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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조선 초경제도 기록한 이사벨라 비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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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0-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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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희의 여인열전]

▣ 김재희/ <이프> 편집인 franzis@hanmail.net

서구인의 시각치고 조선 후기 풍속도를 덜 혐오스레 그려낸 <조선과 그녀의 이웃들>의 저자 이사벨라 비숍은 1831년 태어나 1904년 세상을 떠났으니, 절정기 대영제국의 전설적 주인공 빅토리아 여왕의 64년 통치 시기를 꼬박 산 셈이다. 당시 부상하던 중산층의 ‘행복한 현모양처’ 모델과 동떨어진 삶을 부추긴 그녀 아버지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신봉하던 목사님이라, 어둠에 잠긴 세상을 복음의 빛으로 구원하려는 열망으로 신체 허약에 시달리던 스물 갓 넘은 딸을 이교도들의 땅으로 떠나보냈으나 위기를 기회로 삼은 그녀, 100년 먼저 태어난 셈치고 온 지구를 헤집고 돌아다녔다.


먼저 간 곳은 북미 대륙, 홀로 떠난 십자군 전쟁에서 다양한 정보를 모아왔으나 부친은 곧 세상을 떠나고, 이를 정리해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생계 해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후에도 역마살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거쳐 미국의 황야와 로키산맥으로 그녀를 이끌었고, 마흔 넘어 결혼한 열살 아래 의사 남편 또한 신앙심 돈독한 크리스천으로 험난한 여정이 오히려 아내의 체력을 지켜준다 믿고, 그녀를 따라 의료 선교의 길을 떠나길 희망했지만 곧 세상을 뜨고 말았다.

슬픔과의 이별 겸 다시 길을 떠난 그녀, 터키와 쿠르디스탄, 페르시아와 티베트를 거쳐 일본과 말레이반도, 중국과 러시아 특히 만주에서 시베리아까지 떠돌다 1894년 예순 넘은 나이로 조선반도에도 발을 들였다. 이후 1897년까지 네 차례 한국을 방문했고 다 합해 1년 남짓 전국을 누비며 명성황후와 고종을 비롯해 한국인 친구를 여럿 만드는 한편 동학운동과 청일전쟁, 갑오경장과 을미사변 등 열강들의 세력다툼에 신음하던 슬픈 왕국의 여러 면모를 지켜보고 기록했다. 거기 등장한 다음 정경은, 사극 작가들이 신나게 활용해도 좋을 듯하다.

“도성에는 신기한 제도가 실시되고 있었다. 저녁 8시면 큰 종이 울려 남자들에겐 귀가할 시간을, 여자들에겐 외출해 스스로 즐기고 친구들도 방문할 수 있는 시간임을 알려주었다. 거리에서 남자들을 사라지게 만드는 이 제도는 폐지된 적도 몇번 있지만, 그러면 사고가 발생해 더욱 강력하게 시행되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 깜깜한 길에 등불 들고 길을 밝히는 몸종을 대동한 여인들이 길을 메운 진기한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자정이 되면 다시 종이 울리는데, 이때 여자들은 집에 돌아가고 남자들은 다시 외출의 자유를 누린다. 한 귀부인은 내게, 자기는 아직 한번도 한낮의 한양 거리를 구경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다양한 문명권을 헤매며 여섯권의 방대한 지리지를 완성한, 빅토리아 시대 보통 여자들의 꿈과 모험을 대신 실현하고 찬사를 받던 그녀. 조선시대 초경(初更)제도의 기록을 통해 두려울 일 없는 밤, ‘피도 눈물도 흘릴 일 없는 밤’의 연원까지 전해준 할머니 이사벨라 비숍에게 21세기 한반도 여자들 또한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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