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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딱한 여자, 베티 프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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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5-1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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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희의 여인열전]

▣ 김재희/ <이프> 편집인 franzis@hanmail.net

한국 주부들이 애들 밥 안 굶기고 학교 보내는 일에 허리가 휘던 1960년대, 미국 주부들은 침실을 치우고 시장을 보고 애들 과외활동을 따라다니고 집에 돌아온 남편 곁에 누워 끝없이 떠오르는 이런 물음과 싸워야 했다. “이게 정말 행복일까?”

내 선배 하나는 나이 마흔이 넘어 대학 동급생으로부터 따뜻하고도 애절한 러브레터를 받았다. 편지 쓴 이가 누구였는지 10년이 흐른 지금도 알 길이 없지만 중년이 된 자신을 20대의 ‘남성’ 하나가 ‘여성’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황홀한 충격을 계기로, 더 아름답게 자신을 돌보고 더 적극적으로 세상에 뛰어드는 쪽으로 “인생을 바꿨다” 한다.

베티 프리단에게도 이렇게 ‘인생을 바꾸는 충격’이 있었으니, 그건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이었다. 잘나가는 남편과 세 아이를 뒷바라지하는 행복한 주부였던 그녀는 이 책을 읽고서 침대로 기어들어가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고, 파출부에게 살림을 맡긴 뒤 도서관을 찾아다니며 세상이 어떤 술수로 여성을 신비화해 길들였는지를 추적해, 마흔 무렵 <여성의 신비>라는 책을 펴냈다.


행복한 현모양처라는 중산층 여성의 지배적 문화영상을 여성의 경험으로 해부하고 비판한 이 책은 앨빈 토플러의 표현대로 “역사에 방아쇠를 당겨” 수많은 중산층 주부에게 ‘인생을 바꾸는 충격’이 되었고, 그녀는 1960년대 미국 여성운동의 대모로 추앙받았다. 프리단이 ‘이름 없는 병’이라 부른 증세를 달래기 위한 여성들의 정체성 찾기는 교육의 확대와 취업을 위한 법률 및 제도 개선으로 이어지고, 여성의 사회진출 확대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70년대 급진적인 혹은 세대차가 나는 후배들과 갈등을 겪던 그녀는 80년대에 접어들면서 만사가 귀찮아 혹은 인생의 새로운 의미를 찾아 손주나 돌보는 할머니로 “나, 돌아갈래!”라는 선언을 해 많은 이들을 놀래키더니, 90년대에는 고독하고 처량한 ‘나이 듦’의 문제에 천착하며 <노년의 샘>이란 책을 펴냈다. 80을 훌쩍 넘긴 그녀의 요즘 활동을 보면, 죽음과 삶을 이분하는 유대-그리스도교의 전통이 정말 몹쓸 것이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녀가 안내하는 ‘행복한 노년 삶’에는 검버섯과 주름 없애는 약을 비롯한 각종 비법을 담고 있고 나이 드는 것과 죽음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낸다.

1921년 같은 해 태어났지만 스물 초반에 나치에 의해 살해당한 독일의 조피 숄이 순수한 열정을 지닌 영원한 청춘으로 기억되는 데 견줘, 자유주의 미국에서 최고 교육을 받은 유복한 주부에서 미국의 역사를 흔드는 투사로 변신했던 그녀가 세월이 갈수록 딱해 보이는 것은 수명만 자꾸 늘리는 현대의학의 맹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나이가 연륜이 되고 지혜가 되기 위해, 우리의 인생을 바꿀 사건은 한 10년에 한번씩은 벌어졌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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