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오리엔트 특급인생 애거사 크리스티

573
등록 : 2005-08-18 00:00 수정 :

크게 작게

[김재희의 여인열전]

▣ 김재희/ <이프> 편집인 franzis@hanmail.net

애거사 크리스티는 대영제국의 팍스 브리태니커가 아직도 위세를 떨치던 1890년, 유복한 가정의 늦둥이 막내딸로 태어나 가정교사의 개별 지도를 받고 음악에도 재능을 보여 파리음악학교에 유학할 만큼 풍족한 유년기를 보냈으나, 남들 앞에 나가 하는 연주를 감당 못할 만큼 수줍음이 심각해 글쓰기쪽으로 재능을 몰아갔다고 한다.


상상력만 쏟아지고 세상 물정 몰라 갑갑했던 그녀, 홀어머니의 목숨 건 반대를 무릅쓴 채 친절하고 인물 좋은 청년과 결혼을 하고,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남편이 프랑스 전선의 전투기 조종사로 복무할 때는 간호사로 지원해 적십자병원에서 일하며 약사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하나를 보면 열을 깨치는 그녀, 약국에 근무하며 온갖 독약의 쓰임새를 알아내고, 독수공방 외로운 밤이면 서방님을 그리는 대신 퍼즐 조각을 맞추며 추리소설의 구조를 연구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뒤 제 일을 찾기보다 아내의 재능을 돈으로 바꾸는 일에 더 열성적인 사위와 반목하던 어머니가 화병으로 세상을 뜨자, 어느덧 탐정소설 작가로 자리를 굳힌 그녀는 슬픔에 몸져눕는다. 정신 차리고 일어나보니 남편은 새 여자가 생겼다며 냉혹하고 뻔뻔한 뒷모습을 보이며 돌아섰다. 이 괘씸한 행각에 분노하다 맛이 간 그녀, 열하루간 실종 상태에서 지명수배된 포스터와 이를 대서특필한 신문에 실린 사진은 금자씨처럼 신비로웠다.

충격 반복에 의한 기억상실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본인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잡아떼니 그녀의 미스터리는 더욱 주목을 받고, 이혼의 아픔을 잊으러 먼 길 떠나 올라탄 ‘오리엔트 특급열차’는 마흔 너머 새로운 삶을 향해 초특급으로 내달렸다. 같은 제목의 소설은 수많은 그녀 작품 중 최고 역작으로 올여름 우리 극장가를 잔뜩 달군 서늘한 영화 <친절한 금자씨>를 비롯해 많은 스릴러물의 원조가 되고, 내처 달려간 메소포타미아 문명 발굴 현장에서 만난 열다섯살 아래 고고학자는 그녀의 새 남편이 되어 이후 빛나는 영감으로 뒤엉킨 갖가지 실타래들을 작품 곳곳에 공급하며 1930년대 불멸의 작품들이 탄생하도록 도와주었다. 1976년 85살의 나이로 죽음을 맞을 때까지 장편 66권과 단편집 20권을 발표한 그녀는 명실공히 추리소설의 여왕으로, 그 누구의 추종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삶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어서, 그녀의 죽음 이후 는, 남편과 그의 정부에게 복수하려던 단순한 계획이 남편의 서투른 대응과 언론의 과장 보도로 왜곡됐던 50년 전 ‘실종된 열하루’의 미스터리한 전말을 밝혀냈다. 두 번째 남편 또한 외도로 파국의 상황을 일으켰지만 과거의 끔찍한 경험 탓에 모든 허물을 덮고 행복하고 평온한 결혼 생활인 양 위장하고 살았던 아픈 이야기까지 까발려지며 그녀의 슬픈 진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우리 삶의 미스터리를 조금 먼저 이해하고 싶다면, ‘모든 스릴러의 스포일러’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들을 독파하는 건 어떨까 싶다.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