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세계혁명을 갈망한 이상주의적 공산주의자 ‘간첩 조르게’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병영 국가 체제의 대한민국사에서 ‘간첩’보다 무서운 단어는 없었다. 적화통일을 준비한다는 보이지 않는 고정간첩, 기밀 빼내기와 요인 살해, 시설 파괴에 착수한다는 남파간첩…. 우리 속의 적대적 타자인 그들은 극우 정권 유지의 주된 근거인 북한의 ‘악마성’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어야 했다. 그들의 ‘악마성’이 절대적이었으니 ‘간첩’ 딱지가 붙은 장기수들을 수십년간 인간 아닌 존재로 취급하고 전향을 강요하는 고문 등에 대해 별다른 사회적 문제의식도 없었다. 인간의 힘으로는 참아내기 어려운 전향 공작의 시련을 참아낸 비전향 장기수들은 무서운 세뇌를 당한 간첩, 또는 소수에 의해서는 ‘인생을 통일에 바친 지사’로 인식됐다. 그러다 북한 현실에 대한 실망이 확산되자 이제는 그들이 가진 비운의 원인을 잘못된 체제에 대한 ‘헛된 봉사’로 보기도 한다.
조르게 할아버지는 마르크스와 친구
북괴의 전위대와 통일의 영웅, 지사와 망상에 사로잡힌 인간…. 그들을 보는 시각은 극과 극을 달린다. 그러나 위의 관점들이 서로 정반대라 해도 그 공통점은 복잡하기 짝이 없는 존재에 대한 흑백논리에 따른 단순화다. 이 이분법은 현실의 복합성을 죽여버린다. 예컨대 우리는 왜 모든 남한 주민들을 체제와 동일시하지는 않음에도 북한 정보기관의 정보 제공자들은 전적으로 북한 체제의 대표로 봐야 하는가? 그들이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을 공개적으로 제시할 수 없다고 해서 그러한 비판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는가? 특히 남한이나 해외에서 장기 체류하는 경우 북한 정권 선전의 허황함을 쉽게 알게 되는데, 그럼에도 그들이 계속 첩보활동을 하는 배경에는 복잡한 사회·정치 의식이 깔려 있을 수 있다. 예컨대 북한 사회주의가 간판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해도 북한보다는 미국이 평화를 더 위협한다고 의식하는 경우도 있다. 북한 정권도 과연 ‘해외파’를 무조건 신뢰할까. 천편일률적으로 보이는 ‘현실사회주의’ 체제에서는 간첩이 정권의 분신이라기보다는 서로 복잡한 거래를 할 수도 있다. 흑백 도식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이 현실을 일제 말기에 일본을 뒤흔든 ‘조르게 사건’(ゾルゲ事件)의 주인공인 소련 간첩 리하르트 조르게(Richard Sorge·1895~1944)의 경우가 잘 보여준다.
제2차 대전에서 연합군 승리에 엄청난 기여를 한 ‘세계 역사상 가장 성공적’ 간첩인 리하르트 조르게는 과연 누구인가? 프리드리히 조르게(1828~1906)는 마르크스·엥겔스의 동지이자 1852년 도미해 미국에서 사회주의의 뿌리를 내린 인물로 ‘간첩 조르게’의 조부였다. 그러나 미국서 나서 돈벌이만 좋아하는 ‘100% 미국인’으로 자란 리하르트의 부친은 비스마르크와 독일 군대를 애호했고 그래서 아버지가 사업을 했던 러시아령 아제르바이잔에서 태어난 리하르트는 ‘독일 애국자’로 성장했다. 그런 망상을 산산이 파괴한 것은 그가 지원병으로 참전한 제1차 대전이었다. 가축이 도살당하듯 하루에 수만명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전쟁을 혐오하는 사회주의 노동자 출신의 전우들과 교유하고 나서 그는 ‘조국’이 야수 군국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러시아에서 1917년 혁명이 일어나고 패전국 독일에서 공화국이 성립된 뒤 정치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리하르트는 독일 공산당에 입당했다. ‘빨갱이’로 당국에 찍혀 교사직 등에서 쫓겨난 그는 소련에 이주해 1925년에 소련 국적을 취득했다. 소련을 국민국가가 아닌 사회주의적 세계 혁명의 발원지로 인식하고 있던 당시 공산주의자 입장에서는 소련 국적의 취득이 ‘조국을 등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먼저 코민테른에서 근무하게 된 학구적인 독일 공산주의자가 1929년부터 소련군 첩보부로 직장을 옮긴 것도 ‘특수한 종류의 세계 혁명 사업’이었다. 그는 한 독일 신문의 특파원 신분으로 1930~33년에 상하이에서 일본의 중국 침략 관련 정보를 수집하던 중 <아사히> 특파원으로 중국에 체류하면서 일제의 만행에 가슴 아파하고 있던 일본의 친중파 마르크시스트 오자키 호주미(尾崎秀美·1901~44)를 만나게 된다. 이는 ‘조르게 간첩단 사건’의 발단이었다.
스탈린과의 관계는 ‘동상이몽’
1933년 독일 국적 소유자 행세를 하여 역시 독일 신문 특파원 신분으로 도쿄에 온 조르게의 주된 임무는 소련의 주적인 독일의 우방인 일제의 소련 침략 계획 관련 정보를 빼내는 것이었다. 주일 독일 대사를 비롯한 독일의 요인들과 가까이 지냈던 조르게 자신도 기밀들을 빼냈지만,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磨·1891~1945) 총리의 중국 문제 ‘브레인’으로서 중국 침략의 본격화를 말리려 했던 오자키는 그에게 주된 정보원이었다. 조르게는 히틀러의 소련 침공(1941년 6월22일)을 며칠 앞두고 침공 일자와 병력 등을 모스크바에 정확하게 보고했으며, 무엇보다 1941년 7월2일 어전회의에서 독일과 공동의 소련 협공 계획이 취소되어 일본이 ‘남진’, 즉 미·영 등을 상대로 하는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는 당시 일제의 최고 국가기밀을 빼내 보고했다. 이를 알게 된 소련은 소-일 국경을 지키던 수십개 사단을 서부 전선에 투입했고 히틀러군의 모스크바 공격을 막는 등 대독 전쟁의 전세를 크게 호전시킬 수 있게 됐다. 소련 본부로부터 공작비도 제대로 받은 적이 없는 독일·일본의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을 위기에서 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면 스탈린은 은인 조르게·오자키 등을 어떻게 대접했을까? 한 일본 고위급 공산당원의 배신으로 조르게·오자키 등 30여명의 ‘간첩단’ 관련자는 1941년 10월에 검거되고 말았다. 그 뒤 조르게·오자키 등 핵심 인물들이 처형당한 1944년 11월까지의 3년 동안 소련 당국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거물 간첩들을 넘겨줄 수 있다”는 일본쪽의 여러 번의 언급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조르게 등을 위해서 조치를 취하기는커녕 조르게의 러시아 부인을 시베리아로 귀양을 보내 거기에서 1943년에 병과 굶주림 등으로 죽게 놔두었다.
일제 패망 이후 ‘조르게 사건’ 관련 문서의 일부가 미군에 의해 연구·공개되어 세계적 센세이션을 일으켰음에도 잠자코 있다가 1964년이 돼서야 소련은 드디어 조르게와 그 동지들을 ‘영웅’으로 인정했다. 어떻게 자국의 국운을 건진 사람들에 대한 ‘배은망덕’이 가능했을까? 답은 이렇다. 조르게는 국민국가로서의 소련에 애국심을 느꼈다기보다는 파시즘의 패망과 궁극적인 세계 혁명을 갈망한 이상주의적 공산주의자였으며, 그를 처음에 코민테른·군 첩보부에 취직시킨 후견인들 역시 1937~39년에 숙청당한 국제주의자들이었다.
조르게는 1939년에 모스크바로부터 “잠시 귀국하라”는 밀명을 받았지만, ‘귀국’이 곧 고문·총살을 의미하는 줄을 알고 각종 핑계들로 도쿄에 계속 남았다. 스탈린의 득세 이전 시기의 ‘잔류자’로서의 조르게는 스탈린에게서 적지 않은 불신을 당했다. 그래서 히틀러의 소련 침공에 대한 그의 첩보를 스탈린이 무시해 엄청난 손실을 보기도 했다. 조르게는 스탈린 정권에 정보를 계속 제공했지만 그와 스탈린의 관계는 ‘동상이몽’형이었다. 그러면 스탈린의 독재·숙청을 비판적으로 봤던 그가 과연 무엇 때문에 모스크바와 계속 협력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혹시 그는 소련이 언젠가 기형적인 독재를 벗어나 사회주의 국가다운 모습으로 변모할 것을 기대했을까. 아니면 소련을 파시스트 독일이나 일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긍정적 세력’으로 의식했기 때문일까.
단순한 ‘체제의 분신’이 아니었다
조르게·오자키는 결코 스탈린주의 체제의 ‘분신’이 아니었으며 소련의 체제도 그들을 ‘충신’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스크바와 협력의 길을 자율적으로 선택한 비판적 이상주의자들이었다. 그러면 우리의 경우를 보자. 북한 정권에 정보를 제공한 사람들의 경우는 단순하지도 모두 같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면 경우에 따라 이와 같은 복합성이 인정될 수도 있지 않는가? 남북한의 비극적인 대결은 그동안 이분법적 논리만을 강요해왔지만 이제는 이 흑백논리를 극복해 여러 동기·의식·상황들이 복잡하게 얽힌 ‘회색 지대’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고 재조명하는 시도를 시작함으로써 우리의 미래는 개인과 자율적 개성이 사회의 중심이 되는 화해와 통일 시대로 갈 수 있을 것이다.
* 참고 문헌
1. Robert Whymant, , St.Martins Press, 1998.
2. Chalmers Johnson, ,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0.
3. Gordon W. Prange, , McGraw-Hill, 1984.
4. Richard Storry, William Deakin, , Vintage, 1975.
조르게 할아버지는 마르크스와 친구

일제의 최고 국가기밀을 빼내 소련 정부에 보고했던 간첩 조르게. 소련은 1964년이 돼서야 조르게와 그 동지들을 '영웅' 으로 인정했다.

2003년 일본의 유명한 영화감독인 시노다 마사히노가 <스파이 조르게>라는 영화를 제작하면서 때아닌 '조르게 열풍' 이 일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