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딱 꼬집어 규정할 수 없는 ‘독립파’지식인… 구한말 최초로 ‘괴물 제국주의’를 번역저술로 비판하다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집단 위주의 사고 때문인지 아니면 단체이름·연도 암기 위주의 역사 교육 때문인지 근대사 속의 개인은 우리 기억 속에 반드시 특정 사상이나 기관·단체 등과 연관돼 있다. 서재필이 독립협회의 발기인이었기에 독립협회에 대해 교과서들이 지면을 아끼지 않았고 자신을 미국인으로 규정했던 ‘필립 제이슨’은 한국인의 머릿속에서 한국 근대사의 주인공으로 박혀 있다. 위정척사의 최익현, 친미 정객이자 대통령 이승만, 민족주의자 아나키스트 신채호, 심지어 공산주의자 박헌영도 같은 기억의 법칙에 의해 ‘근대의 주역’으로 인식돼 있다.
한학은 물론 세익스피어에도 능해
문제는 잘 알려진 집단이나 이데올로기에 속하지 않았던 ‘회색분자’나, 남과 잘 어울리지 않았던 개인들은 아무리 많은 기여를 했어도 ‘간판’이 없는 탓으로 집단 기억의 울타리를 벗어나고야 만다는 것이다. 유명한 리더들보다 역사의 회색지대에 묻힌 괴짜들에게 고마워해야 할 이유들이 있음에도, 그들의 이름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예컨대 대한제국도 실력을 양성해 언젠가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고자 하는 것이 ‘개화’의 상식이었던 구한말에, 최초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죄악을 낱낱이 열거한 선구자가 누구냐고 요즘의 진보적 활동가들에게 물어보면 정확하게 답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한국에서의 제국주의 비판적 분석의 창시자였던 괴짜 문인 변영만(卞榮晩·1889~1954)은 그렇게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의 동생인 변영태(卞榮泰·1892~1969)를 영문학자이자 국무총리로, 변영로(卞榮魯·1897~1961)를 시인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은 꽤 있을 텐데, 변영만에게는 마땅한 타이틀이 없었다. 1906년 법관양성소와 1908년 보성전문학교의 법률과를 졸업한 뒤 재판소 서기와 판사로 활동한 적이 있는 그에게 ‘법조인’ ‘법률가’의 간판을 붙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더군다나 그가 1900년대에 여러 학술지에 낸 법학 논문 중에서 지금도 시의적절하게 느껴지는 ‘사형폐지설’(1909)도 있다. 그러나 1909년에 대한제국이 사법권을 일본에 빼앗기자 판사직을 아낌없이 팽개친 변영만을 ‘법률가’로 부르기에는 법조계에 몸담은 기간이 너무 짧았다. 또 1909년부터 그는 변호사 개업을 했지만 3년 뒤에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해 6년간 중국으로 외유를 떠났다.
그가 1900년대 최고의 유림 밑에서 갈고닦은 한문 문장력은 특출했고, ‘법률가’로 일할 맛이 나지 않았던 일제 시절에는 묘지명 등의 난삽한 한문 문장을 지어주는 일로 연명하기도 하고 영남의 거유(巨儒)들과 교제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를 한문학자라고 보아야 할까? 그러나 당대 정통 유림들의 후각으로 그의 문장에서는 ‘서양 냄새’가 났고 그 자신도 셰익스피어·괴테 글의 ‘신묘한 견지’에 반했다고 자인했다. ‘청빈(淸貧)의 복음’에 대한 글(<동아일보>, 1936)에서 마르크스와 아인슈타인을 청렴의 위인의 사례로 삼을 정도라면 당대 ‘한학자’의 모습과는 다른 것이었다.
또 그를 ‘개화파’ ‘계몽주의자’로 부르기에는 당대의 대다수 근대주의자들과 달리 한문 문장·시조 등에 대한 그의 애착과 조예가 너무나 깊었다. 문화·언어의 차원에서 한문·한글·영문에 다 같이 정통했던 그에게 뚜렷한 딱지를 붙일 수 없듯이, 그의 정치 성향을 규정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신채호와 가까이 사귀고 1912~18년 중국 외유 때 저명한 망명 독립운동가들과 같이 활동하고 일제하에서 당국과 협력한 적이 없는 그는 확실한 ‘독립파’였다.
19살에 <세계의 3괴물>등 2권 역술
그렇다고 “남을 압도하고 권세와 이권으로 세상에 횡행하는 유럽인”, 이기심과 물질적 욕심에 바탕을 둔 서구 문명에 깊은 의문을 가져 간디의 ‘탈근대주의’에 가까웠던 그는 단순히 유럽식 근대국가 수립을 지향하던 다수 민족주의자들과는 다른 성향을 보였다. “노예처럼 구직하지 말고 차라리 환희심에 찬 길거리의 자유로운 인간이 되라!”(<동아일보>, 1931)는 식의 그의 기고문을 읽으면 친구 신채호와 같은 아나키스트가 아니었다 싶기도 한데 단순히 그를 ‘무정부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패거리들과 닫힌 ‘주의’들을 혐오한 그에게 맞지 않을 것 같다.
문화·언어·정치의 영역에서 그가 일정한 규정의 그물에 잡히지 않는 것처럼 그의 신분도 묘하기 짝이 없다. 부친이 구한말 지방관으로 재직한 몰락한 양반 가문의 후예로 신분 역시 ‘회색지대’에 속했던 그는 성격도 친구 단재를 닮아 남에게 맞추는 법이 없고, 특히 ‘높으신 분’들에게 면박 주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이념이나 단체 이름 위주로 짜인 근대의 ‘국사’에 이러한 ‘회색의 괴짜’ 이름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과연 놀라운 일일까?
그러면 변영만이라는 이름과 연결된 이렇다 할 ‘큰’ 사건도 단체도 없는데 왜 우리가 그 이름을 기억해야 할까? 근대적 사유와 전통적 표현법이 조화를 이룬 그의 독특한 한문문학이나 역설의 미가 돋보이는 그의 한글 논설과 시조들도 망각되지 말아야 하겠지만, 그가 남긴 무엇보다 귀중한 유산은 겨우 19살에 그가 역술한 <20세기의 대참극(大慘劇) 제국주의>와 <세계의 3괴물>(1908) 두 책자다. 겉으로 보기에는 얇은 소책자인데다 변영만 본인의 저작도 아닌 확인되지 않은 구미의 어느 반제국주의 활동가 저서의 번안이지만 10대 후반의 한 청년은 당대 지식계에 엄청난 화두를 던진 것이었다. ‘자유·평등’, 산업발전과 강력한 군사력의 유럽 근대국가가 대한제국도 실력을 키워 달성해야 할 보편적이며 진보적인 사회 형태라는 것과 유럽 국가들의 상호 경쟁이나 전쟁, 비서구에 대한 침탈·식민화가 ‘약육강식, 우승열패’의 ‘우주적 법칙’에 의거한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 계몽기의 상식이었는데, 이 그릇된 당대의 상식에 청년 변영만이 최초로 정면 도전한 것이다.
“영국·미국이 자유의 본향이라고? 천만의 말씀! 그들의 ‘자유’는 다수의 빈민을 제외한 국내 유산층의 권리들의 다른 이름일 뿐이고,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이 ‘자유’는 식민지의 노예화와 그 자원의 고갈, 그 주민의 끝이 안 보이는 불행을 의미할 뿐이다. 허울 좋은 ‘자유’의 미명 아래서 금권정치와 군국주의, 제국주의라는 서구의 세 마리 괴물은 나머지 세계를 사냥터나 폐허로 만드는 것이다. ‘자유’를 들먹이는 패권국가 영국은 자유무역이라는 이름의 약탈을 약소국들에게 강요하면서 그들의 자생 산업을 파괴하지만, 자국과 식민지들의 무역에 대해 보호관세의 벽을 세워 남의 경쟁을 철저히 막는다. 침략과 식민화가 우주의 법칙이라고? 이것이 생물계의 법칙을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인간계에 무리하게 적용한 약탈자들의 궤변일 뿐이며, 제국주의의 실질적 동기는 초과이윤을 추구하는 유럽 대자본들의 야만적인 탐욕과 군국주의적 엘리트들의 팽창욕이다. 민주적인 유럽이 진보하고 있다고? 금권정치와 제국주의는 민주주의를 죽이고 있으며 민권을 축소시키는 것이다.”
좌파사상의 기초토양을 준비하다
제국주의가 유럽·미국의 민주주의를 형해화한다는 변영만의 이야기를 읽으면 요즘의 미국의 모습이 떠오르는 등 한 세기 넘은 이 책들이 지금도 시의적절하게 읽힐 수 있는데, 물론 1900년대 말 변영만의 제국주의 분석에도 한계점은 있었다. 예컨대 그가 제국주의에 대한 대비책으로서 일국 차원의 약소국 민족주의의 발흥을 강조하는데, 서구인들의 세계적 약탈에 종지부를 찍으려면 여러 비서구 반제 운동들이 민족을 초월해 연합해야 한다는 생각을 그가 간디 사상을 접한 일제시대에 와서야 갖기 시작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한계가 있음에도 서구를 찬미했던 개화 시대의 집단적 몽상에 과감하게 정면 도전한 변영만이 이루어낸 것들도 적지 않다. 신채호를 비롯한 당대 독립운동가들이 그의 저서를 통해 제국주의의 성격에 대한 체계적 의식을 처음으로 갖게 됐을 것이고, 그들의 그러한 독서 경험이 있었기에 1920년대에 아나키즘·공산주의 등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변영만 자신이야 조직적 운동에 몸을 담는 기질이 아니었지만,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그의 용감하고 훌륭한 작업은 좌파 사상의 한국적 수용을 위한 기초적 토양을 준비하게 된 것이었다.
한학은 물론 세익스피어에도 능해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