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자가 만들고 판매하는 노숙자 신문… 수동적인 수혜자의 입장에서 벗어나 새 삶을 가꾼다
사진/역 앞에서 노숙자 신문을 팔고 있는 빌프라흐(맨위). 하루 평균 15부를 판매해 22마르크 정도를 벌고 있다. <슈트라센차이퉁>의 편집실 건물. 이제 막 오후 5시가 지났을 뿐인데 겨울바람이 차가운 베를린 동물원 역에는 이미 어둠이 깔려 있다. 얼굴에 가득한 붉은 부스럼자국과 한쪽 주머니에 꽂혀 있는 맥주병이 한눈에도 노숙자임을 알게 하는 한 사람이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있다. 그의 이름은 빌 푸라흐(54). 그는 지금 <슈트라센차이퉁>이라는 노숙자 신문을 팔고 있다. 과거 동독에서 목수로 일하다 70년대 후반 서독으로 넘어 온 뒤, 이곳저곳 광산을 떠돌며 살아왔다고 한다. 지금은 시 당국이 운영하는 합숙소에서 잠을 자고, 각종 사회단체의 무료급식소에서 식사를 해결하며, 낮에는 주로 신문을 판다. 하루 평균 15부가량을 판매해 22마르크 정도의 수입을 올린다. 이 돈은 주로 술이나 담배를 사는 데 쓴다고 한다. 한편 빈자리를 찾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 역 앞의 주차장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커다란 손짓으로 주차할 곳을 안내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이들도 역시 노숙자다. 이들의 친절한 안내에 동전을 건네는 사람들도 간혹 있지만, 이들은 보통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노숙자가 노숙자를 돕는다
베를린의 노숙자들이 달라지고 있다. 커다란 개를 벗삼아 길모퉁이에 자리잡고 동전바구니를 앞에 두고 행인들의 자비에 호소하는 노숙자들도 여전히 많지만, 시민과 관광객 사이에 묻혀 위와 같이 신문을 팔고, 주차를 도우며 조금씩이나마 자신들의 삶을 다시 꾸려가려는 모습들이 늘고 있다. 노숙자들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시각도 점차 따스해져간다. 무엇이 이들을 변화하게 했는가 쉽게 단정할 순 없지만 ‘노숙자 신문’이 그중 하나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1993년 함부르크에서 처음 생겨나 독일 전역에 정기적으로 발행되고 있는 노숙자 신문은 현재 약 40여종에 이르고 있다. 베를린에만도 <모츠>, <슈튜어츠> 그리고 <슈트라센차이퉁> 3종의 신문이 격주로 발행돼, 8만부가량이 판매되고 있다. 노숙자 신문이라고 해서 이들의 이야기로만 꾸며지는 것은 아니다. 노숙자, 장애인, 노인, 극빈 생활자 등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한편 연금, 주택, 세금 정책 등 정치·사회 분야에서도 개성있는 의견들을 모아가고 있다.
3만부를 발행하고 있는 <슈트라센차이퉁>의 경우, 노숙자들이 신문판매뿐만 아니라, 신문기사를 직접 작성하기도 하고, 격주로 열리는 편집회의를 통해 신문의 편집과 제작에 직접 참여하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노숙자가 편집부 정식 직원으로 변신한 경우도 있다. 나아가 신문사와 노숙자 공동으로 ‘노숙자가 움직인다’는 단체를 구성해, 한주에 한번 노숙자를 대상으로 무료급식을 하기도 하고, 위급한 경우를 위해 임시숙소도 제공한다. 또 자신의 거처를 마련한 노숙자에게는 중고가구를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기도 한다.
정부정책에 대한 저항도
노숙자들은 이처럼 기사를 쓰고, 신문을 팔고, 다양한 공공활동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수동적인 수혜자의 입장에서 벗어날 계기를 갖게 된다. 이를 <슈트라센차이퉁>의 편집장 스나이더는 “정신적 저항”이라고 표현한다. 구호물자를 기다리는 행렬에 서 있기보다는 자신이 번 돈으로 한 접시의 따스한 수프를 만드는 것이, 또 시청에서 제공하는 규격화된 공간보다는 중고가구라도 구미에 맞는 물건을 고르는 재미가 이제 그들의 기쁨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욕구를 스스로가 해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 노숙자의 변모는 사회적 격리 일변도인 정부정책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 겨울 한 신문판매자가 얼어죽었고, 이를 애도하기 위해 베를린 동물원 역에는 수백여명의 노숙자와 극빈자들이 모였다. 냉기 가득한 기차역 바닥보다는 술 취한 사람을 역사 밖으로 쫓아내려는 경찰의 행동이 그들을 끝없는 겨울로 내몰고 있었다.
인터뷰/ 슈테판 스나이더 <슈트라센짜이퉁>편집장 구걸에서 판매로
-노숙자 신문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역사와 의미에 대해 얘기해달라.
=노숙자는 항상 존재한다. 2차대전 뒤 가장 많았고, 계속해서 실업률과 연동하면서 그 수의 부침이 있어왔지만 지속적인 사회 문제다. 초기의 문제의식은 노숙자들이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없을까, 라는 것이었다. 7년 전 미국 뉴욕에서 노숙자 신문이 처음으로 발간되었고, 이어서 런던, 파리에서도 노숙자 신문이 생겨났다. 여기에 영향을 받아 94년 겨울 독일 함부르크와 뮌헨에서 노숙자 신문이 탄생했다.
-현재 베를린에 3개의 노숙자 신문이 있다고 알고 있는데 그 차이점은.
=결국 정치적, 사회적 견해차이다. 제작 초기, 신문의 의의에만 동의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점점 노숙자 문제나 사회빈곤을 바라보는 관점, 신문이 담을 정치적 테마에 대한 논쟁 등에서 이견이 생겨났고, 자연스럽게 분화돼나갔다. 다른 도시와 연합하여 신문을 만들려는 노력도 있었으나, 의견차이 때문에 곧 중단되었다.
-신문의 판매구조는 어떻게 되나.
=우선, 이 신문은 판매자를 노숙자로 제한하지 않는다. 누구나, 특히 가난한 자, 돈이 필요한 자는 누구나 신문을 팔 수 있다. 보통 승합차 2대가 매일 베를린의 두개 중앙역으로 나가 신문을 판매자에게 나눠준다. 처음 신문을 팔고자 하는 사람은 무료로 10부를 받아가고, 다음부터는 1부당 50페니히(300원)를 내고 신문을 사간다. 그리고 이것을 시민들에게 2마르크에 판다. 보통 하루에 2∼3시간 동안 신문을 파는데, 1인당 5부에서 많게는 20부까지 팔고 있다. 신문 제작 종사자도 직접 판매자가 되어 거리에 나간다.
-판매상의 어려운 점은.
=처음에 나타난 문제는 노숙자들의 공격성이었다. 술에 취한 경우가 대부분이고, 신문 구매를 거절한 사람에게 욕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정정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일단 신문을 파는 동안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서명을 받았다. 물론 욕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과 함께 말이다.
-신문을 판매한 돈으로 노숙자들이 살아갈 수 있는가.
=어렵지만 가능하다고 본다. 보통 이 돈을 가지고 담배와 의복, 식사를 해결한다. 극빈자의 경우 어떤 형태이든지 잠잘 집이 있다. 노숙자들을 위한 합숙소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의례적인 구호활동과의 차이점은.
=노숙자들의 달라진 말에서부터 달라진 모습이 분명하다. 과거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에서 현재는 “신문을 사시겠습니까”로 바뀌었다. 중요한 것은 이 말 속에 담겨 있는 ‘자의식’과 ‘능동성’이다. 거리에서의 삶이란 상상하는 것보다 혹독하다.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들의 절실한 욕구이자 희망이다. 일하고자 하는 인간은 모두가 일할 수 있어야 한다.
-신문과 단체 활동에서 노숙자들의 참여 기회는 어떻게 되나.
=신문의 경우, 보통 4분의 1에서 3분의 1일의 기사를 노숙자들이 직접 쓰고 있다. 또 매일 아침 공개회의가 열린다. 편집 방향, 판매 개선책, 판매 지역 배분 등을 논의할 뿐만 아니라, 노숙자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도 이들이 참여하는 회의를 통해 결정된다. 회의 주제는 언제나 사전에 공개되고, 보통 25명이 각 회의에 참여한다.
-판매대금으로 신문을 운영할 수 있는가. 정부나 사회단체의 지원은 없는가.
=쉽지 않지만 가능하다. 일단 신문제작진에 대한 급여는 없다. 다만 원고료만이 있을 뿐이다. 직접적인 정부지원은 없지만, 시정부에 실업자로 등록해서 실업수당을 대부분 받고 있다. 간헐적이긴 하지만 사회단체들로부터의 인력지원도 있다. 판매부수의 확대도 기대하고 있다. 현재 베를린에서 8만부가 팔리는데 인구 400만명에 비해 매우 적은 숫자이다. 기사의 질을 올리면 신문의 정기구독자도 점차 늘어날 것으로 생각한다.
|
베를린=강정수 통신원
jskang@web.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