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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이 빚더미, 잔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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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1-1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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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초부터 옛소련 채무 불이행설에 휩싸인 러시아… 사태 해결 방안 놓고 총리실과 재무부 세력다툼

사진/러시아 채무 문제를 논의 하고 있는 유럽중앙은행 이사회(위쪽). 모스크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있는 슈뢰더와 푸틴.(AP연합)

신정연휴의 여운이 채 가시기 전인 지난 1월4일 “러시아가 서방에 대해 지고 있는 옛소련 시절의 채무를 변제하지 못할 것”이라는 보도가 흘러나오면서 러시아는 물론 서방의 이해당사국들 사이에서 진위여부를 확인하는 등 소동이 벌어졌다.

채무불이행에 대한 그 빈곤한 ‘해명’

때마침 이때는 1월6∼7 이틀간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의 러시아 방문이 예정된 시기여서 발칸지역 우라늄탄 문제를 비롯해 무언가 굵직한 건을 기대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엉뚱한 사안이 화제가 되면서 러-독 정상회담은 푸틴의 원래 의도를 벗어나 채무자의 구차한 변명의 자리로 변하고 말았다. 채무 변제 문제는 이미 지난해 12월 190억달러에 이르는 옛소련 시절의 대독일 채무에 대한 논의차 미하일 카시야노프 총리가 독일로 급파되는 등 주요한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였다.


사태는 프랑스쪽으로 확대됐다. 지난 1월4일 러시아의 권위있는 통신사 <리아 노보스치>는 “러시아가 ‘파리클럽’에 대해 옛소련 시절부터 지고 있는 채무 가운데 2001년 1/4분기에 상환하기로 한 약속이 사실상 이행 불가능”하다고 보도한 것을 필두로 일간 <시보드냐>, <이타르 타스> 등 러시아 내 굵직한 언론들과 <월스트리트 저널> 등 주요 외신들도 잇따라 이 사실을 보도했다. <리아 노보스치>의 보도에 따르면 알렉세이 쿠드린 제1부총리 겸 재무장관은 현재 책정된 예산으로는 당장 닥쳐오는 ‘파리클럽’에 대한 채무변제가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정부차원에서 변제기일 연장 등 필요한 조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쿠드린의 의도는 국제통화기금(IMF) 대표단의 방러 이전에 ‘파리클럽’을 포함해 러시아가 서방 국가들에 대해 지고 있는 옛소련 시절의 채무가 단기간에는 변제불가능함을 미리 알림으로써 서방 채권단들에 변제 기일의 장기화 조처 등 일종의 ‘관용’을 확보하자는 데 있었다. 그러나 주요 언론들, 특히 서방언론들은 러시아의 1/4분기 예산을 감안할 때 파리클럽에 대한 채무 상당액이 미변제 상태에 처할 운명임을 지적하면서 이번 재무부의 발표는 사실상의 ‘채무불이행 선언’이라는 우려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재무부 당국은 재빨리 이에 대한 대처작업에 들어갔고 “러시아는 그 어떠한 대서방 채무도 변제할 각오가 되어 있고 당장 이번 분기부터 변제중”이라는 해명성 발표를 했다. 그러나 이같은 해명과정에서 러시아의 현재 재정상태로는 실질적으로 일부 채무에서 ‘불이행’ 상태에 처할 수밖에 없음이 드러나고 말았다. <에코 모스크바> 라디오 생방송에 출연한 재무부 제1차관 알렉세이 쿠드린은 실제 수치까지 거명하며 사태무마에 나섰으나 대부분의 현지 소식통들은 결과적으로 그의 발표가 사태해결의 전망을 불투명하게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즉, 라디오 방송에서 공표한 재무차관의 자신감 있는 채무변제 약속에도 불구하고 그가 구체적으로 밝혔듯 현재 진행중인 변제 과정이라는 것은 고작해야 파리클럽의 이번 분기 채무액에 대한 이자에 불과할 뿐이었다. 실제 갚아야 할 총 34억달러 중 이 기간중 예산에 채무변제분으로 책정된 금액은 12억4천만달러에 불과해 사실상 2/3에 해당하는 금액이 미변제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음이 분명해진 것이다. 그러다보니 당일 라디오 방송직후 현지 언론들은 해명을 위해 나온 주무부서 차관의 태도가 “과연 러시아가 돈을 갚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그 의도가 오히려 애매하다고 혹평하기에 이르렀다.

독일 카드냐, 파리 카드냐

사진/옛소련 채무 해결방안을 놓고 대립하고 있는 카시야노프(왼쪽)총리와 쿠드린(오른쪽) 재무장관.(AP연합)
‘쿠드린 발언’이 야기한 소동이 확대돼가는 동안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의 러시아 방문이 임박했다. 바로 이 즈음에서 사태해결의 한 방안으로 ‘독일 카드’가 제시되었다. 민영 에 출연, 항간에서 떠도는 ‘채무불이행설’에 대한 견해를 피력했던 미하일 카시야노프 총리는 “독일 총리와 푸틴 총리 사이에 모종의 해결방안이 모색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가 의미했던 바는 카시야노프 자신이 지난해 12월 초 채무회담차 독일을 방문했을 때 제시한 바 있는 ‘대독일 채무의 러시아 주식과의 맞바꿈안’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러-독 정상회담에서 이 문제가 긍정적으로 합의되면 이를 선례로 파리클럽 채무도 처리 가능하다는 희망을 표시했다.

이같은 총리실의 사태해결 방안에 대해 쿠드린을 필두로 하는 재무부는 “말도 안 되는 조처”라며 완강히 반대했다. 가급적 빚 상환기간을 연기하도록 정부의 총력을 모으는 것이 상책이지 주식을 파는 행위는 대단히 비애국적인 발상이라는 것이다.

쿠드린계의 목소리가 더욱 커질 수 있는 데는 ‘카시야노프안’의 현실성을 약화시키는 주변의 객관적인 정황들이 적절히 한몫을 하고 있다. 이를테면 독일이 우선 이 안을 전폭 수용해 채무를 모두 러시아 주식으로 변제한다 하더라도 타채권국의 묵인하에서만 가능한 얘기이다. 더욱이 독일 및 여타 서방 채권국들은 에너지 계통의 이른바 ‘잘 나간다’고 하는 기업의 주식을 선호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러시아의 빚을 갚아주기 위해 한정된 수요를 놓고 각국이 별도로 아웅다웅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이를 누가 중재할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실제 ‘카시야노프안’에 이같은 우량주는 제외되어 있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그러다보니 애초 예상과는 달리 러-독 정상회담 기간에 ‘맞바꿈’에 대한 논의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사태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한마디라도 언급해야 했던 푸틴은 7일 슈뢰더를 배웅하기 위해 나간 브누코보2 공항에서 가진 공동 기자회견에서 침통한 표정으로 “어쨌든 빚은 갚을 것”이라는 힘없는 말로 때우고 말았다.

이렇게 되다보니 채무불이행 해프닝의 해결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한 채 사건은 러시아 정부에서 내로라 하는 재정전문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두 K’간의 힘겨루기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선 카시야노프편에서는 이번 기회를 지난해 말 총리 경질설이 난무했을 때 가장 큰 적수로 떠올랐던 쿠드린에 대한 좋은 반격의 계기로 여기고 있다. 주무부서 장관인 쿠드린은 언젠가는 채무변제 불가능 사실을 공개해야 할 것이고, 바로 이때 자신의 ‘맞바꿈안’을 공론화해 이에 무게를 실어줌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고 장차 불거져나올 수 있는 총리 경질설 같은 것을 아예 떨쳐버리겠다는 게 카시야노프의 속셈이었던 것이다.

이같은 카시야노프의 속셈을 모를 리 없는 쿠드린이 정초부터 서둘러 채무불이행 소동을 벌인 이유는 무엇일까. 쿠드린이 노렸던 것은 지난해 말 카시야노프의 독일행의 성과로 러-독 정상회담이 성사되고 연이어 이달 중·하순경에 ‘카시야노프안’을 토론하기 위해 독일 경제대표단의 방러가 확정됨에 따라 카시야노프가 더이상 ‘독일 카드’를 쓰지 못하도록 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는 게 유력한 해석이다. 독일과의 성공적인 협상은 지금 당장 돈 받을 것이 있는 파리클럽의 묵인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한데 공교롭게도 독일 대표단 방러 이후에 파리클럽의 협상팀이 모스크바에 입성할 예정이었다. 결국 쿠드린은 카시야노프를 상대하는 전법으로 ‘파리 카드’를 활용하고자 했고, 그 적절한 시기로 러-독 정상회담 이전을 택한 셈이 된다. 결국 그는 이달 말로 예정돼 있는 IMF 대표단의 러시아 방문을 계기로 옛소련 부채의 변제 기간 연장을 설득해 낸다는 기존 방침을 관철시키고 그에 따라 카시야노프의 입지가 약화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경제위기로 파급되지는 않을 듯

이번 ‘채무불이행’ 소동이 어떤 방식으로 해결될 것인지는 앞으로 전개될 서방과의 대화 성과에 달려 있다. 이 과정에서 총리실과 재무부의 총력전이 예상되는데 이것이 어떻게 마무리되느냐에 따라 러시아의 21세기 첫 총리의 향방이 판가름날 전망이다.

이와 함께 주목할 만한 것은 이번 사태는, 설사 해결과정이 난항을 거듭한다 해도 지난 98년 경제위기 같은 상태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게 현지 경제분석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98년에는 러시아가 채무불이행을 선언하자 이것이 곧바로 러시아 실물경제에 파급됐지만 이번에는 옛소련의 묵은 빚에 한정되므로 비록 ‘대외 채무불이행’ 조처가 발동되더라도 실물경제에는 영향력이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바로 이점을 노려서 두 K는 ‘배짱좋게도’ 서방에 물려 있는 빚을 자신들의 세력다툼의 무기로 활용하는 대담성을 보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상트페테르부르크=박현봉 통신원parkhb_spb@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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