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조선 최초의 근대인이 됐던 노비 출신의 재 러시아 항일운동가… 그의 정체성이 참으로 복잡하다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아쉬운 일이지만 1980년대에 각광받았던 독립운동사라는 영역이 요즘은 대중적 인기를 잃어 관변의 지원에 의존하는 처지가 됐다. 독립운동가 중에는 우리가 오늘날에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는 평등과 반제국주의적 피압박 대중 연대 등의 가치를 중시했던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들에 대해 왜 무관심하게 되었을까?
‘민족’의 코드 뒤에 숨겨진 인물들 독립운동을 탄압했던 친일 예속 엘리트들에 의해 건설되다시피 한 남한에서 적지 않은 진보적 독립운동가들이 극복 대상으로 삼았던 자본주의가 많은 이들에게 내면화된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주류 사학이 여태까지 독립운동사를 연구·대중화해온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 과거 인물의 내면 세계와 일상, 희망들에 대한 충분한 검토도 없이 단체 이름들과 ‘의거’들의 사실만 나열한 것도 결점이었지만, 일제에 대한 모든 항거들이 무조건 ‘민족투쟁’으로만 얼버무려지고 ‘민족’의 일률적인 코드 뒤에 숨겨진 복합적이고 중첩적인 정체성들이 무시되는 것도 독립운동의 현재적 이해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독립’ ‘민족’이라는 거창한 단어 뒤에 가려져 있는 과거 인물들의 복잡하고 모순적인, 살아 있는 그대로의 진면목이 제대로 드러난다면 그들이 고상한 호국영령이 아닌, 근대라는 소용돌이에서의 우리의 선배이자 동반자로 친근하게 다가올 것이다. 독립운동의 역사에 ‘호국인물 선양’의 구시대적 형식을 강요하지 않는다면 독립운동가의 생활과 고민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시사점을 던지는지 최재형(崔才亨 또는 崔在亨·1860(일설에는 1863)~1920)이라는 한 근대 선각자의 인생을 사례로 살펴보자.
망각됐다고 하는 것은,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흉년을 피해 두만강을 건너간 뒤 러시아쪽의 지신허·얀치혜 등의 마을에서 평생 살게 된 최재형이 고국에 전혀 알려지지 못했다는 게 아니다. 1906~08년에 과감한 국내 진공 공작을 벌여 함경도 일대의 일본군을 괴롭혔던 연해주 의병의 조직책이자 재정적 후원자, 그리고 상해임시정부가 1919년에 재정총장으로 추대한 인물인 최재형에게 1962년에 건국훈장도 추서되고 사학자들의 주목도 받았다. 그러나 최재형의 이름이 민족운동사의 정전(正典)에 새겨졌다고 해도 친러 개화파인 그는 친미 개화파 서재필이나 친일 개화파 유길준만큼 개화기의 상징적 인물로 되지 못했다. 공산국가가 돼버린 러시아에 대한 군부정권의 적대감이나 최재형 관련의 러시아 자료 접근의 불가능성 등도 이유가 됐겠지만 ‘촌놈’임을 자랑으로 여겼던 노비 출신의 최재형이 양반 출신인 서재필·유길준만 한 글발이 없었다는 것이 중대한 이유였을 것이다.
‘먹물’이 아니었던, 그리고 자만심에 찬 양반 먹물들을 싫어해 한때 의병운동을 함께 벌였던 이범윤(李範允·1856~1940)이라는 구한 관료 출신과 끝내 사이가 틀어지고 만 최재형이 고국의 역사의 지형에서 맨 가장자리에 위치했지만 러시아에서의 사정은 사뭇 달랐다. 최재형의 아들 파벨(Pavel·한국이름은 최성학)은 사할린의 이름난 공산당 항일 빨치산이 됐고 그 뒤 고려인(재러동포) 출신의 최초 해군장교로 활동하다가 1938년에 숙청으로 무고하게 총살당했는데, 그와 절친한 친구였던 소련의 작가협회 회장 파데예프(Alexandr Fadeev·1901~56)가 회고록에서 그와 ‘항일운동의 영웅적 존재’였던 그 부친에 대해 극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소년선원으로 오대양을 누비다
최재형이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일본 간섭군에게 체포되어 고문·처형을 당했던 1920년 당시 두살이었던 현 모스크바국립대 한국학센터 소장인 미하일 박 교수는 “표트르 세메노비츠 최(Pyotr Semenovich·최재형의 귀화이름)가 우리들에게는 자랑스럽고 믿고 따르고 싶은 전설적인 어른이었다”고 회고할 만큼 대다수 ‘함경도 상놈’ 출신의 재러동포에게 최재형은 명실상부한 지도자였다. 그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고려인들에게 하나의 강력한 통합요소로 작용한다. 고국보다 귀화해 살게 된 외국에서 훨씬 더 많은 발자취를 남긴 최재형은 과연 어떤 정체성을 갖고 살았을까?
양반이나 중인 출신의 친일·친미 개화파들은 ‘문명 개화’의 중심지에 학생으로 건너가 텍스트를 통해 새로운 ‘진리’를 체화하는 것이 당시의 ‘정식 코스’였지만, 노비 자식인데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출신인 최재형은 ‘몸으로 때우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러시아에서 러시아 학교에 다니게 된 최초의 교포 아동이었던 10대 초반의 최재형은 1871년에 가출해 러시아 상선에 소년선원으로 고용되어 약 6년 동안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지를 누비고 제정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항해했다. 그를 양아들쯤으로 여겼던 선장과 그 부인에게서 러시아어 등의 유럽 언어와 음악, 기계 다루는 법 등을 배우고, 당시 조선의 어떤 지식인도 모르던 오대양의 오지를 체험했던 그는 개화기 최초의 근대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싱가포르나 케이프타운 등의 외국 항구에서 주막집 주인들과 영어로 대화했던 1870년대 초반에 서재필이나 유길준은 아직 제자백가를 배우면서 북학류의 청나라와의 무역 진흥론을 세상에서 가장 급진적인 가르침으로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먹물’을 숭배하는 나라에서 한자 하나 제대로 쓰지 못했을 변방의 노비 자식에게 ‘개화 선구자’와 같은 거창한 타이틀을 줄 리 있었을까?
그는 1877년에 선원 생활을 접고 약 3년 동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역업에 종사한 뒤 1882년에 연해주 도로 공사에서 통역으로 발탁되기도 하고, 러시아 군대에 식량을 납부하는 조달업자로서 큰 재산을 모으고 러시아 관헌의 신망을 얻어 한인 자치 기관장인 도헌(都憲·volostnoi starshina의 번역어)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교포 사업가이자 정치인인 최재형에게 근대란 과연 무엇을 의미했을까? 조선인 노동자와 러시아 관헌 사이의 매개체인 통역으로 오랫동안 종사하고 그 뒤 줄곧 자치 기관장의 길을 걸었던 그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동포에 대한 러시아 권력자의 횡포를 막고 가렴주구를 피해 건너간 ‘촌놈’들로 하여금 생명·재산의 안전을 누리게 하는 법치를 실현하려 노력했다.
그가 살았던 마을을 방문했던 영국 탐험가 비숍(I. Bishop·1831~1904) 여사가 조선 국내와 아주 다른 얀치혜·지신허 등 교포 마을들의 ‘안전성과 법적 질서의 분위기’에 찬사를 보냈는데, 그 분위기를 주도한 것은 바로 최재형을 비롯한 양반의 횡포에 원한이 사무친 ‘천민 근대인’들이었다. 가정에서는 최재형이 부인을 ‘동지처럼’ 대해주고 권속들에게 거칠게 명령하는 일이 없는 등 평등의 풍토를 조성했다. 그는 어디까지나 장사꾼이었지만 고아원·학교·빈민 한인의 구출에 크게 기부하는 등 ‘공공선’에의 애착이 강했다. 독립협회나 1900년대의 학회들을 주도한 양반 출신들에게 대중은 계몽과 지도의 대상물에 불과했지만, 천민 최재형은 휘하의 의병이나 그의 재력에 기댔던 이웃들을 ‘동무’, 즉 원칙상 평등한 동업자로 여겼다. 여유 있을 때 가족과 함께 당시 조선에서는 거의 아무도 몰랐던 바이런이나 실러, 푸슈킨 등을 읽는 것은 경원군 노비 자식의 주된 취미였다.
고려인의 독특한 정체성을 만든 선구자
그러면서도 러시아 황제의 대관식에 ‘모범적 자치 기관장’으로 초대를 받아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확인하는 한편 사재를 털어 상투를 자르고 양복을 입은 자기 의병 부하들을 거느리고 목숨을 걸고 국내 진공 공작을 벌였던 최재형의 정체성은 과연 어느 쪽에 속했던가? 그는 러시아의 여러 근대 담론들을 체화해 개화기의 근대문물 수용에 기여하면서 조선인 항일 운동가로서 러시아 역사에서도 큰 발자취를 남기는 등 복합적이며 중첩적인 정체성을 가짐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창출했다. 존댓말이란 언어적 계급 질서가 원래 없었던 함경도쪽 평민들의 강인함과 평등 지향을 러시아 농민들의 자치 풍토 등의 생활의 특징들과 융합한 고려인의 독특한 중간적 정체성을 만드는 데서 최재형은 빼어난 선구자였다.
그는 러시아에서도 조선에서도 주변인이었지만, 변혁이 주변으로부터 온다는 것이 역사의 법칙이 아닌가? 최재형 자신은 정치적으로 정직한 보수파였지만, 그의 장학금으로 서부 러시아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오하묵(吳夏?·1895~1936), 한명서(韓明瑞·1885~?), 최고려(崔高麗) 등 나중에 굴지의 공산주의 운동가로 자란 인물들도 있었다. 수천년간의 계급적 질곡으로부터 조선을 해방시키려 했던 그들이, 자기 손으로 ‘근대의 꿈’을 실현해보려다 일본군의 손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노비 자식의 돈으로 공부하게 된 것은 과연 우연뿐이었을까?
‘민족’의 코드 뒤에 숨겨진 인물들 독립운동을 탄압했던 친일 예속 엘리트들에 의해 건설되다시피 한 남한에서 적지 않은 진보적 독립운동가들이 극복 대상으로 삼았던 자본주의가 많은 이들에게 내면화된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주류 사학이 여태까지 독립운동사를 연구·대중화해온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 과거 인물의 내면 세계와 일상, 희망들에 대한 충분한 검토도 없이 단체 이름들과 ‘의거’들의 사실만 나열한 것도 결점이었지만, 일제에 대한 모든 항거들이 무조건 ‘민족투쟁’으로만 얼버무려지고 ‘민족’의 일률적인 코드 뒤에 숨겨진 복합적이고 중첩적인 정체성들이 무시되는 것도 독립운동의 현재적 이해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러시아어로 된 <최재형약사>에서 찾은 희귀사진들. 왼쪽사진 왼쪽부터 최재형, 조카 레브 최, 그리고 형 알렉세이 최(1915년 촬영).

오른쪽 사진은 후처 엘레나 페트로브나 김 (1880~1952)과 4명의 아이들이 함께 찍은 것이다. 남자아이는 나중에 고려인 출신의 최초의 소련 해군 장교가 됐다가 스탈린의 숙청에 희생된 파벨 최이다(1912년 촬영).

최재형이 말년에 거주했던 니콜스크우수리스크의 자택. 1920년 4월5일 일본군에 체포되기 직전까지 이곳에 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