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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살비의 거룩한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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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0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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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희의 여인열전]

▣ 김재희/ <이프> 편집인 franzis@hanmail.net

1983년 후세인과 럼즈펠드가 맛있는 저녁을 나눠먹으며 ‘공동의 적’ 이란을 찜 쪄먹을 궁리를 하던 시점, 여의도 국회의사당은 세계의원총회를 열어 광주학살 따위에 대해서는 입 다물기로 한 전세계 국회의원들을 불러 관광도 시키고 궁궐 파티도 열어주며 희희낙락 놀게 해줬다. 낮이면 점잖게 분쟁 해결을 위한 회의도 열었지만, 이란과 이라크 중 ‘어느 나라 이름을 먼저 부르느냐’의 의제가 해결이 안 나 아무런 진전을 볼 수 없었다.

이 무렵 “총소리와 대포소리에 이력이 난” 바그다드 아가씨 자이나브 살비는 지긋지긋한 전쟁터가 된 고국을 떠나 ‘평화로운’ 미국으로 건너갔고, 결혼을 앞둔 신부로 고향에 들렀을 때 마침 쿠웨이트 침공이 시작됐다. 엠바고가 풀릴 때까지 숨죽이며 지내는 동안 코소보 사태가 시작되고 난민과 강간당하는 여성에 대한 뉴스를 접한 그녀는 전쟁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


신혼여행으로 살비는 남편과 함께 크로아티아로 날아가 난민캠프를 방문하는데,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100만명 이상의 난민 대부분이 여성과 어린이였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수집하던 중 남편과 아이 둘의 행방을 찾아 헤매던 아이샤라는 여성을 만나는데, 그녀는 수용소에서 9개월 내내 강간에 시달리다 임신 8개월의 몸으로 풀려난 상태였다. “뭐라 할 말이 없었어요. 함께 울 수조차 없었죠.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그녀의 얘기를 그냥 들어주는 일밖에요.”

미국에 돌아와 ‘여성을 위한 여성들’(www.womenforwomen.org)이라는 단체를 결성한 그녀는 통역사로 일하던 직장을 아예 그만두고 세계를 떠도는 활동가로 변신한다. 이 순간에도 지구촌 어딘가에서 끔찍한 일을 겪으며 통곡하는 여성들을 위해 북미 여성들로부터 매달 한통의 편지와 25달러를 기부받아 진행되는 이 단체의 네트워크는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를 시작으로 르완다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방글라데시, 나이지리아 그리고 남미의 컬럼비아 자매들에게까지 따뜻한 손길을 내민다.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여성의 몸을 전쟁터로 만드는 행각들, 그리고 끔찍한 현실을 타개한 기쁜 소식들도 그녀들의 그물 안에 포착됐다.

“방글라데시에서 늙은 남자한테 시집 안 가겠다고 버티는 딸의 얼굴에 염산을 뿌린 일이 있어요. ‘여성을 위한 여성들’은 그녀의 뭉개진 얼굴을 성형수술시키고, 뭉개진 영혼을 달래는 일을 맡아 했지요.”

이렇게 힘을 얻은 방글라데시의 여성은 보스니아 캠프에서 살고 있는 전쟁고아들의 한끼 밥을 위해 작은 정성을 보태고 그애들은 또 누군가에게 다른 도움을 베푸는 식으로, 지구촌 모든 여성이 ‘정상적 일상’을 되찾을 때까지 자매들이 끝없는 연대를 이어간다는 게 살비의 전략이다. 이들의 정겹고 거룩한 경제학의 상대는 놀랍게도 자본제국주의와 세계화라는 이 시대의 가장 고약하고 막강한 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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