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보는 세계/ <심연의 침몰>
새 밀레니엄의 언저리에서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한 종합적 연구서가 흥미롭게도 러시아 고대사 연구로 권위있는 한 역사가에 의해 빛을 보게 되었다. 저자는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 역사학부 학장 I. Y. 프로야노프 교수. 그는 지난해에 이미 이 저작의 전편격인 <1917년 10월>이라는 저서를 통해 “러시아에 아직 사회주의 테제가 완전히 그 가치를 소멸한 것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려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만약 출판사의 재정이 허락했더라면 지난해에 이미 세상의 빛을 봐야 했을 이 책에는 일반 학문서에서는 보기 드문, 마치 한편의 영화 제목을 연상케 하는 <심연의 침몰>이라는 은유적 제목이 붙어 있다. 이 책은 이미 출간 이전부터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대개 러시아의 학문서적들이 500∼1천부 선에서 출판되고 판매량 또한 그리 많지 않은 현실에서 3천부라는 부수가 출간되었고, 시판이 시작된 올 가을 이후 12월 현재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러시아 주요도시의 굵직한 대형서점에서조차 한두권밖에 재고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프로야노프 교수의 이론적 입장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원천은 거슬러올라가면 적어도 1980년대 초반 안드로포프의 등장과 함께 찾아져야만 한다는 것이 그 첫 번째 입론이다. 정치 분야의 개방과 소비에트 경제의 기본적 개혁 등 주요 이념들이 KGB 출신인 안드로포프가 평소 집적한 정보분석 결과로 유형화되었고, 이들 이념을 이상화하고자 인사개혁을 하는 과정에서 적절한 담당자로 지목된 이가 바로 고르바초프였다는 것이다. 둘째, 페레스트로이카를 유발케 한 대외적 요건 또한 오래 전부터 체계적으로 성숙돼왔음을 지적하고 있다. 프로야노프의 자료분석 결과 80년대 미국의 레이건, 부시 양 행정부하에서 집요하게 동구 및 소련제국을 붕괴시킬 음모가 고안돼왔고 폴란드를 전진기지로 삼아 동구권에는 물론 소련지역에 은밀히 이반세력들에 대한 회유 공작을 펼쳐왔다는 것이다.
마지막의 중요한 입론은 그간 페레스트로이카의 실패, 옐친 집권과 동시에 러시아 현대사의 새로운 국면이 형성되었다는 통설에 반기를 건 프로야노프의 “페레스트로이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명제로 압축된다. 프로야노프 교수는 옐친의 집권시기를 다름아닌 페레스트로이카의 연장기라고 규정하고, 러시아는 “자신을 처절히 붕괴할 때까지 무너뜨리고 나서 강대해졌던” 그간 러시아 역사가 보여준 교훈대로 앞으로도 더욱더 페레스트로이카 과정을 가속화함으로써 그 과정이 종식되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두발로 설 것이라 절규하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박현봉 통신원parkhb_spb@yaho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