ‘새로운’ 고용 양태는 사실 새롭지도 않다. 노동 청부업자에 의한 중간착취가 제도화된 간접고용 형태들은,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맹아기라 할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에 한·중·일 세 나라에서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원시 축적이 이루어졌던 그 시기에 그러한 고용 형태는 노동의 순종을 보장하는 한편 임금 저하를 통한 자본가의 초과이윤을 보장했다. 1987년 체제의 붕괴는, 후기 자본주의의 지배 계급이 초기 자본주의적 착취 방법의 재도입을 통해서 신자유주의적 ‘무한 경쟁’에 합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즘 우리가 인력 파견업체라고 부르는 것을 1870년대 중반 이후의 일본 탄광촌에서는 나야가시라(納屋頭)라고 불렀다. 탄광 주인의 위탁을 받은 나야가시라라는 인력 청부업자는 속이거나 유괴, 선불 등의 범죄성이 강하거나 비윤리적인 방법으로 노동자들을 모집해 탄광 주인의 지휘하에서 부렸다. 노동자 임금의 7%를 떼어먹는 것은 기본이었으며 임금의 일부를 선불로 주었을 경우에는 ‘이자’ 등의 명목으로 월급의 상당 부분을 수탈했다. 나중에 식민지 시대 조선의 공장에까지 전염되고 지금까지 외국인 노동자 등에게 적용되고 있는 이 청부 시스템의 특징은 청부업자의 노동자에 대한 제도화된 폭력이었다. 탄광의 나야가시라는 명령을 거역한 노동자에게 곤봉 세례는 물론, 도망가는 노동자를 붙잡아 거꾸로 매달아 생솔잎을 태워 그슬려 죽인다든가 하는 중세적인 살인도 행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구리 광산의 한바가시라(飯場頭)나 제조업의 세와야쿠(世話役) 등 다른 업종의 중간착취자들도 노동자를 폭력적으로 지배했던 것이다.
다카지마 탄광 ‘파견 노동자’들의 투쟁
100여 년 전의 이와 같은 ‘노동 파견제도’는 어떻게 해서 철폐됐을까? ‘파견 노동자’들을 제대로 훈련시켜 노동의 효율성을 높이기 어려운 점을 파악한 주인들이 충실성과 노동의 질이 더 높은 직접고용 형태를 선호하게 된 부분도 있었지만, 19세기 말에 이뤄진 직접고용으로의 전환은 끈질긴 계급투쟁의 성과였다. 노동자들을 노예로 부리다 콜레라가 발병했을 때 살아 있는 환자들과 죽은 주검들을 함께 섞어 해변에서 불태워버리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범죄로 유명했던 나가사키 근처의 다카지마(高島) 탄광에서는 1872, 1878, 1880, 1883년에 계속 폭동이 일어나 나야가시라 제도의 철폐 요구가 거셌다. 진압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사살되는 등 투쟁은 고됐지만 결국 주인들은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의 사내 하청 노동자들의 직접고용 쟁취 투쟁을 볼 때 가끔 필자의 머릿속에는 나야가시라 제도 철폐 투쟁 장면이 떠오른다.
나야가시라들은 조직폭력배들과 긴밀하게 연관돼 있었는데 이 점에서 동시대 중국의 노동 청부업자들인 바오궁터우(包工頭)들도 다르지 않았다. 청나라 말기부터 민국시대 후기까지 중국의 많은 현장들을 지배한 이 제도의 기원에 대해 19세기 중반 영국 탄광의 노동 청부 제도를 복제했다는 설과, 전통 시대의 반(半)농노적 성격의 노동 통제를 ‘근대화’했다는 설 등이 분분하지만 비밀 결사(會黨)나 지주들의 민병대에 기댔던 바오궁터우들이 물리력을 대대적으로 동원해 광부들을 착취했다는 것은 중국 노동사의 중요한 부분이다. 중국의 탄광에서는 1930년대까지 20~30%의 숙련 노동자들만을 정규 고용자인 리궁(裏工)으로 채용하고 나머지 와이궁(外工·미숙련 비정규 고용자들)을 바오궁터우에게 청부해 임금도 바오궁터우를 통해 간접지불하는 것이 관례였다. 효율성이 낮은 이 제도를 국민당이 1930년대에 뜯어고치려 했지만 1949년에 공산당이 집권한 뒤에야 본격적으로 혁파됐다.
그런데 1990년대부터 중국의 탄광이나 건설현장에서 농촌 출신의 이주 노동자인 민궁(民工)들을 모집해 임금을 중간에서 착취하고 관료들과의 연줄과 물리력을 동원하는 바오궁터우들이 다시 등장해 해외 학계의 주목을 끌기도 했다. 중국 위정자들이 ‘개혁·개방·현대화’를 들먹이지만 노동자들을 감금·고문하는 인신매매꾼 격의 바오궁터우 이야기를 들으면 오히려 ‘올드 차이나’의 끔찍한 현실이 떠오른다.
구한말의 한국은 이웃 나라보다 산업 발전이 더뎌 광공업 종사자들은 전체 근로인구 중 2%도 되지 못했고, 그것도 주로 광산 노동자들이나 건설인부, 일본으로 수출되는 미곡의 하역작업을 담당했던 개항장의 부둣가 노동자들이었다. 1903년에 전국에서 약 3천 명이 되었던 부둣가 노동자들은, 일부는 배타적인 조합인 도중(都中)에 가입되어 작업에 파견됐고, 일부는 조합에 들지 못해 ‘비정규직 중 비정규직’ 신세를 면치 못했다. 조합에 든 모군(募軍·당시 막노동자 칭호)들이 관에서 임명하는 십장에게 임금의 10% 정도를 떼여야 했으며 조합에 들지 못한 한산모군(閑散募軍)은 20%까지 뜯겼다.
비정규지기 중의 비정규직, 한산모군
그러면 명목은 노동자의 ‘장’이면서 실제로는 일종의 ‘관제 파견업자’였던 십장이 하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하나는 하주(荷主)들과 연줄을 대서 도중에게 일감을 찾아주는 ‘직장 알선’이었고, 또 하나는 노동자에게 뜯어낸 자금의 일부를 관에 상납하는 일이었다. 이 중간착취자들에 대해 목포의 부둣가 노동자들이 1903년에 집단으로 반대 운동도 했지만, 운반 노동자들의 ‘간접고용제’는 식민지 때에 와서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나야가시라, 바오궁터우, 십장 등이 지금 노동 파견업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시 다가온다. 본격적인 위기에 봉착한 후기 자본주의는 초기 자본주의적 착취 제도를 되살려 위기 비용을 우리에게 전가하려 하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바처럼 100년 전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보다는 노동 진영들이 단결해 결사저항을 펼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들이 말하는 ‘시장의 유연화’ 틀이 공고해지면 결국 우리에게는 아무런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나카무라 마사노리(中村政則), <노동자와 농민>(勞動者と農民), 小學館, 1976.
이토야 도시오(絲屋壽雄), 이나오카 수수무(稻岡進) 지음, 윤내원 옮김, <일본 민중운동사>, 학민사, 1984.
Tim Wright, ‘A Method of Evading Management-Contract Labor in Chinese Coal Mines before 1937’, , 23(4), 1981, pp. 656~678.
배종무, <목포개항사연구>, 느티나무, 1994.
세적 살인, 생솔잎을 태워죽이다 그러나 체제와 타협한 대가로 조직화된 노동자들이 얻은 자본가의 양보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997년부터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사항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한국 부르주아는 노동 조건을 1987년 이전의 시대로 돌리기 시작했다. 비정규직이 새로운 시대의 화두가 됐고, 유럽 등과 달리 경영 참여는 생각도 못하는 등 생산 수단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됐던 한국 노동은 그 자체가 ‘일용품’ 성격의 저가 생산수단이 되고 말았다. 1997년 이전의 노동자는 그나마 온정주의적 생산문화 속에서 ‘직장의 가족’과 유대감을 키울 수 있었지만 1997년 이후 은행 창구나 자동차, 금속공장의 계약직이나 파견직은 사용자가 ‘그때그때’ 싼 가격으로 썼다가 필요 없을 때 안 쓰는 ‘재료’의 대접을 받는다. 우파 언론들은 비정규직 박대의 원인을 정규직 ‘귀족 노동자’의 고액 연봉에서 찾느라 야단이지만 그것은 강도 맞은 보행자에게 “저 옆에 가는 사람이 강도를 안 맞았기 때문에 당신이 맞게 됐다”고 말하는 셈이다. 정규직이 비정규직들과 잘 연대하지 못해온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80%가 넘는 ‘귀족적’ 정규직이 비정규화에 대한 불안을 느낀다는데, 그것이 절대 공연한 불안은 아니다. 극소수의 관리자와 기간 노동자를 제외한 대다수를 비정규화해 노동의 종합적인 사회적 배제를 통한 이윤 극대화를 취하려는 것이 한국 자본계급의 핵심 전략이기 때문이다. ‘역동적인 시민사회’는 지배자들이 늘 ‘국정 홍보’에 써먹지만, 노동은 ‘시민사회’에서 자리를 빼앗기고 사회의 주변으로 몰린다.

1990년대 말 중국 탄광 노동자의 열악한 환경은 청나라 말 바오궁터우의 활약을 연상시킨다. 저장성의 광산 노동자들. (사진/ EPA)

한국 자본은 정규직이 비정규화에 불안을 느끼도록 유도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불화를 조장한다. 지난 4월 열린 비정규직 철폐촉구 집회. (사진/ 한겨레 황석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