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독립신문> <제국신문> 등은 과연 민족지였나…고종의 하사금에 길들여져 정권 미화에 급급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몇년 전까지 뜨거웠던 ‘안티조선 운동’은 한 가지 공을 세웠다. 거대 보수 일간지들이 아무리 ‘민족지’ ‘민의 대변 기관’이라는 자화자찬을 늘어놓아도 사실은 그들이 노엄 촘스키가 말하는 ‘필요한 환상’, 즉 지배 체제 유지·강화에 필요한 허위의식을 확대재생산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된 것이다. 독재정권과 유착이 깊었던 그들의 과거나 중도우파 정권의 ‘우향우’를 부추기는 그들의 현재가 우리 눈앞에서 그 모습대로 표현될 수 있었다.
‘선각자 언론인’이 밀고에 벼슬 청탁? 이 자각에서 한 가지 미비점이 있다면 부르주아 언론들이 일제에 직·간접적으로 봉사했던 일을 알게 됐는데도 개화기 언론 기업들에 대한 어용 민족주의적 낭만화를 아직도 신뢰하고 있다는 것이다. 장지연(張志淵·1864~1920), 남궁억(南宮檍·1863~1939), 이종일(李鍾一·1858~1925) 등은 우리에게 고종의 정부나 일제와 매우 복잡한 관계에 있었던 관료 출신의 언론경영인이라기보다는 여전히 교과서들이 가르친 대로 ‘민족 선각자’로 각인돼 있다. 그래서 최근 한글로 번역된 정교(鄭喬·1856~1925)의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에 독립협회 총무였던 남궁억에 대해 “협회가 탄압을 받았던 시절에 민씨 척족, 보부상 무리와 내통하여” 협회 일들을 정부쪽에 밀고했다(권4)라고 회고한 것이나, 1909년에 남궁억이 “일진회의 한석진(韓錫振)에게 아부하여 그 천거를 받아 관제이정소(한국의 관제를 일본식으로 고치는 통감부 시대의 부서) 위원의 벼슬에 올랐다”(권9)고 쓰여 있는 걸 보고 놀란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선각자’가 밀고에다 친일파에게 벼슬 청탁까지 했다니! 비록 정교의 자료에서 정확하지 못한 구석이 많아 남궁억에 대한 정보도 틀렸을 가능성이 있지만 나중에 일진회의 주역이 된 한석진이 남궁억이 초대 사장(1898~1902)으로 있던 <황성신문>에서 1898년에 편집을 맡아 남궁억의 독립협회 시절 친우로서 남궁억과 개인적으로 친했던 것이나 칠곡·성주·양양에서 지방관을 지낸 남궁억이 벼슬살이를 마다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무욕의 지사’로 상상하는 그는 사실 각처에 인맥이 두터운데다 영어에 능통해 ‘몸값’이 높아진 ‘성공적인’ 개화파 관료였다. 그뿐일까? 구한말 문명개화론적 신문들은 ‘개화’의 주체를 자처한 정부쪽과 공·사적 관계망을 갖고 많은 부문에서 정권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
근본적인 문제부터 고찰해보자. 오늘날 거대 보수 일간지들을 특정 족벌·재벌들이 소유하고 있다면 과연 개화기 신문들은 누구의 것이었는가? 초기 신문인 <한성순보>(1883~84)나 <한성주보>(1886~88) 등은 단순히 관보였지만, 1890년대 후반부터 사정이 복잡해진다. 우리는 <독립신문>(1896~99)을 ‘민간지’로 알고 있지만, 유식층에게 개화의 명분을 설득하기 위한 신문 발간 계획을 친일 갑오내각이 먼저 세웠고 그 목적으로 중추원 고문 자격으로 조선에 온 미국 시민권자 서재필에게 자금 4400원이 지급됐다. 아관파천으로 정권이 교체됐는데 러시아 침투 야욕에 대한 대응의 문제로 정부 내 친미·친러파의 갈등이 노골화된 1897년 말까지는 <독립신문>의 논조는 특히 외교적 문제에서 고종과 정부의 의도를 치밀하게 반영했다. 정부 보조금을 받은 창간 초기의 <독립신문>이 ‘민간 경영의 사실상 정부 기관지’로 발간됐음에도, 서재필이 판권을 개인 소유물로 다루어 한국을 떠날 즈음 일본공사관쪽에 매도하려다 러시아의 반발을 의식한 일본쪽의 태도로 성공하지 못하고 말았다.
신문이 ‘민간 외교’의 도구
<독립신문>의 순한글 발행 원칙을 계승하고 값까지 저렴하고 특히 여성 사이에 인기가 좋았던 <제국신문>(1898~1910)은 처음에 지방관 출신의 재력가 김익승(金益昇)이 출자해 만들어졌다가 그 뒤 매관매직으로 큰돈을 번 고종의 측근인 재력가 심상익(沈相翊)에게 넘어갔다는 의미에서 관료자본가들의 기관지로서 ‘민간지’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 신문이 1903년 경영난에 빠지자 고종이 2천원과 사옥을 하사해 구해준 일을 생각해보면 역시 ‘순수 민간지’를 이야기하기란 쉽지 않다. 통감부 시절에 고종의 지원이 어렵게 되자 <제국신문>은 1907년 10월 이토 히로부미와의 관계가 돈독한 친일 개화파 정운복(鄭雲復)에게 인수되어 급속히 친일화됐다. 개인 소유의 <제국신문>과는 달리 개신 유림들의 언론기관이었던 <황성신문>(1898~1910)은 주식회사였는데 그 주주 중에는 도일 유학생 출신으로 고종의 측근이 되어 정부의 동정을 일본쪽에 밀고한 현영운(玄暎運)이나, 이후 1920년 <조선일보> 창간 당시에 발행인이 된 친일 사업가 예종석(芮宗錫) 등 각양각색의 재력가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재력만으로 경영이 순조롭지 않기에 고종이 역시 사옥과 경영비용 4천원을 하사했다. 고종의 돈에 의존한 경영뿐만 아니었다. <제국신문> <황성신문>이 내부(내무부)를 통해 지방 관청에 의무적으로 구독됐고, 개인 독자들의 체납구독료의 완납도 내부(내무부)를 통해 독촉되었다. 일본군이 한국 영토를 점령한 상황에서 국내외에 조정의 입장을 알리려는 고종의 발의로 궁정의 영어·일어 번역관인 양기탁(梁起鐸·1871~1938)이 치외법권을 누렸던 영국인 베델을 내세워 만든 유명한 <대한매일신보>(The Korea Daily News·1904~10)는 외형상 ‘외국인 발행 신문’이었지만 실제로는 고종으로부터 정기적 비밀보조금을 받아 운영됐다. 정부와 관료자본·친일매판자본 주동의 ‘민간지’들 사이의 관계는 ‘관독상판’(官督商辦), 즉 관쪽의 지도 밑에서 상인들이 경영하는 형태이다 보니 신문사들은 민간인들에게 ‘별도의 관청’으로 인식됐다. 오늘날 적잖은 재벌·족벌 신문 기자들이 촌지를 받지만 이미 100년 전에도 신문사에 보내진 편지 봉투 속에는 ‘잘 봐달라’는 의미의 돈이 들어 있었다.
고종의 정권은 왜 하사금 등 온갖 ‘당근’을 포괄적으로 사용해 ‘민간지’들을 준관보화시켰을까? 또 개화기 언론계 ‘선각’들이 그 하사금을 자랑스러워했을 뿐 신문의 독립성이 훼손된다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고종 정부는 신문을 길들임으로써 몇 가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예컨대 일본 제일은행권의 한국 통용 같은 국가 경제에 큰 타격을 입힐 일제의 횡포에 신문을 통해 ‘민간인’의 입을 빌려 여론을 동원하는 등 약소국 정부가 직접 나서 할 수 없는 일들을 신문을 통해 간접적으로 할 수 있었다. 신문이 ‘민간 외교’의 도구였기에 그 대외적 입장은 정부에 의해 좌우됐다. 1905년의 을사조약 이전까지는 <제국신문> 논설을 감옥에서 썼던 이승만이나 <황성신문>의 사장 장지연 등은 개인적으로는 러시아를 경계하고 미국·영국을 이상시해 영국의 동맹국이자 ‘같은 황인종’인 일본에 기대려 했지만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는 고종의 전략에 따라 중립 외교를 말해야 했다. 신문을 통한 외세의 견제가 어디까지나 국익 차원의 일일 수 있었지만 ‘사회의 스승’임을 자임한 계몽주의 신문들로서 정부와 ‘보조 맞추기’는 적지 않은 문제점을 내포했다. 예컨대 신문들이 하급관료들의 공금 전용·가렴주구를 폭로해도 매관매직을 본업으로 삼았던 고종과 그 측근의 비행들에 대해선 일언반구조차 하기 어려웠다.
‘민족지’가 아니라 ‘계급지’다
그들은 애국의 근본을 ‘충군’(忠君)이라 주장하게 됐으며 민권·자유권을 군주 통치권·‘질서’의 하위개념으로 설명해야 했다. 그들이 미국의 ‘부강’이나 미국식 ‘애국심’을 찬양해도 미국식 공화제의 한국에서의 실행에 대한 언급이 불가능했다. ‘민간지’를 소유·주도했던 전직 관료들이나 관료자본가·매판자본가 등이 국가와의 이와 같은 관계를 순순히 받아들였던 것은 상당수가 개인적으로 궁정과 인맥이 닿는데다 당시 유산층 대다수가 내우외환에 대한 대응으로 고종 정권의 강화를 우선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근대 언어 만들기, 근대적 지식과 교육의 보급, 노비 등 천민의 신분적 해방 등에 개화기 신문들이 큰 공로를 세운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민족지’로 무비판적으로 찬양하면 안 된다. <조선일보>를 위시한 오늘날 극우·보수 일간지의 경우에도, 개화기 정권·자본의 합작 사업이었던 ‘민간지’의 경우에도 보도·지식보급 등의 순기능이 계급 지배의 기정사실화·정당화·미화라는 지상과제에 종속돼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100년 전의 ‘민간지’들이 ‘민족지’라기보다는 정권의 손아귀에 놓인 ‘계급지’였다는 사실이 이해돼야 수탈·기만의 자본주의 체제를 뒷받침해주는 ‘민족’과 ‘국민’의 주술이 하루빨리 풀릴 수 있을 것이다.
* 참고 문헌:
1. 최기영, <대한제국시기 신문연구>, 일조각, 1991.
2. 김민환, <개화기 민족지의 사회사상>, 나남, 1988.
3. 강만생, ‘황성신문의 현실개혁구상 연구’, <학림> 제9집, 1987, 63~127쪽.
4. 정진석, <인물 한국 언론사>, 나남, 1995.
5. 정교 지음, 조광 등 옮김, <대한계년사>, 권1~10, 소명, 2004.
‘선각자 언론인’이 밀고에 벼슬 청탁? 이 자각에서 한 가지 미비점이 있다면 부르주아 언론들이 일제에 직·간접적으로 봉사했던 일을 알게 됐는데도 개화기 언론 기업들에 대한 어용 민족주의적 낭만화를 아직도 신뢰하고 있다는 것이다. 장지연(張志淵·1864~1920), 남궁억(南宮檍·1863~1939), 이종일(李鍾一·1858~1925) 등은 우리에게 고종의 정부나 일제와 매우 복잡한 관계에 있었던 관료 출신의 언론경영인이라기보다는 여전히 교과서들이 가르친 대로 ‘민족 선각자’로 각인돼 있다. 그래서 최근 한글로 번역된 정교(鄭喬·1856~1925)의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에 독립협회 총무였던 남궁억에 대해 “협회가 탄압을 받았던 시절에 민씨 척족, 보부상 무리와 내통하여” 협회 일들을 정부쪽에 밀고했다(권4)라고 회고한 것이나, 1909년에 남궁억이 “일진회의 한석진(韓錫振)에게 아부하여 그 천거를 받아 관제이정소(한국의 관제를 일본식으로 고치는 통감부 시대의 부서) 위원의 벼슬에 올랐다”(권9)고 쓰여 있는 걸 보고 놀란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개화기 언론인들은 일제와 복잡한 관계에 있었지만 여전히 '민족 선각자'로 각인돼 있다. 왼쪽부터 남궁억, 이승만, 장지연 (사진/ 연합)

충남 태안군에 있는 <제국신문> 사장 이종일의 동상. <제국신문>은 고종에 대한 '충군'을 가장 충실히 선양한 것으로 평가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