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날 빨리 죽여주세요’라는 술

338
등록 : 2000-12-13 00:00 수정 :

크게 작게

(사진/소를 매매하기 위해 우시장에 나온 마사이부족민들. 이들에게 맥주는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사치품이다)
케냐 수도 나이로비의 슬럼가인 무쿠루, 바하티, 우모자, 캉게미 등이 최근 ‘킬링 필드’로 변했다. 용해제와 동결방지제 등을 만드는 데 쓰는 공업용 메탄올로 주조한 밀주를 마시고 140여명이 숨지고 수십여명이 실명한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참극은 처음이 아니다. 98년에도 밀주를 마시고 100여명이 사망했고 올해 초에도 25명이 목숨을 잃은 바 있다. 지난 3년 동안 밀주를 마시고 숨진 사람들이 5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많은 이들은 이번 참극을 국가적 재앙으로 규정하고 정부가 근본적인 조처를 취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밀주는 인적이 드문 강가나 한적한 곳에서 주조되는데 이번에 문제가 된 밀주는 한잔에 10실링(150원)에 팔려 스와힐리어로 10을 의미하는 ‘쿠미쿠미’(kumi kumi) 혹은 ‘날 빨리 죽여주세요’라는 이름으로 거래되었다. 밀주의 명칭은 주조장소나 부족사회마다 다양하다. 창아, 무라티나, 부사, 사자의 눈물(machozi ya simba) 등 다양한 이름으로 팔리는데 케냐 정부는 1979년 토속주 생산과 판매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해 시행해오고 있으나 현실과 유리된 법이라는 데 많은 이들이 공감한다.

이들이 밀주를 마시는 이유는 간단하다. 주로 남아프리카공화국계의 다국적 기업이나 케냐의 맥주회사가 시판하는 맥주가 한병에 50실링(750원) 정도에 팔리고 있지만 빈민촌 거주자 등 가난한 케냐인들이 마시기에는 부담스러운 가격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밀주를 옥수수, 바나나 혹은 꿀을 이용해 빚었으나 적은 비용으로 빨리 취할 수 있는 술을 요구하는 소비자들의 취향에 부응하기 위해 밀주업자들이 경쟁적으로 좀더 강력한 원료를 사용한 결과 이런 참극이 일어난 것이다.

케냐는 가뭄 등 최악의 자연재해와 정치적 부패로 경제적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실업상태로 내몰리고 있다. 구조적 빈곤과 절망감이 사람들로 하여금 밀주에 의존케 하거나 절대적 존재를 찾아서 교회로 몰리게 하고 있다. 따라서 정치적 파행과 경제적 침체에도 불구하고 술집과 교회만은 급성장하고 있다고 개탄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번 참극을 계기로 토속주의 생산과 판매를 양성화하라는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토속주의 생산과 판매금지라는 정부 정책이 본래의 취지와는 달리 오히려 밀주업자들이 식품위생규정 등을 무시하면서 치명적인 밀주를 생산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토속주 양성화’를 주장하는 이들은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는 정부관리들의 무책임과 술을 권하는 구조적 문제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죽음과 절망의 나락으로 내몰고 있다고 비판한다. 특히 경찰들이 밀주의 생산과 판매를 묵인·비호해주는 대가로 뇌물을 받고 있음에도 정부가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고 있는 것은 밀주업자와 부패한 경찰, 정부관리들과의 공생관계를 지속시키는 무책임한 방조행위라는 것이다. 토속주 생산을 양성화해서 정부가 주조과정상의 위생상태 등을 철저히 관리하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상황은 더이상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양성화 옹호론자들의 주장이다. 특히 토속주는 성인식과 같은 부족전통의 의식을 치르는 데 불가결하기 때문에 토착문화의 수호와 계승이라는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덧붙여진다. 인접국인 우간다는 와라기, 탄자니아는 코냐기라는 토속주를 양산해 일반인에게 판매하고 있는 것도 고려할 만한 예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자꾸만 술을 권하는 구조적 문제의 해결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헨트=양철준 통신원 YANG.chuljoon@wanadoo.f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