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에바 페론은 성녀였을까

569
등록 : 2005-07-21 00:00 수정 :

크게 작게

▣ 김재희/ <이프> 편집인 franzis@hanmail.net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후 대통령궁으로 몰려든 군중 앞에서 에바 페론이 한 연설 “아르헨티나여, 이젠 울지 말아요”를 목청껏 노래 부른 마돈나와 그녀가 연기한 에비타는,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자수성가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3·1운동의 함성이 조선반도로 마구 퍼져나가던 그해 5월, 남미에서 가장 확실하게 인디오들을 내몬 아르헨티나의 어느 농장 주인의 여러 사생아 중 하나로 태어난 뒤, 꼬리 아홉 달린 여우 정도의 재주 없이는 도저히 벗어날 길 없는 가난과 불행을 떨쳐내고자 무작정 상경한 열네살 소녀 에바는 삼류배우에서 몇 단계 과정을 거쳐 신데렐라로 둔갑하며 10년 만에 드디어 주인공 역을 맡겨줄 ‘대통령감’ 후안 페론 대령을 만나 작업에 들어간다.


사관학교 출신의 후안이 쿠데타를 공모했던 건 권력의 음험한 탐욕이 아니라 에바처럼 불쌍한 애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지상낙원을 꿈꾸는 기상 탓이고, 로리타 콤플렉스를 자극하며 입속의 혀처럼 구는 꼬마 에바, 즉 에비타를 데리고 논 건 중년 남자의 자연스러운 반응이지 특별한 후안무치 탓은 아니었을 거다. 그러나 인생무상. 쿠데타의 핵심이던 후안에게도 시련이 닥쳐 그를 경계하던 인사들의 손에 의해 철창 신세가 되고 마는데, 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우치는 에바는 이때 자기 안에 숨은 보물을 꺼내 세상에 펼쳐놓는다.

선동적인 그녀의 언변은 후안의 석방운동에 빛을 발하고, 가난한 대초원의 딸이라는 그녀의 밑바닥 삶의 여정은 소외받은 이들의 마음을 크게 움직여 노동자 총파업을 일으킨다. 열흘 뒤 그녀의 애인은 환호를 받으며 풀려나와 에바와 정식으로 결혼하고, 노동자의 복지 향상, 임금 인상의 기치를 건 아르헨티나의 영웅으로 추대된다. 1946년 ‘가난한 이들의 마돈나’ 에바는 드디여 역사상 가장 뛰어난 퍼스트레이디로 등극한다. 대통령이 된 후안은 구체적인 대안 없이 수많은 개혁안을 남발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약자의 편에서 함께 울어주는 예쁜 에바는 여성의 참정권 획득과 여성당 설립, 돈 없어도 병원에 갈 수 있는 의료보험 제정 등 어느 국가보다 앞선 복지사업을 기획하며 성녀를 자처하지만 실제로 사회적 약자들의 삶은 별(!)로 나아진 게 없었다.

1952년 독재자의 영부인다운 이중생활 끝에 30대 초반 암으로 세상을 뜬 에바의 장례식은 한달 동안 국민들이 헌화한 꽃으로 뒤덮인다. 최고 전문가의 손을 거쳐 생전 모습대로 보존된 그녀의 미라는 군부 쿠데타로 후안이 실각하면서 수난당하기 시작한다. 미친 군인이 시간했다는 소문까지 돌던 그녀의 미라는 얼마 뒤 이탈리아에서 발견되고, 스페인에 망명 중이던 후안은 재집권에 성공해 그녀의 미라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화려한 묘지로 이장하는데, 그 영욕의 흔적은 어떤 이에겐 영원한 자비를, 또 어떤 이에겐 인생무상을 확인하는 20세기 가장 파란만장했던 여인의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다.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