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파워’를 보여주마… 에스트라다 이후의 필리핀을 준비하는 두명의 여성지도자
(사진/필리핀시민사회공동의회(KOMPIL Ⅱ)의장인 딩키 솔리만(위).아로요 현 필리핀 부통령) 정치적 혼란기에 접어든 필리핀은 지금 ‘여성파워’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필리핀이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문제도 여성들에게 물어봐야 한다.
지난 12월7일 오후 2시, 필리핀 상원의회 회관에서는 필리핀 현직 대통령 에스트라다의 역사적인 탄핵재판이 시작되었다. 지난 10월 초순 에랍(에스트라다의 애칭)의 도박뇌물 스캔들이 불거진 지 2개월 만에 열린 탄핵심판이었다. 상원의원 20명이 출석한 가운데 열린 이 탄핵심판의 최종 결과는 내년 1월 중순께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필리핀뿐 아니라 아시아에서는 처음인 현직 대통령의 탄핵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밖에서는 수많은 군중이 모여 에랍의 즉각적인 하야를 요구했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는 세명의 여성이 있었다. 민중의 힘을 상징하는 노란색 재킷을 입은 코라손 아키노(66) 전 대통령, 흰색 정장의 마카파갈 아로요 부통령(54), 그리고 지난 몇달간 계속 대중집회를 이끌어 온 필리핀시민사회공동의회(KOMPIL II)의 코라손 딩키 솔리만(48)의장이다.
이 여성들의 뒤를 이어 수많은 군중은 “에립 하야”를 외치며 상원의회회관을 일곱 바퀴 돌기 시작했다. 이른바 ‘여리고 행진’이라고 불리는 이 시위방법은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가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 쓴 방법에서 따온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는 남성이었으나 필리핀 군중은 이 여성들의 진두지휘 아래 움직이고 있었다. 시위대도 남성중심이었던 예전과는 달리 수많은 여성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로요, 준비된 대통령을 위해 이번 탄핵재판에서 에스트라다의 뇌물부패가 사실로 들어날 경우 현재 부통령인 마카파갈 아로요가 자동적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한다. 1986년 민중의 힘으로 당선되었던 코라손 아키노에 이어 두 번째 여성대통령이 되는 것이다. 설사 에스트라다의 탄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재의 필리핀 정국을 살펴볼 때 조만간 어떠한 형식으로든 두 번째 여성대통령이 나오리라는 조짐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그것은 최근의 필리핀 정국이 지난 1986년에 있었던 마르코스 정권붕괴 과정과 몇 가지 유사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1983년 마르코스 정권에 의해 아키노 상원의원이 암살되면서부터 시작된 대중 시위는 1986년 마르코스 정권이 물러나기까지 코라손 아키노와 다양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제1차 필리핀시민사회공동의회(KOMPIL I)에 의해 주도됐는데, 에랍 하야 운동 역시 아로요 부통령과 16년 만에 새롭게 구성된 제2차 필리핀시민사회공동의회가 주도하고 있다. 필리핀시민사회공동의회에는 좌·우정파가 에랍 하야를 공동의 목표로 삼아 함께 모였다. 지난 10월30일 비공식적으로 진행된 제2차 필리핀시민사회공동의회(KOMPIL II)의 첫 번째 회의는 3천여 NGO들과 시민사회개발단체들의 연합조직(CODE-NGO) 회장을 맡고 있는 코라손 딩키 솔리만의 진행으로 노동, 농민, 도시빈민, 여성단체뿐만 아니라 비즈니스 그룹까지 함께 참여하여 에스트라다 하야 이후의 일정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이틀 뒤인 11월2일 시민사회단체대표로 딩키 솔리만과 정당대표로 아로요가 함께 공식 기자회견을 열어 지속적인 연대를 함께 약속했다. 그러나 이들 여성지도자들의 개인적인 행로를 반추해보면 그 경력이나 사회를 개혁시키는 접근법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 아로요는 1962년부터 65년까지 대통령을 지낸 고(故) 디오스다도 대통령의 딸이다. 디오스다도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에 필리핀의 경제는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활성화되던 시절이었다. 아로요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나온 조지타운대학에 입학했으나 결혼으로 학점을 취득하지 못했으며 1986년 고향에 돌아와 필리핀의 아테네오대학과 필리핀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땄다. 그는 아버지의 후광을 얻어 1992년 상원의원이 되고 3년 뒤에는 1570만표라는 기록적인 득표로 재선에 성공한다. 그리고 1988년 부통령선거에서도 역대 최다 득표로 당선된다. 아로요는 부통령 재임 시절부터 에스트라다 대통령과는 계속 마찰을 빚어 왔다. 많은 정치비평가들은 아로요가 일찌감치 차기대통령이 되기 위해 다양한 정치행보를 치밀하게 준비해 왔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풀뿌리’에서 출발한 솔리만
반면에 코라손 딩키 솔리만은 다소 다른 길을 걸어왔다. 그는 아로요와 같은 필리핀대학교(UP) 출신이지만 일찌감치 학생운동의 길을 걸으며 대중조직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1973년부터 지금까지 농촌지역과 도시지역의 주민공동체 조직운동을 지휘하고 있다. 1988년부터 92년까지는 농촌개혁뿐 아니라 필리핀환경재단 설립과 인권운동 등 다양한 경험을 했으며 현재는 대중조직가 훈련을 전문으로 하는 대중조직가교육학교(CO-Multiversity)의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이처럼 필리핀사회와 정치개혁에 지도적 위치에 선 여성 파워를 보노라면 남성들이 지배하는 문화에 있는 우리에게는 조금은 낯설게 느껴진다. 그러나 적어도 여성의 사회적 진출에 대한 필리핀 국민들이 시선은 극히 자연스럽고 너그럽다. 오히려 국민들의 관심은 누가보다 더 사회적 진보를 향한 개혁을 이룰 수 있는가에 있다. 현재의 공동의 연대가 지속적인 개혁으로 나갈 것인지 아니면 또다른 갈림길에 설지는 두고 볼 일이다.
마닐라=나효우 통신원nahyowoo@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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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로요, 준비된 대통령을 위해 이번 탄핵재판에서 에스트라다의 뇌물부패가 사실로 들어날 경우 현재 부통령인 마카파갈 아로요가 자동적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한다. 1986년 민중의 힘으로 당선되었던 코라손 아키노에 이어 두 번째 여성대통령이 되는 것이다. 설사 에스트라다의 탄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재의 필리핀 정국을 살펴볼 때 조만간 어떠한 형식으로든 두 번째 여성대통령이 나오리라는 조짐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그것은 최근의 필리핀 정국이 지난 1986년에 있었던 마르코스 정권붕괴 과정과 몇 가지 유사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1983년 마르코스 정권에 의해 아키노 상원의원이 암살되면서부터 시작된 대중 시위는 1986년 마르코스 정권이 물러나기까지 코라손 아키노와 다양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제1차 필리핀시민사회공동의회(KOMPIL I)에 의해 주도됐는데, 에랍 하야 운동 역시 아로요 부통령과 16년 만에 새롭게 구성된 제2차 필리핀시민사회공동의회가 주도하고 있다. 필리핀시민사회공동의회에는 좌·우정파가 에랍 하야를 공동의 목표로 삼아 함께 모였다. 지난 10월30일 비공식적으로 진행된 제2차 필리핀시민사회공동의회(KOMPIL II)의 첫 번째 회의는 3천여 NGO들과 시민사회개발단체들의 연합조직(CODE-NGO) 회장을 맡고 있는 코라손 딩키 솔리만의 진행으로 노동, 농민, 도시빈민, 여성단체뿐만 아니라 비즈니스 그룹까지 함께 참여하여 에스트라다 하야 이후의 일정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이틀 뒤인 11월2일 시민사회단체대표로 딩키 솔리만과 정당대표로 아로요가 함께 공식 기자회견을 열어 지속적인 연대를 함께 약속했다. 그러나 이들 여성지도자들의 개인적인 행로를 반추해보면 그 경력이나 사회를 개혁시키는 접근법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 아로요는 1962년부터 65년까지 대통령을 지낸 고(故) 디오스다도 대통령의 딸이다. 디오스다도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에 필리핀의 경제는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활성화되던 시절이었다. 아로요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나온 조지타운대학에 입학했으나 결혼으로 학점을 취득하지 못했으며 1986년 고향에 돌아와 필리핀의 아테네오대학과 필리핀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땄다. 그는 아버지의 후광을 얻어 1992년 상원의원이 되고 3년 뒤에는 1570만표라는 기록적인 득표로 재선에 성공한다. 그리고 1988년 부통령선거에서도 역대 최다 득표로 당선된다. 아로요는 부통령 재임 시절부터 에스트라다 대통령과는 계속 마찰을 빚어 왔다. 많은 정치비평가들은 아로요가 일찌감치 차기대통령이 되기 위해 다양한 정치행보를 치밀하게 준비해 왔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풀뿌리’에서 출발한 솔리만

(사진/지난 12월7일 에스트라다 탄핵을 요구하는 군중집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