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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물랭루주의 태양, 마타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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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2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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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희/ <이프> 편집인 franzis@hanmail.net

강화도 조약과 함께 일제의 한국침략이 본격화된 1876년. 네덜란드의 유복한 가정에서 오남매 중 고명딸로 태어나 행복한 유년기를 보낸 마가레타 젤러는 넘치는 상상력과 지나친 분방함으로 자주 부모님을 놀래키다 열여덟에 스무살 많은 해군장교와 눈이 맞아 후다닥 시집가면서 내 인생은 내가 산다고 선언했건만,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시작된 신혼의 꿈은 망나니 짓만 골라하던 남편의 폭력까지 겹치며 박살이 난다. 그러나 새옹지마. 고향 암스테르담에 돌아왔을 때 현지에서 배워온 배꼽춤 솜씨가 일품이었다.

요즘 취향으로는 두리둥실 삼순이 살집이 뭐 그리 고혹적이었을까 싶지만, 당시 기준엔 그게 명품이었던지 빙글빙글 돌아가는 그녀의 배꼽에 암스테르담은 물론 베를린과 비엔나와 파리 남자들의 눈이 함께 휙휙 돌아간다. ‘낮의 눈’, 즉 태양이란 뜻의 ‘마타 하리’로 다시 태어난 그녀는 자기가 자바에서 온 공주라나, 그렇게 신비하고 관능적인 원주민 여자라는 황당한 소문을 퍼뜨리며 날이 갈수록 으리으리한 전설을 창조해갔다.


어느덧 요염하고 사악한 팜므파탈 혹은 전설적 여간첩의 대명사가 된 마타 하리는 포르노도 텔레비전도 없던 시절, 파리 최고의 술집 물랭루주를 대표하는 누드 무용수로 프랑스 장관과 네덜란드 총리, 프로이센 황태자와 스위스 백작 등 유럽 최고 막강 권력들을 고객으로 확보한 연예계의 태양이었다.

인기 관리하느라 언제 해가 뜨는지 달이 지는지 모를 정도로 스타덤을 누렸으나 박복한 그녀, 어느 은행가의 청혼을 받아들이자마자 파산한 남편 탓에 알거지가 돼 베를린으로 도주하고 재기를 꿈꾸지만 전쟁이 임박한 그곳에서 연애의 쓴맛만 보고 돌아오는데. 이때 프랑스와 연합군 진영 정·관계 고위 인사들을 통해 입수한 정보 “연합군 5만명의 목숨을 잃게 할” 무시무시한 군사기밀을 독일군 장교에게 넘겨줬다는 혐의로 1917년 프랑스 군법회의에 회부된다. 그해 10월15일, 이중간첩 암호명 ‘H21’은 파리 외곽에서 12명의 총잡이가 쏘아대는 탄환에 몸을 비틀며 41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영국 정보부는 H21을 프랑스에 넘기기 전 세 차례나 심문했으나, 1999년 비밀 해제된 영국의 제1차 세계대전 관련 문서에는 마타 하리가 그 어떤 군사 정보도 독일쪽에 넘긴 증거가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녀가 간첩 혐의로 붙들리자 그녀 주변을 맴돌며 염문을 뿌린 숱한 인사들이 재판정에 불려왔지만, 누구 하나 그녀를 위해 변호해주지 않았고 제 한 몸 살아남기에 바빠 꽁무니를 뺐다.

거짓말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았던 그녀가 진짜 스파이였는지, 전쟁의 광기 속 가엾은 희생양이었는지, 한동안 그 수수께끼마저 마타 하리의 이름을 빛내는 전설이었으나 이제 눈길을 끄는 건, 포르노 혹은 연예산업의 원동력이 되는 남성 판타지를 조작하고 그걸 자유자재롤 구사하며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던 마가레타 젤러의 탁월한 연출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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