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의 부재가 몰고온 정치판의 혼란과 분쟁… 이제 아시아인들은 한탄만 하지 않는다
아시아 2000년 12월은 싸늘하게 식어 있다. 밀레니엄 축포가 온 천지를 떠들썩하게 만든 지 겨우 12달 만에 시민들의 고통은 더욱 깊어졌고, 어디를 둘러봐도 새로운 세기의 희망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오직 신자유주의를 앞세운 ‘세계화’의 화두만 더욱 기승을 부릴 뿐, 아시아 전역의 시민들은 좌절감과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다. 아시아의 농민층은 처절하게 분해당했고, 아시아의 노동자들은 참혹하게 목이 잘려 나갔고, 아시아의 도시인들은 처량하게 길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야바위 정치꾼’과 공산주의
2000년 아시아 풍경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또 있다. 아시아를 마디마디 씹어왔던 해묵은 분쟁과 전쟁은 올해도 어김없이 맹위를 떨치며 시민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인도네시아, 카슈미르, 스리랑카, 필리핀,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그리고 결국 중동이 다시 전쟁의 광풍에 휘말려 들었다. 누구를 붙들고 물어봐도 평화 같은 걸 고즈넉하게 말하는 이는 없다. 적어도 아시아에서는.
이 모두는 정치판의 혼란 탓이고, 정치판의 혼란은 ‘리더십’의 부재가 주범이다. “현 정부는 경제정책 실패로 침몰하고 말 것이다.” 96년 5월 당시 야당 총재였던 추안 릭 파이 현 타이 총리가 기자와 인터뷰에서 경제를 강조한 말이다. 1년 뒤인 97년 10월28일, 2번째의 총리 임기를 시작하기 꼭 2주일 전 그는 경제위기 문제를 화두로 삼은 기자와 인터뷰에서 정치를 강조했다. “현 상황은 특별한 경제정책보다 정치력을 발휘해야 할 때다.” 그리고 꼭 2년 만에 분노한 타이 시민들은 추안 총리를 최악의 정치가로 강등시켜버렸다. 당시 경제위기 돌파라는 기대를 한몸에 안고 출발했던 추안 총리, 그가 지녔던 ‘깨끗한 손’이나 ‘법대로’의 이미지 같은 걸 기억하는 시민들은 이제 더이상 아무도 없다. 그는 결국 정치고 경제고 무엇으로도 시민의 이익을 지켜내지 못한 채, ‘국제통화기금에 나라를 팔아먹은 신사’나 ‘느림보 정치가’ 정도로 기억될 모양이다. 이제 타이사회의 정치적 화두는 추안 총리를 떠났다. 그리고 내년 1월6일 총선을 겨냥한 선거열풍이 휩쓸고 다니는 가운데 차기총리로 주목받는 억만장자 사업가 탁신은 일찌감치 ‘돈정치’의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시민들은 극심한 정치적 환멸감에 빠져 있다. 필리핀으로 넘어가보면, 정치판은 말 그대로 점입가경이다. 대통령이란 자가 도박판의 뒷돈을 챙겨 국정을 혼란상태로 몰아넣은 경우는 보다보다 참 희한한 일을 보는 꼴이다. 영화배우 출신의 필리핀 대통령 에스트라다, 그는 말라카낭 대통령 집무실을 사설 사업장으로 만들며 출발부터 이권개입과 부정·부패를 양산하는 스캔들 대통령으로 시민들을 괴롭혀 왔던 인물이다. 최근 신 추기경과 아키노 전 대통령을 비롯한 필리핀의 명망가들이 하나같이 에스트라다 대통령의 사임을 촉구하는 가운데 시민들이 그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운동에 나서자, 이 ‘야바위 정치꾼’은 즉각 낡아빠진 구호를 빼내들고 맞장구를 치고 나왔다. “공산주의자들이 준동한다. 공산주의자들이 모든 시위의 배경이다.” 와히드… 훈센… 쿠마라퉁가… 김대중 웃기도 힘든 삼류 코미디정치가를 놓고 상원에서는 탄핵심사 일정을 잡아 새로운 국면으로 끌고 가고 있지만, 현재 시민들 사이에는 탄핵 결과와 상관없이 이 기회에 ‘새로운’ 정치구조를 만들자는 열망이 높아지고 있다. 1980년대 중반, 마르코스를 몰아냈던 그 뜨거운 심장과 눈물을 간직한 필리핀 시민들 속에서. 인도, 이 거대한 정치대국의 하루하루도 요즘 만만찮은 모양이다. 바지파이 총리의 연임이 결정되고 1년이 지난 현재, 인도 시민들의 심기는 몹시 뒤틀려 있다. 특히 카슈미르를 놓고 벌이는 지루한 대파키스탄전쟁과 극우적 성향으로 치닫고 있는 광적인 힌두민족주의 분위기에 시민들은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버린 상태다. 여기다 핵무기 제조를 위해 군사예산을 해마다 대폭 증액하는 바지파이 총리를 바라보는 절대 빈곤층 시민들의 배신감은 사회폭발 현상으로 이어질 충분한 조건이 된다고 전문가들은 말해왔다. 먹고사는 문제보다는 ‘자존심’을 놓고 사회적 연대를 발휘해 온 인도 시민들의 문화를 눈여겨본다면, 핵거래를 놓고 벌인 바지파이 총리의 줏대없는 ‘미국친교정책’이 인도 정치판을 뒤흔들어 놓은 가장 근본적인 출발이었다는 분석이 상당한 설득력으로 다가온다. 이런 가운데 인도 시민들은 이제 바지파이 총리의 사임을 말하기 시작했고, 공룡 같은 인도정치판은 서서히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는 중이다. 꼽아 본 세 나라말고도 현재 아시아 전역은 어디 할 곳 없이, 무능함과 부도덕이 노출된 국정 최고책임자들 탓으로 정치적 위기감이 팽배해 있다. 구강정치를 해왔던 인도네시아 와히드 대통령은 수하르토의 잔재가 모질게 남아 있는 사무실을 꿰찬 뒤 1년 만에 정치적 탈진상태에 빠졌고, 출발부터 궤변으로 시작한 일본의 모리 총리는 전통적인 모리배 정치로 일본정치의 후진성을 과시하며 시대를 거꾸로 돌려놓고 있다. 캄보디아의 훈센 총리는 완력정치로, 파키스탄의 페르베즈는 쿠데타정치로 각각 사회를 냉각시켜 왔다. 폭탄테러로 한쪽 눈을 잃은 스리랑카의 쿠마라퉁가 대통령은 지난한 내전 속에서 자신과 시민 모두를 희생시키는 불구정치를 심화시켰고, 이란의 하타미 대통령은 보수세력들에 밀려 실질적인 통치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흐느적거리는 모양새다. 아프가니스탄은 내전에 시달리며 20년이 넘도록 정치적 공백상태를 보여왔고,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이스라엘의 바라크 총리는 맞장정치로 돌파구를 찾다 결국 팔레스타인 시민들에 대한 가혹한 공격으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주특기인 반미정치로 자리를 지켜온 노회한 마하티르 총리도 말레이시아사회를 우울하게 만들어 놓기는 마찬가지다. ‘화끈함’을 기대했던 시민들의 바람을 저버린 김대중 정부도 임기 말 현상에 빠져 벌써 저마다 마무리 수읽기를 하고 있다는 참 난감한 소식이 외신들을 타고 있다. 시민들의 자각이 피어오른다 이 참담한 2000년 12월 아시아의 정치판을 바라보며, 아시아 네트워크는 아시아의 정치 최고책임자들에게 공개편지를 보내기로 했다. 그들이 이 편지를 읽을런지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아시아 시민들의 바람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짚어보며 아시아의 시민들끼리라도 그 문제점을 공유하자는 소중한 의미를 담았다. 아시아 네트워크는 대통령이나 총리들이 어떻게 절멸해 가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이제 타이든 필리핀이든 인도든, 시민들의 의지가 정치판에 투영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민들 스스로가 자각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부터 다시 출발해보자는 뜻을 담고 싶었다. “정치지도자들을 잘못 뽑아 시민들이 괴롭다.” 이와 같은 한탄만 하고 앉아 있지는 않겠다는 의식들이 아시아의 시민들 속에서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함께 전하면서.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아시아 네트워크 팀장

(사진/페인트 세례를 받는 에스트라다 대통령의 대형사진.시민들은 그에 대한 전면적 거부운동에 나섰다)
이 모두는 정치판의 혼란 탓이고, 정치판의 혼란은 ‘리더십’의 부재가 주범이다. “현 정부는 경제정책 실패로 침몰하고 말 것이다.” 96년 5월 당시 야당 총재였던 추안 릭 파이 현 타이 총리가 기자와 인터뷰에서 경제를 강조한 말이다. 1년 뒤인 97년 10월28일, 2번째의 총리 임기를 시작하기 꼭 2주일 전 그는 경제위기 문제를 화두로 삼은 기자와 인터뷰에서 정치를 강조했다. “현 상황은 특별한 경제정책보다 정치력을 발휘해야 할 때다.” 그리고 꼭 2년 만에 분노한 타이 시민들은 추안 총리를 최악의 정치가로 강등시켜버렸다. 당시 경제위기 돌파라는 기대를 한몸에 안고 출발했던 추안 총리, 그가 지녔던 ‘깨끗한 손’이나 ‘법대로’의 이미지 같은 걸 기억하는 시민들은 이제 더이상 아무도 없다. 그는 결국 정치고 경제고 무엇으로도 시민의 이익을 지켜내지 못한 채, ‘국제통화기금에 나라를 팔아먹은 신사’나 ‘느림보 정치가’ 정도로 기억될 모양이다. 이제 타이사회의 정치적 화두는 추안 총리를 떠났다. 그리고 내년 1월6일 총선을 겨냥한 선거열풍이 휩쓸고 다니는 가운데 차기총리로 주목받는 억만장자 사업가 탁신은 일찌감치 ‘돈정치’의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시민들은 극심한 정치적 환멸감에 빠져 있다. 필리핀으로 넘어가보면, 정치판은 말 그대로 점입가경이다. 대통령이란 자가 도박판의 뒷돈을 챙겨 국정을 혼란상태로 몰아넣은 경우는 보다보다 참 희한한 일을 보는 꼴이다. 영화배우 출신의 필리핀 대통령 에스트라다, 그는 말라카낭 대통령 집무실을 사설 사업장으로 만들며 출발부터 이권개입과 부정·부패를 양산하는 스캔들 대통령으로 시민들을 괴롭혀 왔던 인물이다. 최근 신 추기경과 아키노 전 대통령을 비롯한 필리핀의 명망가들이 하나같이 에스트라다 대통령의 사임을 촉구하는 가운데 시민들이 그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운동에 나서자, 이 ‘야바위 정치꾼’은 즉각 낡아빠진 구호를 빼내들고 맞장구를 치고 나왔다. “공산주의자들이 준동한다. 공산주의자들이 모든 시위의 배경이다.” 와히드… 훈센… 쿠마라퉁가… 김대중 웃기도 힘든 삼류 코미디정치가를 놓고 상원에서는 탄핵심사 일정을 잡아 새로운 국면으로 끌고 가고 있지만, 현재 시민들 사이에는 탄핵 결과와 상관없이 이 기회에 ‘새로운’ 정치구조를 만들자는 열망이 높아지고 있다. 1980년대 중반, 마르코스를 몰아냈던 그 뜨거운 심장과 눈물을 간직한 필리핀 시민들 속에서. 인도, 이 거대한 정치대국의 하루하루도 요즘 만만찮은 모양이다. 바지파이 총리의 연임이 결정되고 1년이 지난 현재, 인도 시민들의 심기는 몹시 뒤틀려 있다. 특히 카슈미르를 놓고 벌이는 지루한 대파키스탄전쟁과 극우적 성향으로 치닫고 있는 광적인 힌두민족주의 분위기에 시민들은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버린 상태다. 여기다 핵무기 제조를 위해 군사예산을 해마다 대폭 증액하는 바지파이 총리를 바라보는 절대 빈곤층 시민들의 배신감은 사회폭발 현상으로 이어질 충분한 조건이 된다고 전문가들은 말해왔다. 먹고사는 문제보다는 ‘자존심’을 놓고 사회적 연대를 발휘해 온 인도 시민들의 문화를 눈여겨본다면, 핵거래를 놓고 벌인 바지파이 총리의 줏대없는 ‘미국친교정책’이 인도 정치판을 뒤흔들어 놓은 가장 근본적인 출발이었다는 분석이 상당한 설득력으로 다가온다. 이런 가운데 인도 시민들은 이제 바지파이 총리의 사임을 말하기 시작했고, 공룡 같은 인도정치판은 서서히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는 중이다. 꼽아 본 세 나라말고도 현재 아시아 전역은 어디 할 곳 없이, 무능함과 부도덕이 노출된 국정 최고책임자들 탓으로 정치적 위기감이 팽배해 있다. 구강정치를 해왔던 인도네시아 와히드 대통령은 수하르토의 잔재가 모질게 남아 있는 사무실을 꿰찬 뒤 1년 만에 정치적 탈진상태에 빠졌고, 출발부터 궤변으로 시작한 일본의 모리 총리는 전통적인 모리배 정치로 일본정치의 후진성을 과시하며 시대를 거꾸로 돌려놓고 있다. 캄보디아의 훈센 총리는 완력정치로, 파키스탄의 페르베즈는 쿠데타정치로 각각 사회를 냉각시켜 왔다. 폭탄테러로 한쪽 눈을 잃은 스리랑카의 쿠마라퉁가 대통령은 지난한 내전 속에서 자신과 시민 모두를 희생시키는 불구정치를 심화시켰고, 이란의 하타미 대통령은 보수세력들에 밀려 실질적인 통치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흐느적거리는 모양새다. 아프가니스탄은 내전에 시달리며 20년이 넘도록 정치적 공백상태를 보여왔고,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이스라엘의 바라크 총리는 맞장정치로 돌파구를 찾다 결국 팔레스타인 시민들에 대한 가혹한 공격으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주특기인 반미정치로 자리를 지켜온 노회한 마하티르 총리도 말레이시아사회를 우울하게 만들어 놓기는 마찬가지다. ‘화끈함’을 기대했던 시민들의 바람을 저버린 김대중 정부도 임기 말 현상에 빠져 벌써 저마다 마무리 수읽기를 하고 있다는 참 난감한 소식이 외신들을 타고 있다. 시민들의 자각이 피어오른다 이 참담한 2000년 12월 아시아의 정치판을 바라보며, 아시아 네트워크는 아시아의 정치 최고책임자들에게 공개편지를 보내기로 했다. 그들이 이 편지를 읽을런지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아시아 시민들의 바람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짚어보며 아시아의 시민들끼리라도 그 문제점을 공유하자는 소중한 의미를 담았다. 아시아 네트워크는 대통령이나 총리들이 어떻게 절멸해 가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이제 타이든 필리핀이든 인도든, 시민들의 의지가 정치판에 투영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민들 스스로가 자각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부터 다시 출발해보자는 뜻을 담고 싶었다. “정치지도자들을 잘못 뽑아 시민들이 괴롭다.” 이와 같은 한탄만 하고 앉아 있지는 않겠다는 의식들이 아시아의 시민들 속에서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함께 전하면서.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아시아 네트워크 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