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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80여년 전 일제의 9 · 11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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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7-2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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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한인 · 러시아인 빨치산이 일본계 주민 · 포로 700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니콜라예브스크 사건’의 교훈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미국의 부시 정권이 9·11 공격을 핑계로 오래 전부터 기획해온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점령에 나선 것은, 제국주의 역사상 새로운 일이 아니다.


가까이 한국 근대사를 생각해봐도, 일제가 임오군란·갑신정변·의병 전쟁 때 일어나곤 했던 일본 민간인 피살 사건들을 들어 ‘양민 보호를 위한 조선으로의 군사 진출 필요성’을 제기하지 않았던가? 가해자들이 피해자의 탈 쓰기를 좋아하는 것은 ‘역사의 법칙’ 중 하나인 셈이다.

‘시베리아 출병’을 둘러싼 상황

그러나 대중을 아무리 우민화해도 마취는 언젠가 풀리게 돼 있다. 의식이 있는 미국의 교양인 치고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뛰어든 것이 윌슨 대통령의 구호대로 “모든 민족에게 자결권을 주기 위하여”라고 그대로 믿는 사람이 과연 많을까? 참전을 비판하는 이들이 미 국내에서 ‘반전 선동가’로서 엄벌을 받았던 그 당시에, 미국인은 물론 조선의 3·1운동 지도자들까지도 ‘자결권’에 대한 윌슨의 궤변을 믿어버렸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데올로기적 마취의 효능이 결국 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의 선전적 마취가 풀린 뒤에 최소한의 양심을 가진 미국 사학자들이 이번의 ‘테러와의 전쟁’을 ‘자원 고갈 위기 초기의 자원 지대 선점 작전’쯤으로 명명하리라 확신한다.

‘혼란 방지 · 질서 회복’을 명분으로 시베리아로 출병한 일본군. 이라크의 민주 · 인권 확립을 위해 파병된 미군의 목적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제국 지배자들이 역사 공부를 좀더 했다면 과거의 사례를 통해서라도 오늘의 상황을 일찍 예견하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오늘과 상당한 흡사성을 보인 상황이 이미 80여년 전에 일어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1918~22년간 일제의 시베리아 출병, 그리고 그 당시로서 ‘9·11 사태’ 격이었던 1920년의 ‘니콜라예브스크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나에게는 이제 더 이상 제대로 된 적대자들이란 없다. (쿠바의) 카스트로나 김일성 따위를 취급하게 됐다.” 1990년대 초기 콜린 파월(현 미 국무장관)의 이 ‘명언’은 적대적 공생 관계를 이루었던 소련의 붕괴 이후에 존재의 명분을 잃을 뻔한 미 군산복합체의 위기감을 대변해준다. 이 위기감은 1994년의 대북 전쟁 도발이나 소말리아 침공, 유고슬라비아 폭격 등으로 표출됐지만 자원지대의 장기적 점령에 착수한 부시 집권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조금 가라앉은 듯했다.

승전국인 연합국쪽에 끼여든 일제가 큰 이득을 본 제1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인 1918년, 일군은 역시 존재 명분이 약화됨으로써 적잖은 위기감을 느꼈다. 독일은 패전으로 치닫고, 전통적인 경쟁자인 제정 러시아는 1917년의 혁명으로 망하고, 중국은 중앙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준(準)할거 상태에 빠진 상황에서 대륙에서 이렇다 할 만한 적은 안 보이기에 육군은 1918년 신청했던 예산 규모의 절반밖에 받아내지 못하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게다가 제1차 세계대전의 ‘전시 특수’로 급속히 산업화돼갔던 일본에서는 파업 참여 노동자들이 6만명(1917년)이나 되고, 오늘의 온건파 반세계화 운동가들을 방불케 하는 국제주의자·자유주의자들이 “군사주의 초월”을 외치는 등 규율 사회가 점차 위기로 접어들었다. 예산 욕심을 못 챙기는데다가 ‘국체를 모독하는 과격 사상’(내각 총리 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의 확산에 경각심을 일으키는 군벌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북부 사할린의 유전을 확보하라”

이러한 상황에서 ‘신(神)의 도움으로’(육군대신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1917년 혁명 이후의 내란으로, 일군이 옛날부터 호시탐탐해온 연해주·동부 시베리아는 열강 침탈의 대상이 됐다. 볼셰비즘을 압살하려 했던 연합국들이 먼저 나서서 일군의 파병을 촉구하다니 금상첨화가 아닌가? 결국 ‘혼란 방지·질서 회복’ 같은- ‘이라크 민주·인권 확립’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명분으로 1918년 8월2일 대규모 일군의 시베리아 출병은 결정됐다.

일제의 속뜻이야 “러시아 상황을 이용해서 국내 문제를 외부로 돌려야 한다”(대장대신 쇼다 가쯔에·勝田主計), “파병만 한다면 국민 여론은 당장 군사 정신으로 돌아올 것이다“(체신대신 덴 겐지로·田健治郞), “자원의 보고인 시베리아에 백만 대군을 보내서 장기적으로 지배해야 한다“(내무대신 고토 신베이·後藤新平) 등의 각료 발언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유전 약탈이 주목적인 이라크 침략과 흡사한 또 하나의 점이라면 그때 일제에게도 북부 사할린의 유전 확보가 중대한 관심사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곧 7만명의 대군을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시킨 일제의 기획은, 이라크 침략 기획만큼이나 처음부터 빗나갔다. 한창걸 등이 지휘하는 한인 부대를 포함한 빨치산들은 오늘의 이라크 무자헤딘만큼이나 일군을 괴롭힌데다가, 필요 없는 전쟁에서 공연히 죽기를 원할 리 없었던 빈민 출신의 졸병들은 항명·탈영·빨치산에게 귀순 사건을 잇달아 일으켰다. 파병하여 ‘애국주의’ 광풍을 부추겼음에도 불구하고, 1918년 8월의 쌀소동과 같은 대대적인 빈민 투쟁을 면치 못한 일본 국내에서도, 자유주의자의 파병무용론은 세를 얻어갔다.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명분이 필요했다. 그러기에 철병론이 고조에 달했던 1920년 초 일제의 선전이 길이길이 이용할 “니콜라예브스크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한자 표기로 ‘니강’(尼港)이라고 불리던 ‘니콜라예브스크’라는 아무르강 하구의 어항에서는 약 350명의 일본계 주민들의 어업 이권 독점 등이 일찍부터 한인·러시아계 빈민의 강력한 거부감을 일으켰고, 1918년 9월에 쳐들어온 일군의 총칼에 힘입은 반혁명 지역 정부의 ‘백색 테러’로 민심이 흉흉해졌다. 그리하여 1920년 2월 무정부주의적 경향을 지닌 23살의 어린 대장 트라피친 휘하의 빨치산 부대가 도시를 접수하자 과거의 권력자에 대한 보복이 이루어졌다. 일본 주둔군은 병사 수가 350명밖에 안 되는 관계로 트라피친의 2천명 부대의 도시 점거를 어찌할 수 없이 인정한 뒤에 계속 지원을 요청해도 지원도 후퇴 명령도 오지 않았다. 소수의 일본군과 일본계 주민을 그대로 남게 한 일군 본부의 속셈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 다음의 사건들이 잘 보여주었다.

문제의 빨치산 대장들 즉각 처형당해

누군가의 명령으로 일본 주둔군이 빨치산에 대한 승산이 없는 ‘자살 공격’을 벌였다가 트라피친에게 부상을 입힌 채 곧 패배를 당해 전원 포로 신세가 됐다. 그 뒤 블라디보스토크의 일군 본부에서 “트라피친 부대가 곧 일본의 끔찍한 보복을 당할 것”이라는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2년 동안의 항일전 끝에 반일 감정이 극에 달한데다 “잃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든 트라피친 휘하의 러시아인·조선인 빨치산들이 과연 어떻게 반응했겠는가? 일군의 대규모 공격이 임박한 가운데 니콜라예브스크를 빠져나온 트라피친 부대는, 도시를 떠나기 전에 약 700명에 이르는 일본계 주민·포로들을 잔혹하게 학살하고 말았다. 연해주의 모든 항일 투사들을 부끄럽게 만든 불명예스럽고 반인륜적인 ‘니콜라예브스크 사건’은 바로 이것이었다.

어떤 명분하에서도 민간인 학살을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 공산당 당국이 트라피친을 곧장 체포·재판·처형했으며, 트라피친과 함께 이 사건을 일으킨 한인 독립군 부대장 박병길도 한인운동가들에게 곧 처단되고 말았다. 트라피친의 범죄적 행각에 대해서 연해주 지역의 소비에트 정권은 일본쪽에 사과를 했다. 그러나 점령 지속의 명분이 오기를 고대했던 일제는, 이와 같은 처사에 만족을 표할 리 있었겠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기다렸듯이 보수 신문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공산주의적 야만인들의 만행’을 규탄했으며, 어용단체들이 주도하는 ‘궐기 대회’들이 광기를 부채질했다. “우리 국민의 피를 헛되이 하지 말라”는 언론의 주문을 받은 일군은 1920년 4월4~5일 소비에트 기관들과 한인들의 거류지를 공격해 약 5천명의 한인·러시아인을 잔혹하게 살해했다.

니콜라예브스크 사건이 한인 독립운동의 근거지인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新韓村)을 초토화할 명분이 된 셈이었다. 그렇게 한 뒤에는, 9·11 사건을 자원지대 점령의 명분으로 이용하는 미국과 다르지 않게 일제는 유전 지대인 북부 사할린의 ‘80년간 임차’를 제국 국민의 피의 대가로 요구했다. 일제 군벌들에게 애당초부터 ‘국민의 피’란 석유를 살 수 있는 하나의 카드로 보였던 셈이다.

그러나 ‘니콜라예브스크 사건’과 같은 대량학살 사건들이 일어날 수 있는 여건을 조장하는 고도의 공작을 포함한 일제의 ‘시베리아 출병’은 과연 어떻게 끝났는가? 결국 빨치산과 극동공화국이라는 친소비에트 지역 정권 부대들의 집요한 공격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된 일제는 1922년 10월25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남은 군대를 철수함으로써 침략을 마감하고 말았다. 전사자 3천명을 내고 10억엔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낭비하고서도, 명예도 실익도 얻지 못했다. ‘니콜라예브스크 사건’이라는 ‘다이쇼(大正) 시대의 9·11’을 우파 언론들이 계속 이용했음에도 ‘바이칼호까지 제국 영역 확장’이나 ‘북부 사할린 경영’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 제국의 지배자들도 이와 같은 역사의 교훈을 참고해 침략의 만능에 대한 맹신을 버렸으면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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