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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아무도 찍기 싫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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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2-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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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망쳤다면 정치라도, 정치가 안 된다면 선거라도 다잡고 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총리, 당신에게 <한겨레21>의 ‘아시아 네트워크’가 부탁한 공개편지를 쓸 만큼 내가 어리석다고 여겨본 적은 없습니다. 적어도 쓰레기통에 처박힐 편지를 쓰고 싶지는 않다는 뜻에서. 당신이 아다시피 우리 타이 정치에는 이런 공개편지와 같은 문화가 없었지요? 쓸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진지하게 읽어줄 만한 정치가들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더구나 내년 1월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추안 릭파이 총리 당신에게 공개 편지를 보낼 필요성을 느끼는 타이 시민들은 별로 없을 겁니다.

10바트중 3바트가 외국으로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도 드러났듯이 당신과 당신의 민주당이 승리하리라고 보는 이가 없기 때문이지요. 탐마삿대학의 이름난 사회학자 티라윳 분메 같은 이들은 당신의 현 집권 민주당이 차기총선에서 경쟁자인 타이락타이당의 1/3에도 못 미칠 것으로 예견할 정도니. 말하자면, 저질러놓고 떠나는 이를 붙들고 왈가왈부하기조차 싫다는 다분히 아시아적 정서가 저변에 깔려 있다고나 할까요.


뭘 더 말하리오. 지난 3년간의 국정운영 실패만으로 유명해진 총리, 인기없는 추안 릭파이 당신을. 바트화 폭락으로 경제위기가 발생하면서 아시아 전역으로 파장을 몰아가던 1997년, 한때 그래도 타이 시민들은 당신을 구원자로 여기긴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지원했던 그 시민들은 오늘날, 당신이 말 그대로 국제통화기금(IMF)의 조건에 ‘장님 이서하기 식’으로 나라를 팔아먹었다며 불만을 터뜨리고 있는데, 잘 들리긴 합니까?

지난 3년 동안 추안 릭파이 당신의 정부 아래서 시민들은 우리 경제가 독립성을 잃고 서양의 노예가 된 것으로 여겨왔습니다. 이 기간 동안 대형사업과 국영기업들조차 외국에 헐값으로 팔려나갔고, 결국 타이가 생산한 10바트 가운데 3바트는 외국으로 흘러가는 꼴이 되어버렸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3년 전에 1달러당 25바트였던 환율은 아직도 44바트에 머물러 있고 부동산은 반값으로 내돌려진 상태인데, 당신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요?

자, 여기 어느 누가 추안 릭파이 총리 당신을 차기선거에서 다시 승리자로 만들어주겠습니까? 이 길고 험한 터널의 끝은 아득하기만 한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차기선거에서 당신의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른 타이락타이당의 억만장자 총수 탁신 시나와트르는 벌써부터 돈으로 총리 사무실에 입성할 범죄자로 지목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돈, 돈, 돈, 많은 돈들이 뿌려지겠지요? 지금 시민들의 80%는 금권선거와 금권임명제 모두를 끝장내겠다고 애쓰고 있기는 합니다만, 한때 ‘깨끗한 손’으로 이름을 떨쳤던 당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군요. 떠나기 전에 ‘깨끗함’만이라도 보여주고 간다면, 그래도 우리는 당신을 기억하리오마는.

현재 시민들이 목격하고 있는 선거정치에 대한 환멸감은 일찍이 전례가 없었을 정도로 높아만가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당신도 아다시피 최근 역사학자와 지식인들은 심지어 1월6일 총선에서 ‘아무도 찍지 말자’는 사상 유례없는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정치판의 중심무대에 서 있는 총리, 당신은 지금 무엇을 궁리하고 있는지요? 시민들은 당신을 답답하게 여기며 진저리를 치고 있습니다. 해가 갈수록 선거정치의 타락상은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는 뜻이고, 그러다보니 현재 시민들은 직접민주제, 민중정치, 시민사회, 민주문화, 현장민주제 시민의식 같은 개념들을 신중하게 생각하는 중입니다. 총리, 당신은 듣고나 있습니까? 이런 개념들이 당신들 정치가들에게는 얼마나 무서운 말이란 걸 알고나 있습니까?

경제를 망쳤다면 정치라도, 정치에 수가 모자란다면 선거만이라도 다잡아놓고 떠나는 게 당신을 뽑아주었던 시민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는지요? 지금 좀더 많은 시민들은 일상 속에서 민주화의 조짐을 보고 싶어하고, 또 선거가 끝난 뒤에도 당신들 정치가들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면 새로운 결정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싶다는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대중에 기반을 둔 정치적 이념을 지닌 정당을 단 한번이라도 가져본 적이 있었습니까?” 이게 내가 추안 릭파이 총리 당신을 비롯한 모든 정치가들에게 보내는 공개편지의 처음이자 끝입니다. 결코 대중에 기반한 정당이 없었던 탓에 우리 정치가 금권에 휘둘렸고, 부자들과 힘을 지닌 이들이 정치를 독점해 왔다는 말입니다. 우리 시민들은 어디에 설까요?

대중에 기반한 정당이 없었던 탓에…

최근의 고통과 환멸감 속에서 시민들은 오직 미국과 유럽을 쳐다보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있습니다. 이건 미국과 유럽이 타이보다 멋진 정치제도를 지녔기 때문이 아니라, ‘우매한’ 타이처럼 그들도 똑같은 선거정치의 위기를 맞고 있는 탓입니다. 당신은 흐뭇해하고 있습니까? 이 세계적인 선거정치의 타락 속에서 외롭지 않다고 말입니다.

지금 타이를 비롯한 세계의 시민들은 이렇게 묻기 시작했습니다. “자본주의 대형 사업 이익의 성장과 맞설 현재의 선거정치는 터무니없이 바보스럽지 않느냐?”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어디에 어떻게 진짜 민주주의를 건설할 수 있을는지요?

자, 민주화를 말해왔던 추안 릭파이 총리, 당신은 대답해 보시구려. “타이 정치, 너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프라윗 로자나프룩(Pravit Rojanaphruk)/ <더 네이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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