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독립협회 회장까지 지냈던 안경수, 한국 관료자본의 원조인 그는 과연 ‘민족 자본가’였나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필자가 국사 교과서나 보수 언론들을 접할 때 놀라게 되는 어법은 ‘민족 자본’과 같은 용어들이다. 외국인 자본과 구분하는 의미에서 ‘한국인의 자본’이라면 몰라도 그 자본의 주인이 혈통이나 국적상 한국인이라고 해서 그것이 ‘민족’의 것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나 대자본이 국가의 보호를 받거나 국가를 이용하고 필요에 따라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경우도 있지만, 대자본이 ‘민족’ 구성원 다수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경우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
‘민족’이란 경쟁의 도구일 뿐 예컨대 이라크 침략에서 미국 군수자본들과 ‘복구사업’의 예산을 끼리끼리 독차지한 정상배들이 미국이란 국가를 이용하여 국가적 살육으로 횡재했다 해도, 이 자본이 미국의 ‘민족 자본’이라 볼 수 있는가? 만약 ‘민족적’이었다면 실업률을 높이면서 지난 4년 동안 약 250만명의 제조업 노동자를 해고하여 생산시설을 중국 등의 저임금 지대로 이전했겠는가? 또 미국 산업의 백미라 할 만한 첨단기술·소프트웨어 개발 센터들을 프로그래머들의 임금이 낮은 인도로 계속 이전했겠는가? 늘 이윤을 추구하면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자본에 ‘민족’은 경쟁의 도구가 될 수는 있어도 목적이 될 리는 없다.
공룡형 상업적 보수 언론들이 ‘민족지’임을 자임하여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탄압할 때마다 “파업에 발목 잡힌 국민 경제”를 들먹이는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종속이 강한 준주변부인 만큼 ‘민족’을 넘어 세계 자본 중심부를 향해 충성을 바치는 경향이 심할 수밖에 없다. 1960~80년대에 개발 독재가 제공하는 특혜 금융과 저임금 노동력 착취의 혜택을 누렸던 독점자본은 관료들의 지휘·감독을 받아야 했지만, 삼성전자·국민은행 등 대표적 기업의 절반을 훨씬 넘는 지분을 소유하는 중심부 자본과 하나의 복합체를 이룬 오늘의 한국 재벌들은 오히려 국가를 비정규직 양산의 도구 등으로 이용하는 측면이 더 클지 모른다.
서민들은 삼성이나 LG 등을 아직도 ‘한국 기업’으로 생각하고, 보수언론들은 이들 기업체를 ‘나라를 이끄는 집단’으로 치켜세워 착각을 부추기지만, 실제로 외국 대주주의 입장에서나 외국인 배당금 극대화에 안간힘을 쓰는 매판형 임원의 입장에서도 한국은 하나의 시장이나 인력의 원천, 국제적 로비전에 쓸 만한 행정·외교력의 공급원일 뿐 필사적으로 매달려야 할 운명은 아니다. 일부 대기업에서 올해부터 사내 문서의 영문 작성을 의무화하는 움직임도, 자녀들을 어릴 때부터 외국에 보내 영미권의 ‘신사·숙녀’로 키우려는 부유층의 풍속도도 신자유주의 시대에 준주변부의 대기업에 원산지 국가는 이용 대상물 중 하나일 뿐 더 이상 개인적·문화적 소속감을 가지는 조국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단기적 이윤 착취에 혈안이 되어 있는 외국 계통의 투기자본보다야 그 모든 결함에도 차라리 ‘국적 자본’이 통제가 더 수월하고 민중에 덜 해롭지만, ‘국적 자본’이 외국 투기꾼들을 점차 닮아간다는 것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현실이다.
국가를 이용해도 이윤 추구의 과정에서 국가나 ‘민족’의 경계선들을 쉽게 넘나드는 것은 기업의 보편적 속성이지만, 이 특징은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가시적으로 나타난다. 일제 시대 한국인 자본의 예속성은 뻔한 것이었으며 식민지의 정치적 관계상 불가피했다고 항변할는지도 모르지만, 개항을 당해 세계 자본지도의 가장자리에 들어가게 된 조선의 개화기 때부터 대기업인의 대외 예속성- 특히 대일 예속성- 은 이미 하나의 특징이었다. 자본가 자신들이 이를 부끄럽게 여기기보다는, 오히려 같은 황인종의 일본이 러시아를 비롯한 ‘백인 침략자’들을 퇴치하기 위해서 ‘후진’의 조선을 ‘계도·지원’해야 한다는 담론을 일본에서 수입하여 전개하는 등 사업상의 예속성을 ‘세계사의 대세인 인종 전쟁’의 일부분으로 호도하려 했다.
안경수에 대한 기록이 없는 이유
그들의 자금·기술·상품 거래가 ‘민족’의 테두리를 벗어났듯, 그들의 ‘동양주의적’ 상상력도 원대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민 만들기’ 작업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들이 희망했던 ‘국민’은 그들을 보호할 대한제국의 국가 권력에 충성·복종할 신민이었지 시민은 아니었다. 100년 전 근대적 자본 맹아기의 재벌의 대표자라면 독립협회의 회장(1896년~98년)으로서 한국사 참고서에도 들어가는 안경수(安?壽·1853~1900)였다.
흥미롭게도 안경수가 한때 이끌었던 독립협회가 제도권 사학에서 ‘민족주의 운동의 시초’로 거의 신격화됐고 1894~95년의 갑오개혁부터 1898년의 고종 폐위 음모까지 그가 관여했던 사건들이 개화기 역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도 그에 대한 연구로서 논문 몇편이 있을 뿐 평전 하나 없을 정도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제도권 사학이 만들어낸 독립협회의 ‘자유·민족적’ 이미지에 안경수의 외연·출세 경위가 너무나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도권 사학이 ‘민족운동’으로 그려낸 독립협회 회장의 꿈이란 사실 ‘민족적’ 경계선을 훨씬 넘은 ‘일본을 맹주로 한 황인종 공동체’였다.
몰락한 잔반(殘班) 가문의 출신으로 세도가 민씨와의 식객으로서의 관계 외에 기댈 곳이 없었던 주변적 엘리트 안경수에게 일본의 ‘신문명’은 출세 발판이 됐다. 1883~85년에 최초 도일 유학생 중 한명으로 일본에서 방직기술을 익힌 뒤 1887~90년에 주일 조선 외교사절의 통역으로 일본에 상주할 수 있었던 그는, 고종과 민씨 세력가들에게 주문을 받아 일본의 새로운 상품들을 공급해주는 과정에서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고종과 측근들이 관리하는 궁정 예산이 국가 예산의 40%에 달하고 고종이나 궁정파 실세들의 ‘백’ 없이 어떤 대규모 사업도 할 수 없었던 구한말이라는 사조직적 국가에서, 안경수가 축재 과정에서 권력자들과의 인맥을 만들어놓은 것은 기업인으로서 최강의 무기였다.
조선·일본을 관료이자 어용 상인으로서 왕래하는 관계로 일본 외무성에서도 신뢰를 얻은 그는 1894년 친일 갑오 내각이 세워지자 탁지부(재정부)·군부의 장관·부장관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맨손으로 출세한 ‘잡초형’ 부자답게 눈치가 빨랐던 그는 1895년 4월의 러시아 주도의 삼국 간섭으로 국내의 일본 영향 일변도 분위기가 러시아·미국쪽으로 기울자 재빨리 일련의 반일적 움직임을 보였다. 그 덕에 그는 1896년 2월의 아관파천으로 갑오 내각의 ‘순수 친일파’가 몰락한 뒤에도 계속 양지에 남아 독립협회의 토론회 등을 통해서 그의 표현대로 ‘우매하여 허문(虛文)만 숭배해 독립이 뭔지도 모르는’ 군중에게 상업·위생·애국의 중요성에 대해 훈수하였다. 또 조선의 최초 민간 은행인 조선은행(1896년 설립)에서 국고 자금의 일부를 관리하고 일본 기계를 도입하여 면제품을 만들어 일본으로 수출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철도·운수업을 포함하는 야심 찬 사업가의 생활을 영위했다.
국내에서 그를 재벌로 키운 것은 궁 내의 ‘백’이었지만, 사업 자체를 위해서 가장 절실한 것은 일본 기술·자금·시장이었다. 그러나 결국 멈출 줄 모르는 야심은 그의 몰락을 부르게 되었다. 늘 고종의 영향력을 빌려야 하고 고종을 둘러싼 친러적 보수파와의 알력에 지친 재벌 안경수는, 차라리 자신과 자신에 가까운 정치 세력들을 최고 권력으로 만들어 조선을 확실하게 메이지 일본의 길로 인도하려는 셈으로 박영효 등 재일 망명객과 일부 군 장교와 연대하여 고종의 폐위와 황태자 옹립 등의 쿠데타를 모의했는데, 그것이 발각돼(1898) 일본으로 도망가게 된 것이다. ‘백인 침략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일·중·한 삼국이 일본을 맹주로 모시는 군사·상업적 동맹이 돼야 하고, 조선의 개발에 일본의 기술·투자가 절대적이라는 요지의 ‘일청한삼국동맹론’(日淸韓三國同盟論)을 아시아주의자 잡지 <일본인>의 편집부에 남겨놓은 그는 고종에게 다시 접근해보려고 1900년 봄에 자수·귀국하지만 곧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고종은 그의 부정부패에는 눈을 감아주었지만, 자신에 대한 권력 탈취 시도는 용서할 수 없었다.
단순히 ‘매국노’로 평가할 수 없지만…
일본 기술·투자의 전면적 도입과 함께 대한제국의 국권 존속을 희망했던 안경수는 개화기의 대표적인 대일 의존적 관료 자본가이었음에도 단순히 ‘매국노’라고 서술되기는 힘들다. 그는 대한제국이나 일본의 이익보다는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계층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여 독립협회에서의 ‘국민 만들기’ 작업을 거기에 맞췄던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자본가’의 기본 생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부류의 인간들이 주인으로 군림하는 세상에서 민중의 대응 방법이 무엇일까? 물론 노조·진보 정당들이 국민국가의 테두리 안에서 자본이 사회에 끼치는 해악을 최소화하도록 노력해야겠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자신의 잇속을 온갖 비도덕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챙기는 기업계의 괴물들을 오늘날 반세계화운동이 시도하듯 국경을 넘어 범세계적 차원에서 길들여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1. 송경원, “한말 안경수의 정치활동과 대외인식”- <한국사상사학>, 제8집, 1997.
2. 김윤희, “삼국공영론의 경제발전 방안과 경인지역 대자본가의 경제적 지향”- <한구근현대사 연구>, 제26집, 2003.
3. 조재곤, “한말 조선 지식인의 동아시아 삼국 제휴 인식과 논리”- <역사와 현실>, 제37집, 2000,
4. 이광린, “개화기 한국인들의 아시아연대론”- <개화파와 개화사상 연구>, 일조각, 1989.
5. 현광호, “대한제국기 삼국 제휴 방안과 그 성격”- <한국근현대사 연구>, 제14집, 2000.
‘민족’이란 경쟁의 도구일 뿐 예컨대 이라크 침략에서 미국 군수자본들과 ‘복구사업’의 예산을 끼리끼리 독차지한 정상배들이 미국이란 국가를 이용하여 국가적 살육으로 횡재했다 해도, 이 자본이 미국의 ‘민족 자본’이라 볼 수 있는가? 만약 ‘민족적’이었다면 실업률을 높이면서 지난 4년 동안 약 250만명의 제조업 노동자를 해고하여 생산시설을 중국 등의 저임금 지대로 이전했겠는가? 또 미국 산업의 백미라 할 만한 첨단기술·소프트웨어 개발 센터들을 프로그래머들의 임금이 낮은 인도로 계속 이전했겠는가? 늘 이윤을 추구하면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자본에 ‘민족’은 경쟁의 도구가 될 수는 있어도 목적이 될 리는 없다.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안경수의 후견인으로 알려진 민씨 세력가 중의 한 사람인 민영휘는 1887년에 주차일본판리공사(駐箚日本辨理公使)가 돼서 안경수를 통역으로 데려갔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악명이 높았던 일본 밀정 배정자를 그린 영화 <요화배정자> 포스터. 그녀는 1885년 일본에 도피한 뒤 안경수, 김옥균 등의 재일 조선 개화파들과 알게 돼 그들을 통해서 결국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