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근대 무기의 국산화 필요성을 알았음에도 열강에 휩쓸려 국고를 낭비하던 시대…외국 ‘큰형님’들에게 ‘근대’를 완제품으로 사려 한 고종에게서 얻는 교훈
▣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1970년대 이후 한국에서 일어난 한 가지 역사적인 변화는 자체의 힘으로 무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일제 말기에 주로 일본 재벌에 의해 전투기까지 조립했던 일을 제외하고 근현대사를 통틀어 근대적 무기 생산의 경력이 거의 전무한 한국은, 1973년 이후 자국의 방위산업을 발전시켜 탱크는 물론 무인정찰기·군용헬기 등을 면허 생산하게 됐다. 복지와 교육을 다 뒷전으로 하고 군사 예산에 엄청난 혈세를 부은 결과였다.
동학 농민학살에 쓰여진 무라다총 그러나 1970년대 ‘율곡사업’ 이후 ‘무기 국산화’가 통치자들의 주된 표어가 됐음에도 지난 30여년간 외국 무기 구입에 쓴 돈은 14조6657억원이라는 천문학적 숫자다. 그 중에도 당연히(?) 미제 무기의 비중이 1970년대 84%에서 1990년대 73%까지 떨어지긴 했어도 여전히 압도적이다. 1970년대부터 개발독재가 다른 분야를 희생시키면서 무기 국산화에 주력했음에도 지금까지 시민의 혈세가 미국의 ‘죽음의 장사꾼’인 무기 제조·판매 업자들에게 대량으로 넘어가고 있다. 국내 방위산업이 재래 병기 중심이다 보니 이지스함, 장거리 지대지 미사일, 다목적 헬기, 대형 잠수함 등 첨단 무기를 사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방위산업체들이 만든 ‘단순한’ 무기는 국내 수요가 제한적인데다 수출도 여의치 않아 공장 가동률이 50% 정도고, 1천억원대인 연례 적자는 시민의 혈세로 메우고 있다. 모든 무기를 스스로 만들 수야 없지만 산업 강국인 한국이 첨단 무기 분야에서 대외 의존적으로 된 것은 수출에 의한 단기적 이윤 추구 위주의 개발 전략으로 장기적인 연구 투자가 적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물량 성장에 매달리다 보니 진정한 발전의 기반이 되는 연구 등의 내실을 다지지 못한 것이다. 한국이 산업 대국이 된 오늘에도 외국의 ‘죽음의 장사’를 살찌우고 있는 형편이지만, 산업화를 꿈꾸기도 어려웠던 개화기 때는 열강 무기업자들의 ‘효자 시장’으로 통했고 순서·검증 없는 외국 무기 도입으로 외화보유고가 고갈되곤 했다.
강병(强兵)만이 생존을 보장하는 ‘정글의 세계’에서 근대적 무기 없는 나라는 곧 망하고 만다는 것을 1880년대 초기부터 고종과 그 측근들은 잘 인식했다. 1881년에 일본에 갔다온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이 화약제조 공장과 조선소, 제총(製銃)공장을 보고 조선에서도 근대적 무기를 생산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1882년의 임오군란 이후 시동이 걸린 청나라의 예속화 정책이 1884년의 갑신정변의 실패로 본격화되어 ‘무기 생산 국산화’의 계획들이 제대로 실현될 수 없었다. 1887년부터 서울 삼청동에서 기기창(무기공장)이 중국 기술자와 중국 유학을 한 조선 기술자의 노력으로 탄약과 소량의 휴대용 구식 근대 화기를 만들었음에도 중국 통제하에 있던 당시 조선군의 주된 무기는 중국을 통해 공급받은 영국 엔필드(Enfield) 총이었다. 이외에도 러시아·미국제 여러 총들이 사용됐는데 총탄 공급이 신통치 않아 조선군의 군사력이 농민 반란을 진압하기 어려운 수준이라는 것이 당시 서구·러시아 외교관과 정탐 장교들의 인상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 발발로 한반도가 일본군에 점령돼 조선군에 대한 통제권이 일본군에 넘어갔을 때 새로 창설된 훈련대 등 부대의 주된 무기는 일본이 영국 기계를 도입해 1880년부터 제조하기 시작한 무라다총(村田銃)으로 바뀌었다. 탄약과 총탄 보급로를 일본이 장악하고 있었기에 조선군은 일본 통제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 무라다총이 1894~95년에 일본군과 그 지휘하의 조선군이 저지른 동학농민 학살의 도구였기에 역사상 특별히 기억될 만도 하겠다.
‘양무호’는 대포 건 영국제 고물 화물선
1896년 2월의 아관파천으로 일본 세력이 일시적으로 거세되고 신식 군대 양성 임무를 곧 러시아 군관이 맡아 1896년 5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총탄 693상자를 구입하는 동시에 러시아 생산의 베르단(Berdan) 총도 대량으로 수입한다. 그러나 1898년 초반부터 러시아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강화된 것을 경계하게 된 정부는 무기 공급처를 바꾸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1880년대 후반부터 한국에 무기를 수출해온 중립적 국가 독일의 세창양행(世昌洋行·Meyer & Co)이란 재한 무역업체에 한국군 무장 도입을 의뢰한다. 그래서 1899년 2월에 육혈포(권총) 300자루와 탄환 3만발을 독일에 주문했다. 총가격이 5천원 정도였는데, 이는 당시의 정예 부대였던 서울의 시위대(800명) 총예산의 약 10%에 가까웠다. 그 뒤에도 군도(軍刀)와 탄환 6만발을 구입하는 등 한국에서 이미 광산을 위시한 이권을 챙겼던 독일 상인들을 더욱 행복하게 하는 대형 주문들이 잇따랐다.
군수 물자 공급이 ‘알짜 이권’인 만큼 그때나 지금이나 ‘죽음의 장사’ 사이에는 로비전이 뜨겁지 않을 수 없었다. 1900년에 프랑스로부터 1만 자루의 소총 등을 구입하는 계약이 성립된 직후, 일본쪽은 고종에게 로비를 하여 프랑스와의 계약을 취소하고 1만 자루의 소총 등 대량의 무기를 미쓰이(三井)물산으로부터 구입하도록 한다. 수십만원 상당의 거액 계약인지라 프랑스는 곧장 배상을 요구하겠다고 협박했다. 결국 프랑스쪽을 만족시키느라 거액의 국고가 또다시 낭비돼야 됐다. 무기 공급처를 러시아의 우방인 프랑스에서 일본으로 갑자기 바꾼 배경에는 러시아와 일본의 영향을 적절히 상쇄하려는 고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 있었던 모양인데, 결국 일본 공사관의 로비력과 각종 요직에 있는 친일파들의 맹활약으로 일본쪽으로 더 기울게 됐다. 소총은 물론 일본의 우방인 영국산 대포, 일본 대포환과 탄약, 일본 군복 재료, 1903년에는 아예 양무호(揚武號)란 군함까지 구입했다. 정부 총 외환수입의 30% 가까이를 투입해 미쓰이로부터 구입한 ‘군함 양무호’는 사실 대포를 걸어놓은 영국제 고물 화물선에 불과했다. 군부 관료들에게 뇌물을 먹여 대한제국에 ‘바가지’를 씌운 일제와 친일파 탐관오리들의 ‘합심협력’의 결과로 산 한국 군대의 대포, 군함 등은 고물에 가깝거나 성능다운 성능을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 그때 한국군이 일본군을 향해 총 한발 쏘지 않은 것은 자신의 위치를 보존하려는 고종의 보신주의적 전략이기도 했지만 무기 공급 사정상으로도 제대로 저항하기 힘들었다. 19세기 말 중국이 마우저(Mauser) 총을 면허 생산하고 일제가 한 발짝 앞서 1884년에 자체의 힘으로 야전포를 개발하고 1889년에는 무라다 연발소총이라는 첨단 휴대용 화기를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러시아·프랑스 기술자와 일본 제총(製銃) 기계를 보유한 1900년대 초기에 서울의 기기창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외제 무기의 수리에만 머물러 ‘대한제국 국산 소총’을 끝내 만들지 못했을까? 일제의 방해와 무기 수입으로 커미션을 챙기는 비리 관료들의 사리사욕도 문제였겠지만, 무기 개발에의 장기적 투자를 피하고 필요한 무기를 그때그때 완제품으로 사려 했던 고종 정권의 행정편의주의와 안일주의, 장기적 투자 전략의 결여는 예속을 계속 강화시켰다.
왜 국산 소총을 만들지 못했나
가난한 나라에서 귀하기 짝이 없는 세관의 외화 세수를 외국의 ‘큰형님’들에게 거의 통째로 주고 ‘근대’를 완제품으로 사려 한 것이 고종의 ‘근대화 복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고종이 즐긴 전등이나 자동차·커피와는 달리 ‘근대’라는 것은 국가를 자기 재산으로 아는 절대군주가 외국 후견인들에게 살 수 있는 게 아니란 것이다. 기초 기술 능력, 자체적 기술교육 체제, 자체 생산 능력 등 기초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이 제대로 된 ‘근대’로의 첩경이었지만, 주변 요건이 좋지 않은데다 고종에게는 장기적 비전과 투자 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오늘 우리의 상황을 보자. 지금 한국 통치자들에게는 첨단 무기 생산의 국산화를 위해 핵심 연구인력·시설 육성 등에 장기적, 계획적으로 투자해 대미 의존적인 현 상태를 벗어날 의지가 과연 있을까? 역사가 주는 교훈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참고 문헌:
1. 김재승, <한국근대 해군 창설사>, 혜안, 2000
2. 김정기, ‘1880년대 기기국, 기기창의 설치’, <한국학보>, 제10집, 1978
3. 현광호, <대한제국의 대외정책>, 신서원, 2002
4. 서인한, <대한제국의 군사제도>, 혜안, 2000
동학 농민학살에 쓰여진 무라다총 그러나 1970년대 ‘율곡사업’ 이후 ‘무기 국산화’가 통치자들의 주된 표어가 됐음에도 지난 30여년간 외국 무기 구입에 쓴 돈은 14조6657억원이라는 천문학적 숫자다. 그 중에도 당연히(?) 미제 무기의 비중이 1970년대 84%에서 1990년대 73%까지 떨어지긴 했어도 여전히 압도적이다. 1970년대부터 개발독재가 다른 분야를 희생시키면서 무기 국산화에 주력했음에도 지금까지 시민의 혈세가 미국의 ‘죽음의 장사꾼’인 무기 제조·판매 업자들에게 대량으로 넘어가고 있다. 국내 방위산업이 재래 병기 중심이다 보니 이지스함, 장거리 지대지 미사일, 다목적 헬기, 대형 잠수함 등 첨단 무기를 사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방위산업체들이 만든 ‘단순한’ 무기는 국내 수요가 제한적인데다 수출도 여의치 않아 공장 가동률이 50% 정도고, 1천억원대인 연례 적자는 시민의 혈세로 메우고 있다. 모든 무기를 스스로 만들 수야 없지만 산업 강국인 한국이 첨단 무기 분야에서 대외 의존적으로 된 것은 수출에 의한 단기적 이윤 추구 위주의 개발 전략으로 장기적인 연구 투자가 적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물량 성장에 매달리다 보니 진정한 발전의 기반이 되는 연구 등의 내실을 다지지 못한 것이다. 한국이 산업 대국이 된 오늘에도 외국의 ‘죽음의 장사’를 살찌우고 있는 형편이지만, 산업화를 꿈꾸기도 어려웠던 개화기 때는 열강 무기업자들의 ‘효자 시장’으로 통했고 순서·검증 없는 외국 무기 도입으로 외화보유고가 고갈되곤 했다.

1896년 2월의 아관파천으로 일본 세력이 일시적으로 거세되고 신식 군대 양성 임무를 곧 러시아 군관이 맡게 된다. 이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총탄 693상자를 구입하고 러시아산 베르단 총도 대량으로 수입한다. (사진/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대한제국의 병사와 순검의 군복. 프랑스식 복장이지만 재료는 일본제였을 가능성이 많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