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침공으로 분단된 키프로스인들의 고통… 통일방안에 대한 견해차로 분단 장기화
자신을 ‘자유로운 죄수’라고 밝힌 야니누(73)는 25년 전 키프로스를 떠나 현재 아테네에 거주하는 난민의 한 사람이다. 같은 언어를 쓰고 문화와 종교가 같은 그리스에 살고 있지만 전혀 마음이 편치 않다. “나이가 드니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지면서 우울해지는 날이 늘어만 간다”면서 “죽기 전에 고향에 돌아가 부모님 묘라도 찾아뵈었으면…”하는 바람을 간절히 표현한다. 그는 또 “25년 동안 북키프로스에 있는 고향을 한번도 가보지 못했다. 외국인들은 마음대로 드나드는데 우리만 갈 수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남의 일 같지 않은 분단의 아픔
지나온 삶에 대해 묻자 야니누는 “아테네에서 의과대학을 갓 졸업한 장남의 결혼식준비로 한창 부산하던 중 1974년 7월20일 새벽에 갑자기 터키군대가 들이닥쳤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당시 고향인 카이레니아의 수도사업소 소장으로 일하던 그는 군복무중인 둘째아들의 생사가 걱정이 되어 피난도 단념하고 맨몸으로 부인과 딸을 데리고 다른 마을로 잠시 옮겼다. 외국인들이 거주하던 곳이라 안전할 것으로 믿었으나 곧 터키군에 연행돼 눈을 가리고 밧줄에 손발이 묶인 채 어디론가 끌려갔다. 건강이 너무 나빠 바로 석방이 되어 고향 마을에 머물고 있다가 다시 남자라는 이유로 터키군에 연행돼 약 한달 동안 전쟁포로로 감옥에서 살았다. 석방된 뒤 그는 바로 가족과 함께 아테네로 떠났다. 하루아침에 집과 직장, 그리고 친지들을 잃어버린 그는 인생을 다시 타향에서 시작해야만 했다. 그는 자신의 결혼식 사진을 내보이며 “대부분의 결혼축하객들이 터키사람들”임을 가리키면서 당시 키프로스에서 그리스인과 터키인이 평화롭게 공존하던 시절을 잊지 못했다.
로도시아(37)는 당시 열한살의 초등학생이었다. 아버지는 담배농사를 짓던 농부였다. 어느 날, 고향인 아기아 트리아다라는 작은 시골마을에 터키군이 들어오면서 가족들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아버지가 터키군에 끌려가서 행방도 모른 채 두달 이상이나 감옥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뒤 남쪽으로 피난와서는 수천명의 난민들과 텐트에서 2년 이상 생활해야 했다. 그뒤 부모는 자녀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호텔과 식당에서 청소나 접시닦이 일을 해야 했다. 그는 “지금도 고모가족은 북키프로스에 남아 있지만 25년 동안 한번도 만난 적이 없으며 부모님은 두고온 친척과 고향집 때문에 마음고생이 여간 아니다. 키프로스가 통일이 되어 하루빨리 내가 뛰놀던 학교를 다시 가보기를 소원한다”고 말했다. 지중해 연안의 작은 섬 키프로스는 군사전략적 가치로 말미암아 언제나 강대국의 점령지가 되어왔다. 터키-오토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즉시 영국의 식민지가 되어 1955년까지 억압에 시달렸다. 독립한 이후에도 계속 영국의 군사기지는 남게 되고 이는 정치적 갈등의 씨앗이 된다. 1974년 6월 당시 미국의 군사기지 건설 제안을 반대하고, 남아 있던 영국의 군사기지마저 철폐시키려던 마카리오스 정부가 쿠데타로 무너지자, 터키는 이를 빌미로 당시 18%의 인구를 차지하던 터키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1974년 7월20일 대규모 군사작전을 벌여 약 40%의 섬을 차지하게 된다. 이로 인해 1700여명의 키프로스 그리스인들이 의문의 실종을 당하고 20만명 이상이 피난민으로 북키프로스를 떠나 각지로 흩어졌다. 이후 키프로스는 터키가 지배하고 있는 북키프로스와 그리스인이 대부분인 남키프로스로 분단된 채 25년간 군사적 대립상태가 지속돼왔으며 ‘지중해의 화약고’로 불리며 그리스와 터키 사이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변수로 작용해왔다. 1974년 이후 터키점령지역인 북키프로스는 지금까지 터키를 제외하고서는 공식국가로 인정받지 못한 상태에 있으며 유엔은 키프로스에서 하나의 정부만을 인정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킨 바 있다. “배후는 미국이다!”
모든 키프로스인들은 비극적 분단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그 증거로 당시 터키침공이 일어난 뒤 미국이 터키의 군사기지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그리고 영국도 자신의 군사기지를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터키의 군사작전을 배후에서 지원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지난 11월10일 제네바에서 유엔 중재로 열린 ‘남북키프로스정상회담’은 아무런 성과없이 서로의 입장만 확인한 채 막을 내렸다. 지난 25년 동안 줄기차게 유엔 중재로 회담이 오고갔지만 여전히 줄다리기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이번 정상회담은 지난 9월 뉴욕에서 열린 밀레니엄정상회담에서 코피 아난이 두 지도자와 접촉을 갖고 키프로스 통일의 중재의향을 밝히면서 성사된 것이다. 이 회담에서 터키는 분리국가로 북키프로스를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며 연합수준의 통일방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남키프로스는 한국가연방제통일안을 고수했다. 다음날 터키 총리 불렌트 에제비트는 앙카라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터키는 유엔사무총장의 생각인 ‘한 국가 한 정부’를 받아들일 수 없으며 ‘연합’을 원한다”는 공식입장을 밝혔다.
아테네=하영식 통신원youngsig@otenet.gr

(사진/74년 당시 실종된 사람은 약1700명에 이른다.실종된 가족의 사진을 들고 시위하는 키프로스 그리스인들)

(사진/1996년에 일어난 양쪽간의 분쟁.이날 키프로스 그리스인이 터키경찰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로도시아(37)는 당시 열한살의 초등학생이었다. 아버지는 담배농사를 짓던 농부였다. 어느 날, 고향인 아기아 트리아다라는 작은 시골마을에 터키군이 들어오면서 가족들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아버지가 터키군에 끌려가서 행방도 모른 채 두달 이상이나 감옥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뒤 남쪽으로 피난와서는 수천명의 난민들과 텐트에서 2년 이상 생활해야 했다. 그뒤 부모는 자녀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호텔과 식당에서 청소나 접시닦이 일을 해야 했다. 그는 “지금도 고모가족은 북키프로스에 남아 있지만 25년 동안 한번도 만난 적이 없으며 부모님은 두고온 친척과 고향집 때문에 마음고생이 여간 아니다. 키프로스가 통일이 되어 하루빨리 내가 뛰놀던 학교를 다시 가보기를 소원한다”고 말했다. 지중해 연안의 작은 섬 키프로스는 군사전략적 가치로 말미암아 언제나 강대국의 점령지가 되어왔다. 터키-오토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즉시 영국의 식민지가 되어 1955년까지 억압에 시달렸다. 독립한 이후에도 계속 영국의 군사기지는 남게 되고 이는 정치적 갈등의 씨앗이 된다. 1974년 6월 당시 미국의 군사기지 건설 제안을 반대하고, 남아 있던 영국의 군사기지마저 철폐시키려던 마카리오스 정부가 쿠데타로 무너지자, 터키는 이를 빌미로 당시 18%의 인구를 차지하던 터키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1974년 7월20일 대규모 군사작전을 벌여 약 40%의 섬을 차지하게 된다. 이로 인해 1700여명의 키프로스 그리스인들이 의문의 실종을 당하고 20만명 이상이 피난민으로 북키프로스를 떠나 각지로 흩어졌다. 이후 키프로스는 터키가 지배하고 있는 북키프로스와 그리스인이 대부분인 남키프로스로 분단된 채 25년간 군사적 대립상태가 지속돼왔으며 ‘지중해의 화약고’로 불리며 그리스와 터키 사이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변수로 작용해왔다. 1974년 이후 터키점령지역인 북키프로스는 지금까지 터키를 제외하고서는 공식국가로 인정받지 못한 상태에 있으며 유엔은 키프로스에서 하나의 정부만을 인정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킨 바 있다. “배후는 미국이다!”

(사진/74년 당시 터키군이 침공해왔을 때 두려움에 떨며 도망하는 키프로스 여성들)
인터뷰/ 미할리스 파파페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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