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뉴욕 컬럼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얻은 그가 제주 4·3항쟁을 싹 쓸어버리겠다고 호언하기까지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역사상 치욕으로 남게 될 이라크 파병이 결정되는 과정에서 주요 화두로 등장한 것은 ‘숭미주의’라는 것이었다. 이라크의 재식민화 계획이 좌절되는 것과 파병이 테러 위협을 의미한다는 사실, 이번 파병이 전례가 돼 한국군이 미국의 다음 침략의 경우 다시 전쟁의 현장에 불려지게 될 줄 알면서도 이라크 현지인이나 다수 국민들이 원하지 않은 파병을 감행한 것은 왜곡된 ‘신앙 고백’에 가깝다.
미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을 기억하라 물론 이 결정의 뒷면에는 대북 침략 가능성이나 한국의 수출 경제 등과 관계되는 미국 협박의 가능성도 있었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현실화될 확률이 많지 않은 이 공갈만으로 한국의 관료·정치인들이 국익과 정반대되는 방향으로 움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협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유민주 종주국’인 미국의 ‘어버이다운 보살핌’에 대한 한국 지배자들의 몸에 밴 충성심과 신앙적 믿음이었다. 베트남·이라크에서 최첨단 무기로 대량 학살을 마다 않는 미군들이 구식 총칼을 든 농민·빈민에게 당하는 것을 보며 믿음은 잠시 시련을 받을 수도 있지만 영영 사라지지는 않는다. ‘미국’과 ‘나’를 구별조차 하기 싫거나 할 수 없을 정도로 내면적인 ‘숭미화’가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신앙의 원류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숭미 퇴치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숭미 콤플렉스 형성의 연혁이 한국의 근현대사만큼이나 길다는 것이다. 숭미적 세계관의 공고화 제1단계라 할 만한 개화기에 서재필·이승만 같은 개신교 개종자들에게 미국은 유교적인 ‘요순 시대’라는 전통적 유토피아를 대체하는 근대적 이상향으로 받아들여졌는데, 그들의 대미관은 오늘의 집권세력들도 공유하는 남한의 중도 우파적 세계관의 골자가 됐다. 제3단계라 할 수 있는 1945년 이후, 미 군정청이 영어 능통자들을 고위직에 앉혀 ‘통역 정부’의 양상을 빚고, 제1공화국 각료 중에서 도미 유학파가 25%나 차지하게 된 뒤로 남한에서는 어떤 분야든 미국이 ‘성공의 통로’로 간주됐다. 일본적 가치들을 더 중요시했던 정치군인들이 정치에서 퇴장한 뒤, 그 사상적·인맥적 계통이 개화기의 친미파들에게 올라가는 중도 우파가 득세한 것은 ‘숭미교(敎)’의 또 하나의 전성기로 이어진다. 100년 동안이나 이어진 상황인 만큼 ‘우리 속의 성조기’가 어찌 쉽게 사라지겠는가?
개화기와 1945년 이후의 ‘숭미병(病)’의 병력은 잘 알려져 있지만 이 단계를 연결하는 일제시대 도미유학파의 숭미주의 전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비교적 약하다. 일제시대 엘리트라면 보통 일본어의 완벽함이 일본인 뺨칠 정도인 어느 제국대학 출신의 총독부·은행·재벌 간부 등이 연상되는데, 실제로는 미국 ‘순례’ 경력으로 사회적 지위를 얻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대개 개화기의 ‘신미’(信美) 전통을 이은 이들이 1945년 이후 남한 숭미주의의 대부가 된 만큼 그들의 ‘숭미병 증후군’을 통해 이 시대 대미 태도의 청사진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숭미가 어떤 결과들을 낳았는지 보면서, 오늘날 지배자들의 일그러진 대미 의식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가고 있는지도 알 수 있다. 좋은 자료 중 하나는 그들의 내면을 더 잘 읽을 수 있는 일기나 회고록, 서신 등이다. 예컨대 정치사에서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조병옥(維石 趙炳玉·1894~1960)의 경우를 보자.
조병옥…. 1950년대 민주당의 지도자였던 그는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중도 우파 라인의 원조 중 하나였다. 흥사단의 열성 멤버이자 1920년 미국에서 결성된 ‘북미한인유학생총회’의 부회장이었던 그는 서재필·안창호 등 독립협회 관련자들의 숭미 논리를 계승해 그 다음 세대로 넘겨주었다. 그러나 ‘정통 야당의 상징’으로 불리는 그는 제주도 도민들에겐 학살의 악몽을 상징할 뿐이다. 제주도의 4·3 사태의 도화선이 된 1947년 3월1일의 경찰 발포 사건이 일어나자 경찰의 최고 책임자인 미 군정청의 경무부장 조병옥이 제주도에 와서 사과 대신 “조선의 건국에 저해가 된다면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라는 악명 높은 명언(?)을 남겼다. 그 뒤 좀더 부드러운 입장을 취한 김익렬 연대장을 공산주의자라고 모략한 그는 학살의 주역이었다. 컬럼비아대학교 박사과정 때 “국가는 개인 완성의 도구”라는 자유주의적 테제를 좌우명으로 삼은 “민주적 재야의 원조” 조병옥이, 어떻게 제주도의 도민들을 싹 쓸어버려야 할 ‘비인간’으로 여기게 됐는가? 그가 ‘미국적 가치’들을 어떻게 내면화했기에 대량 학살의 필요성을 주장하게 됐는가? 이 문제를 조병옥의 <나의 회고록>(1959년 초판, 2003년 재판)을 통해서 한번 풀어보자.
‘영웅적 서부개척’논리를 선망하다
가난한 조선 출신 조병옥에게는 1914년에 처음 찾은 미국, 그 중에서도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중심지로 떠오르기 시작한 뉴욕은 압도적인 인상을 주었다. 그의 회고록에서는 각종의 최상급 서술 용어들이 자주 나타난다. “뉴욕의 교통만은 세계 제일” “세계 최대의 건물” “월가는 세계 금융을 좌우하는 곳” “맨해튼교(橋), 얼마나 길고 긴 다리인가!” 조선이라는 변방에서 120두락을 소유하는 집안의 장남으로서 명문인 평양의 숭실학교를 졸업해 서북 자산가의 차세대와 친할 수 있는 고학력자 조병옥이었지만, 미국이라는 세계적인 ‘중심지’에서 그는 일개 소수민족 출신의 가난한 손님일 뿐이었다. 미국의 힘에 압도당한 조병옥이 어떻게든 틈입하여 그에 편입해 후광을 입어보려는 것은 당연한 심리일지 모른다. 그가 컬럼비아대학교라는 ‘세계적인 엘리트들이 모이는 곳’에서 박사학위까지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어찌 감동적인 일이 아니었겠는가? 그를 그토록 놀랜 ‘맨해튼의 웅장한 마천루’의 주인 대열에까지 끼어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학맥상으로라도 ‘세계를 움직이는’ 힘의 대열이 된 것이다.
동시에 그는 형식적인 학맥보다 더 내밀한 차원에서 자신과 미국을 일치시키는 데 만전을 기한다. 그는 그가 1925년에 귀국해 연희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을 당시 조선어 사용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염려할 만큼 영어 실습에 몰입했으며, 이역에서 어려울 때마다 ‘미국의 서부를 개척하여 정의 질서를 세운 개척자들의 영웅적 정신’
‘우리 독립 정신의 상징이 돼야 할 청교도들의 건국 정신’을 생각했다. 그리고 공산주의를 죄악시하는 컬럼비아대학교의 보수적 스승들의 지도에 따라서 <자본론>의 원전까지(!) 읽어가면서 ‘자유민주적 경제학’의 입장을 ‘유물론자’들과의 논쟁에서 변론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렇게 ‘청교도 정신’의 보유자, ‘자유민주주의’의 보호자로 내면적으로 개조된 그가 1948년에 이승만의 특사 자격으로 태평양을 23년 만에 다시 건너갔을 때 “자유의 천지 미국의 땅을 다시 밟게 되어 참말로 감개무량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겠는가?
그는 외교관으로서 미국을 상대해야 했지만 내면적으로는 ‘자유의 천지’를 또 하나의 본국으로 여겼다. ‘자유 천지의 보살핌’ 아래의 대한민국의 건국을 어떤 무리들이 감히 방해한다면 ‘영웅적인 서부 개척자’들이 인디언들을 모조리 섬멸했듯이 싹 쓸어버려야 한다는 것은 조병옥의 너무나 미국적인 논리였다. ‘청교도의 고귀한 정신’을 보유하지 않은 이들을 ‘자유와 민주를 위해서’ 죽여도 된다는 것은 바로 미국 정치의 중심 가치다.
대한민국을 ‘결사대’로 내세우는가
조병옥의 사례가 보여주는 숭미주의적 엘리트의 내면적인 자기 식민화의 주된 위험이 무엇인가? 미제 고급 ‘박사님’ 대열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한국인들이 그들에게 식민지 백성 이상의 대접을 못 받는 것도 문제지만, 그들이 (무너져가고 있는) 미 제국의 세계적 헤게모니를 위해 대한민국을 하나의 ‘결사대’로 내세우는 것은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국익 배반이다. 더군다나 그들이 제국주의적 학살의 현장으로 보내는 이라크 파병 부대 구성원의 다수는 그들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어려운 가정 출신의 젊은이들이 아닌가? 한국의 민중이 이 망국적인 망동을 저지할 만큼 아직도 정치세력화돼 있지 못하다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참고 도서
1) 조병옥, <나의 회고록>, 서울: 민교사, 단기 4292(1959): 서울, 선진, 2003.
2) <제민일보> 4·3취재반, <대하실록 제주민중운동사: 4·3은 말한다>, 서울, 전예원, 1994, 제1~5권.
3) 이수일, “1920년대 중·후반 유석 조병옥의 민족운동과 현실인식”, - <실학사상연구>, 제15~16권, 2000, 389~464쪽.
4) 김상태, “1920-1930년대 동우회, 흥업구락부 연구”, 서울대국사학과, <한국사론>, 28권, 1992, 209~263쪽.
5) 최진섭, <한국언론의 미국관>, 서울, 살림터, 2000.
미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을 기억하라 물론 이 결정의 뒷면에는 대북 침략 가능성이나 한국의 수출 경제 등과 관계되는 미국 협박의 가능성도 있었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현실화될 확률이 많지 않은 이 공갈만으로 한국의 관료·정치인들이 국익과 정반대되는 방향으로 움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협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유민주 종주국’인 미국의 ‘어버이다운 보살핌’에 대한 한국 지배자들의 몸에 밴 충성심과 신앙적 믿음이었다. 베트남·이라크에서 최첨단 무기로 대량 학살을 마다 않는 미군들이 구식 총칼을 든 농민·빈민에게 당하는 것을 보며 믿음은 잠시 시련을 받을 수도 있지만 영영 사라지지는 않는다. ‘미국’과 ‘나’를 구별조차 하기 싫거나 할 수 없을 정도로 내면적인 ‘숭미화’가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2003년 6월30일, 조병옥 동상 제막식에 모인 한국 우파의 거두들. 과연 그들은 ‘내면적인 자기 식민화’ 문제로부터 자유로운가. (사진 / 연합)

투옥시절의 조병옥(왼쪽)과 그와 가장 가까운 숭실학교 선배 중 하나였던 서북 부르주아층의 지도자 조만식.
1) 조병옥, <나의 회고록>, 서울: 민교사, 단기 4292(1959): 서울, 선진, 2003.
2) <제민일보> 4·3취재반, <대하실록 제주민중운동사: 4·3은 말한다>, 서울, 전예원, 1994, 제1~5권.
3) 이수일, “1920년대 중·후반 유석 조병옥의 민족운동과 현실인식”, - <실학사상연구>, 제15~16권, 2000, 389~464쪽.
4) 김상태, “1920-1930년대 동우회, 흥업구락부 연구”, 서울대국사학과, <한국사론>, 28권, 1992, 209~263쪽.
5) 최진섭, <한국언론의 미국관>, 서울, 살림터, 20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