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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배반’ 속에서의 게릴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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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1-2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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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티모르 독립지도자 사나나 구스마오의 자전적 수기 III- 최고지휘관에 오르다

인도네시아군의 파상공격을 받은 전선들을 둘러보았다.

공습, 폭발, 죽음, 피, 연기, 먼지… 그리고 아이들에게 줄 물 한모금을 얻고자 우물가에 늘어선 끝없는 행렬들. 그 사람들이 숨을 만한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상하게도 썩지 않고 말라버리는 시체들이 온 천지에 널렸고, 이젠 울부짖는 이도 없다. 따뜻한 밤이 계속되었고 땅과 바다로부터 퍼부어대는 포격이 두려웠던지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전투기들이 하루종일 죽음의 씨를 뿌려대는 탓에 우리는 마테비안산의 맑은 하늘 아래서 숨이 막혀 헐떡거리고 있었다.

만약 투항하기를 원한다면…


사람들은 더이상 피할 곳도 없었다. 우린 포위당했다. 결코 가능성은 없지만 나는 두 그룹의 동지들을 내려보내 적의 포위망을 뚫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러나 이틀 뒤,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마테비안산을 포기하고 주민들을 적에게 투항시킬 수밖에 없다는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기 위해 회의를 열었다. 바로 그 순간 전투기들이 회의장을 공습했다. 짧은 순간 죽음의 전과정을 보았고 바로 몇 미터 앞에서 터지는 폭탄은 우리를 귀머거리로 만들어 버렸다. 불에 탄 살점들은 돌과 반죽이 되어 뒹굴었고 동지들의 몸을 잘라버린 날카로운 쇳조각 파편들은 나무둥지에 꽂혔다. 나는 공습의 가공할 공포에 떨고 있는 동지들에게 다른 동지들을 찾으라며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나는 이 사건 이후 모든 전선과 전투에서 사려깊은 태도를 지니게 되었다.

1978년 11월22일 밤 11시. 우리는 마테비안산 서부지역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이날부터 조직을 재정비해서 소규모 그룹으로 세분한 뒤, 동지들에게 모두 군복을 벗어던지고 무기를 숨긴 채 서로 접선하면서 동향을 파악하고 지역주민들을 조직하자는 지령을 내렸다. 물론 나는 비밀접선에 앞장섰다.

이렇게 해서 인도네시아의 침공 3주년이 되던 날 밤, 우리는 평원을 가로질러 적들이 진주한 지역에서 모두 함께 만날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그로부터 한달반 만에 자유롭게 이 지역을 돌아다니며 주민들과 접선하기 시작했다. 나는 레지스탕스 조직구조의 기본을 갖추면서 게릴라전의 새로운 방식을 터득했다. 그리고 서부지역을 다니며 생존한 지휘관들을 만나 새로운 조직건설을 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얼마 뒤, 일부 지휘관들의 적전투항과 배반으로 결국 우리가 대량학살당하게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이 소식을 들으면서 혼란에 휩싸였고 정신이 뒤흔들렸다. 정신을 차린 나는 기간요원들을 다시 설득했다. “만약 적에게 투항하기를 원한다면 인정할 테니 최소한 동지들의 등뒤에서 하지는 마라.” 그리고 또 이렇게 말했다. “우리와 상의해서 작전용 무기들은 남겨두고 떠나라.”

이 대화는 모두에게 긴장감을 주면서 특히 기간요원들의 애국적 열정을 점검하고 여전히 항쟁을 원하는 동지들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결국 도덕성의 승리였다. 나는 이때부터 동지들의 결연한 투쟁의지에 대해 진정으로 확신하기 시작했다. 이제 동지들 스스로가 투항에 대해 누구든 말조차 꺼낼 수 없도록 서로 다짐하기 시작했다.

이 일이 있은 뒤, 나는 레지스탕스 간부를 찾기 위해 기간요원들을 영토의 심장부로 파견했다. 그리고 나는 마테비안의 서부지역으로부터 돌아와서 폐허의 고요만 감도는 산으로 올라갔다. 그사이 무성히 자란 잡초들은 오솔길을 모조리 뒤덮어버렸고, 숨길려고 애쓴 양배추와 감자들만이 이전에 사람이 살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모든 산등성이와 돌부리마다 그리고 시냇물과 나무마다 치떨리는 고통을 담고 있었다. 나를 비롯한 일곱 동지들은 말을 잊은 채 행군했다. 모든 풍경들이 한달 전 우리 마음으로 급히 파고들었다. 우린 죽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그 소리는 우리가 전통을 지닌 성소에 들어갔을 때 경이로운 감동을 창조했던 소리와 같았다. 마테비안은 동부지역의 모든 주민들이 적들의 가공할 공격으로 소개당했을 때, 우리 모두의 거룩한 집이었다.

굶주림 속에 말라리아에 걸리다

(사진/게릴라 활동을 하다 92년 인도네시아 정부군에 체포당했던 구스마오는 99년까지 자카르타의 감옥에 감금돼 있었다.98년 어느 날, 간수와 동료 수감자들과 함께)
여기서부터 나는 동지들을 섬의 중심부로 파견해서 살아남은 동지들을 찾도록 하는 한편 동부지역의 재조직회의를 통해 새로운 동지를 데려왔다. 이런 강행군을 하는 동안 우리는 식량이 고갈되었고 나는 병들어 쇠약해졌다. 그사이 2개 소대가 탈주해버렸다. 나는 자원자들을 소집했고 우리의 행군은 계속됐다. 우리는 행군 내내 모든 지역이 어처구니없을 만큼 황폐해진 사실을 목격했다. 동부지역에 도착한 우리는 이내 먹을 것을 찾아나섰으나 눈에 띄는 것은 오직 유카립투스나무뿐이었고 우리 손에는 10개 남짓한 감자만이 담겨온 결실없는 탐색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큰소리치면서 장난 반 사냥을 나간 한 지휘관이 돌아올 때 들고 온 것은 고작 바나나 줄기뿐이었다. “돼지도 먹지 않을 이 껄쭉한 것을 계속 먹는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자살하자는 것인데….” 시험삼아 내가 맨먼저 쓴 줄기를 먹으면서 그에게 말했고 우리는 웃음으로 배고픔의 고통을 삭여나갔다.

여기서 우리는 회의를 통해 군사작전지역을 결정했고 레지스탕스군의 활동지역을 재조정했다. 이 무렵 나는 만성 말라리아에 걸려 완전히 탈진한 상태로 하루에 3번은 혼절할 정도였다. 턱과 목이 꼬일 만큼 경련을 일으켰고 악독한 고열이 뒤따랐다. 매번 증상이 나를 공격하기 직전에는 배꼽의 피부가 터질 만큼 배가 뒤틀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말라리아 치료약을 구해와서 완전히 회복될 무렵, 밀선들로부터 여러 가지 혼란스런 정보들이 날아들었다. “딜리 부근에는 우리 부대보다 더 큰 부대가 생존해 있다.” “우리의 최고지도자가 사망했고 대신 다른 지휘관이 남중부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모순된 정보들이었다.

그러나 이 혼란스런 정보들 속에서 나는 상황의 변화를 감지했고 즉각 딜리의 선들과 접촉하면서 정치·전략적 변화에 대비한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한편 우리는 같은 시점에 적들의 공격을 받아 세개의 그룹들이 파괴당한 채 겨우 총만 들고 빠져나오는 위기를 맞았다. 나는 생존자들을 규합해 지역 재배치를 하는 과정에 다른 생존부대를 발견했고 그들을 통합한 뒤, 게릴라와 일시적인 해방구 주민들 사이에 내밀한 동맹을 맺고 레지스탕스 조직의 기본토대를 재건설해 나갔다.

1980년 5월, 나는 60여명의 무장 동지들과 함께 중동부지역을 향해 진격해 갔다. 섬의 동부에서 서부지역 사이의 모든 조직원들이 안전하게 화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계획을 실행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 장정에서 나는 한 노인을 만났다. 그는 울면서 나를 포옹했다. “너희들은 모두 우리 아들들이야. 계속 저항하게. 결코 항복하지 말게. 너희들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야.” 우리는 이 낯선 노인 앞에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노라 맹세했다. 이때부터 우리는 ‘극기’, ‘규율’, ‘단결’을 강조하는 티모르독립혁명전선(Falinti) 전사들 속에서 본보기가 됐다. 그리고 그 노인 앞에서 맹세했던 그날의 동지들은 거의 모두가 강렬하게 전사했다.

한 노인과의 만남

이 무렵부터 우리는 투쟁조직회의 재건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는 투쟁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 뒤, 일부 동지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그들의 조언과 전망을 들었다. “우리는 당신이 결정한 그 어떤 것이든 지원할 수 있다.” 동지들은 나의 손을 잡았고, 나는 울었다. 즉시 무거운 책임감이 내 어깨를 짓눌러왔다. 내가 게릴라 전사들의 최고지휘관이 되는 순간이었다. 동지들을 위한 나의 결심과 말 한마니 한마디가 모두 새롭고 중요하게 느껴졌다. 조국을 위해 죽겠다고 태어났던 용감하고 이기심 없는 동지들은 이때부터 나의 지휘 아래 동지애를 바탕으로 양심을 바쳐 스스로 임무를 다해주었다.

“마운 부트 아세, 아미 사에, 마운 부투 툰, 아미 툰.”(형이 오르면 우리도 오르고, 형이 내려오면 우리도 내려온다) 이 단순한 책무의 개념 하나로 우리는 대를 이어 생명을 바친다. 그리고 결코 배반하지 않았다.

나는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혁명의 개념이 필요했고, 전쟁 속에서 공부해 나갔다. 얼마 뒤 섬 전역의 항쟁 지휘관들과 기간요원들이 회의 참석을 위해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경례에 나는 놀랐다. 동지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를 완전히 바꾼 사실에 나는 슬펐다. 존경했던 동지애를 넘어 그들은 나에게 거리를 지켰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형제들이 나를 포기한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동지들에게 울면서 부탁했다. “나에 대한 호의를 열정의 원천인 내 영혼에 심지 말아달라. 티모르독립혁명전선의 지도자로서 사령관으로서 흡족해 하면서 내 정신에 자만심을 불붙이지 않게 도와달라”고. <계속>

사나나 구스마오/ 티모르항쟁민족회의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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