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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폭탄 테러리스트, 슈트로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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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2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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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희의 여인열전]

▣ 김재희/ <이프> 기획위원 franzis@hanmail.net

<테러리스트가 되라>는 제목의 책이 있었다. 그 장삿속에 실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한때 임꺽정보다 더 멋진 진짜 여성 테러리스트 조직에 매료된 적이 있었다. 이름하여 ‘로테 조라’(Rote Zora)! 1970년대 연속극 주인공으로 의적 조로(Zoro)를 기억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후다닥 악당을 물리치고 검은 망토 휘날리며 사라지는, 어린이들을 사랑했던 조로 아저씨! 그의 여성형 명사에 붉다는 말을 더한 로테 조라는 우리 식으로 하면 ‘빨간 조로 아줌마’가 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들의 나쁜 짓을 세상에 알려달라는 험악한 편지를 써서 언론사마다 돌렸지만 그에 반응하고 편지 내용을 실어준 건, 독일의 <한겨레> 격인 <타츠>(taz)라는 신문이 유일했다. 독일 전역에 걸쳐 도시 한가운데에 위치한 ‘아들러’란 기업 대리점들에 폭탄을 던지겠단 얘기였다. 폭탄을 던지는 이유는, 남한에 진출한 여성복 공장(전북 익산 소재)에서 엄청난 이윤을 챙기면서도 여성노동자들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간부들을 응징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자매인 제3세계 여성노동자의 피와 땀과 눈물로 얼룩진 옷을 싸게 사 입는 일”은 옳지 않다며, 편지 말미마다 ‘로테 조라’라는 애칭을 쓰던 그들이, 1988년 8월15일 드디어 사고를 쳤다.


다음날 <타츠>에는 폭탄 투하로 유리창이 박살난 아들러 매장(12곳)이 위치한 도시마다 폭탄 표시가 그려진 큰 독일지도와 함께 아들러가 무릎 꿇고 사죄할 때까지 정의의 불꽃은 계속 타오를 거라는 비장한 내용의 편지가 소개되었다. 다른 언론에서는 ‘원인 모를 폭발’이 전국적으로 있었다는 두 줄 정도의 기사가 전부였다. 몇년째 미궁에 빠졌던 이 사건이 잊혀질 무렵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이는 사고가 또 터졌다. 망명객들의 입국 절차 과정에서 이들을 도로 싣고 가 본국에 내려놓고 온 항공사 루프트한자 본사에 유사한 폭탄이 터진 것이다. 사제폭탄에 연결된 탁상시계의 일련번호가 드러났고, 그걸 구매한 여성의 신분을 추적한 끝에 범인으로 지목된 ‘언니’는 로테 조라의 단원인 잉그리드 슈트로블이었다.

비엔나대학에서 ‘나치 기간 유럽에서 저항운동을 펼친 여성들’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딴 그의 다른 저작들을 아마존에서 구할 수 있었다. 지루한 재판 과정에서 가끔 <타츠>에 실리는 공판 기록도 꾸준히 수집하면서 나는 그에 대한 상당한 정보를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몇년 뒤, 비엔나에서 우연히 슈트로블을 아는 작가를 만나 그의 연락처를 얻을 수 있었다. 10여년을 추적했던 그에게 전화했을 때, 하필 그는 두달짜리 신혼여행을 떠나고 없었다. 나의 귀국 일정을 그의 도착일 뒤로 미루어 드디어 그를 쾰른 대성당 옆 오래된 카페에서 만났을 때, 그는 50대에 접어든 행복한 신부였다. 아직 공소시효가 끝나지 않은 로테 조라의 행적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해줄 얘기가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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