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디트리히, 이 나쁜 년!”

564
등록 : 2005-06-16 00:00 수정 :

크게 작게

[김재희의 여인열전]

▣ 김재희/ <이프> 편집인 franzis@hanmail.net

“배신자! 조국을 버린 나쁜 년!”


드디어 누군가가 나타나 그녀의 무덤을 다시 훼손하기 시작했다. 일주일째 잠복근무하다 줌렌즈로 범인을 포착한 30대 여성은 동트기 직전 발길을 옮기는 노파를 쫓아가 붙들었다. 두려움에 떨던 노파는 자신과 동갑인 이 ‘공공의 적’에게 저주를 퍼붓다 신세타령으로 이어지며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그 천박하고 뻔뻔한 계집, 우리가 그때 어떻게 살았는데! 전쟁터에 나간 남편은 불구로 돌아와 알코올중독자가 되고 연합군은 우리 집터를 몽땅 부숴버렸는데, 그년은 연합군 편에 붙어 온갖 호사를 누리면서 우리 병사들 기운을 다 뺏어가고. 그러던 년이 죽어서까지 이런 대접을 받게 놔둘 순 없어! 내 인생이 너무 억울해!”

그랬다. “병영 입구 가로등 아래 하나가 된 그림자… 그녀는 여전히 그를 기다리지만 유령이 된 그는 그녀를 찾아 떠돌고, 릴리 마를렌 그녀는 커다란 입술처럼 그를 땅 밑으로 집어삼키고….” 병사들의 기운을 뺏어버려 전의를 상실케 했던 ‘릴리 마를렌’. 이 불후의 반전가요는 원래 1915년 20대 초반의 한스 라입이 러시아 전선으로 떠나며 썼던 시로, 1937년 발표한 시집에 실었던 것을 당시 최고의 작곡가 노베르트 슐체가 곡을 붙여 만든 것이다. 병사들의 영원한 연인이 된 마를렌은 한스 라입의 여자친구 이름이었다.

나치의 선전부장 괴벨스는 이 구슬픈 가락을 유고슬라비아와 북아프리카 전선에 크게 틀어 연합군 병사들이 향수병에 걸리도록 유도했으나, 연합군쪽에선 더 감미롭고 나른한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목소리로 녹음해 더 성능이 좋은 스피커로 독일군 병영에 울려퍼지게 했다. 나른하고 허스키한 목소리의 주인공, 마릴린 먼로가 등장하기 전까지 할리우드 최고의 섹스 심벌이었던 그녀는 미국의 군자금 확보를 위한 부자 잔치를 열고, 큰 액수의 수표를 자기 가슴에 직접 넣게 하는 쇼를 벌이기도 했다.

분노한 노파의 말처럼 조국에 침을 뱉고 연합군에 붙어 독일에는 발걸음조차 하지 않던 그녀는 긴 속눈썹과 반쯤 감은 눈, 세련되고 오만한 자태를 연출하고 숱한 스타들과 염문을 뿌리며 독일 국민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백발과 주름진 얼굴을 가리고 파리로 거처를 옮긴 디트리히 할머니는 10여년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지내다 1992년 숨을 거두지만, 베를린시는 “난 베를린에서 태어난 베를린 여자, 베를린은 영원히 내 고향이며 난 그걸 감사한다”고 그녀가 자서전에 고백한 어귀를 강조하며 유족에게 간곡히 청해 파리에 있던 그녀의 묘를 베를린 영화박물관에서 가까운 곳으로 이장했다. 또 그녀에 대한 흠숭과 화해의 표시로 그녀의 이름을 딴 광장을 조성한 뒤, 2002년에는 명예시민까지 추서했다. 많은 시민이 그동안의 원망과 분노를 잊고 그녀의 묘에 헌화할 때, 동갑내기 보통 할머니가 느낀 소외감 또한 전쟁으로 인한 기막힌 아픔의 찌꺼기였을 것이다.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