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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관습’ 이라는 적과의 동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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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11-2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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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헌법재판소 <경국대전> 신봉의 뿌리… 구습을 꾸짖던 조선의 지도자들이 전통으로 회귀할 땐 이유가 있다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경국대전>까지 들먹이면서 강남 귀족 중심의 생활을 변화시켜보려는 움직임을 막아버린 헌법재판소의 행각을 보면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명확성 없는 관습과 다수 국민의 의사의 명확한 반영인 성문 헌법이 구별되는 근대적 법 체계상으로 성립되지 않는 억지 이론을 만천하에 내놓는 것은 결국 자신들의 권위를 치명적으로 떨어뜨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하는 거였다. 그러나 기득권 사수 선언문의 역사적인 맥락을 생각해보니 그들의 역사·문화적 생리상으로 이 ‘관습’ 운운은 꽤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화주의자들의 적이었던 ‘관습’

왜인가? 한국에서 근대적인 지배층이 형성되기 시작한 100여년 전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의 태도에는 중대한 법칙이 있기 때문이다. 근대적인 지배층이 내세우는 위로부터의 종속적인 근대화 프로젝트에 대한 대안 세력이 없을 때 그들은 근대의 대표자가 되어 ‘구습’과 ‘폐습’들을 자신만만하게 공격한다.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문명적 정체성도 만들어지고 바깥 후견인들의 인정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근대를 훨씬 본격적인 방법으로 실현하려는 대안 세력이 생기면 더 이상 게임이 되지 않는 이 사회의 ‘주인’들은 돌연 ‘전통’의 안식처로 귀환한다. ‘우리의 고유한 것’으로 돌아와야 전력(戰力)과 무기가 생기기 때문이다.

구한말의 친미·친일 개화파들은 <독립신문>을 통해 외부의 잣대를 대담하게 들이대면서 100년 전 조선의 ‘관습 헌법’을 맹공격했다. 1899년 7월 18일치.
그러나 오늘날 보수파의 선조에 해당되는 구한말의 친미·친일 개화파가 여론 주도의 한 축으로 처음으로 등장해 서재필·윤치호의 <독립신문>이 문명, 경쟁, 기독교의 기치를 처음 내걸었던 1896~99년의 그들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그들의 현실적인 준거집단인 메이지 일본이 유교적 과거의 상징이 된 중국을 청일전쟁에서 대패시키고 임금 고종이 서구 열강의 공사나 목사에 의존하는 신세가 됐으니, 열강의 문명적 권위를 한 몸에 담은 저들 개화주의자는 얼마든지 자신만만할 수 있었다.

그들의 유일한 경쟁자는 시골에서 와신상담하는 위정척사파 유림이나 일본군 총검 밑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동학이었는데, ‘문명’의 담지자들에게 이들은 일소(一笑)에 부칠 만한 ‘완고당’이나 ‘도적’에 불과했다. 그러기에 이들은 외부의 잣대를 대담하게 들이대면서 100년 전 조선의 ‘관습 헌법’을 맹공격했다. ‘밖’의 시각으로 봐서는, ‘관습 헌법’ 아래에서 살아온 조선인들은 “나태하고 우매하고 관의 법령을 복종할 줄 모르고 서로 속이고 의심하고 상하간에 의구심이 많아 늘 시끄럽고 자기 나라 일을 딴 나라 일처럼 여겨 걱정을 아니하고, 나폴레옹과 같은 명장이 있어도 능히 구할 수 없는 병든 사람”(<독립신문>, 1899년 7월18일)들이며, “늘 불평만 늘어놓고 협잡하여 애국할 줄 모르는” 그들의 속성으로 단발령 반대와 같은 수구적인 일이 아니라면 서로 단결할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독립신문>, 1897년 7월29일).

전장에서 싸울 줄도 외국과 교제할 줄도 모르는 ‘완고하고 불쌍한’ 조선을 위해서 ‘문명의 이치를 먼저 깨달은’ <독립신문>의 종사자들이 내놓은 개혁안 중에서 합리적인 부분- 예컨대 관(官) 수탈의 엄금, 노비 해방령의 철저한 시행, 여성 교육 개척- 도 있었지만, 백성을 괴롭힌 부조리뿐만 아니라 조선 종래의 ‘관습’ 전체가 신생 개화지상주의자들의 공격 대상이었음을 간과하면 안 된다. 느리게 살면서 무당굿이나 구경하고 독경하는 승려를 받들고 사랑방에서 언제나 남의 신세를 져도 되는, 툭하면 민란이 터져도 ‘경영하여 돈 벌 줄 모르는’ 이 조선(<독립신문>, 1898년 10월22일)은, 개명 관료·지주들이 바라는 것처럼 유산자로 살면서 부지런한 노동자를 쉴 새 없이 부리면서 재산을 모을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밥과 김치를 먹는 일까지(!) 포함한 ‘구습’과 ‘구습을 자랑하는 완고배’들을 원수로 여긴 <독립신문> 계열의 신흥 유산층 세력은 혁명가는 아니었다. 1919년의 3·1운동을 봐도, 아니면 1987년 6월의 반독재 운동을 봐도 한국의 부르주아들은 대중의 혁명적 에너지를 이용할 수는 있어도 혁명을 일으킬 수 없는 역사적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당대 ‘관습 헌법’의 반대편에 서 있었던 급진적인 문화 개혁가이었음에 틀림없다.

1920년대 우파 지도자들의 변신

신생 부르주아 인텔리와 ‘관습 헌법’의 불화는 1910년대에도 지속됐다. 오늘날 ‘관습 헌법’의 옹호론자들은, 만약 그들이 존경할 만한 과거 한국 ‘주류 지도자’들이 청년기인 1910년대에 어떤 글들을 썼는지를 자세히 안다면 그 ‘불순한 언사’ 앞에서 치를 떨지도 모른다. 나중에 ‘민족 우파’의 지도자가 된 송진우(宋鎭禹·1889~1945)가 사상 개혁과 유교 타파를 외치면서 향교를 ‘유교라는 병의 전염병원’으로 부르고 문벌 자랑을 ‘조선의 일대 치욕’으로 질타했으며(<학지광> 제5호, 1915), 기독교적 감상주의로 ‘착한 가난뱅이’를 묘사한 <화수분>(1925)으로 유명해진 전영택(田榮澤·1894~1968)은 ‘고루 몽매한 효도와 남존여비, 문벌, 가족 제도’를 “혁명을 일으켜서 뇌수에서 지워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학지광> 제13호, 1917). 기득권 우파의 계보로 봐서는 송진우·전영택은 웃어른임에 틀림없지만, 오늘날 보수주의자의 입장에서는 1910년대 그들의 ‘관습’ 관련의 발언은 망언으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1920년대에 접어들어 ‘관습’에 대한 개화파 후예들의 태도는 상당히 달라지기 시작한다. 1920년에 원로 민족주의자 이상재(李商在·1850~1927)의 권위를 빌려 <동아일보>가 제사를 ‘조선의 고유 풍습’으로 옹호하고 제사를 폐하려는 서구 선교사와 일부 근본주의적 기독교인들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몇년 전만 해도 유교를 전폐하려 했던 자들은 이제 와서 유교의 일부를 인정한 셈이다. 그리고 1920년대 중·후반 최남선(崔南善·1890~1957)은 <독립신문>이 경멸해 마지않았던 무당들을 ‘고대 조선 찬란한 문화유산’으로 인정하여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이광수는 <단종애사>(1928~29) 유의 소설에서 여태까지 봉건 관념으로 생각해온 ‘충군’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전영택과 송진우는 1910년대 ‘관습’을 맹렬히 꾸짖었지만, 최남선과 이광수는 1920년대 들어 좌파가 등장하면서 ‘관습’을 보듬기 시작했다. (사진 / 연합)

어쩌다가 이들은 이미 폐기 처분된 과거를 다시 끌어와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게 된 것인가? 보수적인 지방 유지층도 아울러야 하는 ‘문화주의자’들의 현실적 필요성도 우파 민족주의를 내실 있고 유서 깊은 논리로 만들려는 담론적 필요성도 있었겠지만, 한 가지 요인을 간과하면 안 된다. 1890년대나 1910년대와 달리 1920년대의 우파 지도자들에게 ‘근대적’ 공론의 장에서 그들의 반동성과 반민중성, 기만성을 쉽게 폭로할 수 있는 좌파란 새로운 도전자가 생겼다는 것이다. 좌파에 동조하는 1920년대 수많은 젊은이들의 입장에서는, 송진우·최남선·이광수는 어차피 미래를 대표하지 못하는 반동들이었다. 사회과학의 차원에서 좌파와 힘겨루기를 해봐야 손해 볼 일밖에 없었던 민족 우파로서는 가장 확실한 안식처는 무엇인가? 그렇다. 바로 이성이 아닌 미학적 감각이나 정서로 사랑해야 할 미풍양속과 전통, 즉 ‘관습’의 세계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와 같은 ‘전통으로의 회귀’의 코스를 나중에 그대로 밟은 집단은 박정희를 위시한 정치 군인들이었다. 1960년대 초, 권력을 갓 잡은 박정희에게는 한국의 과거는 ‘악의 창고’였으며, 당파심과 이기심에 가득 찬 조선인들이 ‘인간 개조’를 통해서 거듭나야 할 대상들이었다. <독립신문>이나 초기의 이광수를 방불케 하지 않는가? 그러나 1970년대 박정희는 세종대왕과 율곡을 숭배하고 충효사상을 제창하는 전통주의자로 거듭났다. 자유민주주의의 입장에서 그의 체제를 공격하는 민주화 운동과 ‘근대’의 영역에서 싸울 만한 논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법부의 폭거가 주는 희망

종속적인 부르주아들이 개혁적인 단계에서 조선의 모든 것을 싸잡아 경멸할 때도 ‘전통 회귀적’ 단계에 억압·착취의 합리화에 필요한 ‘관습’들을 왜곡하여 이용하거나 고안할 때도, ‘관습’의 담지자로서의 민중을 주체성 없는 ‘개조’나 세뇌 대상물로 삼는 것이나 철저하게 계급적 이익에 따르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관습’을 공격할 때의 활기 넘치는 모습과 ‘관습’을 다시 자기들의 편에 끌어들일 때의 생명력 없는 위기와 불안의 모습은 엄연히 다르다. <경국대전>을 부적으로 삼을 정도라면 저들의 역사적 수명은 많이 남아 있지 않은 듯하다. 그런 면에서 어이없는 사법부의 폭거는 우리에게 일말의 희망을 주기도 한다.


참고 문헌

1. 주진오, ‘독립협회의 경제체제 개혁 구상과 그 성격’, 박현채·정창렬 엮음, <한국민족주의론 III: 민중적 민족주의>, 창작과 비평사, 1985, 76∼128쪽.
2. <독립신문, 다시 읽기>, 푸른역사, 2004.
3. 전택부, <월남 이상재의 생애와 사상>, 연세대학교출판부, 2001, 171∼175쪽.
4. <학지광> 영인본, 태학사, 1978.
5. 김현주, ‘이광수의 문화적 파시즘’, <한국 문학, 파시즘과 인민주의>, 국학자료원, 2000, 1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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