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임안은 부결됐으나 모리 지지율은 더 떨어져…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잇단 무당파 당선
일본 정계개편 드라마의 막은 올리기 무섭게 다시 내려졌다. 찬성 190 대 반대 237. 자민당 반란의 주역들이 모두 표결에 불참한, 모리 내각 불신임 표결 결과이다. 진검승부를 기대했던 많은 관객은 주인공들이 등장도 하지 않은 빈 무대를 향해 비난을 퍼부었다. 이번 ‘쿠데타’의 주인공인 가토 고이치(61) 자민당 전 간사장은 고개를 떨궜고, 그의 오랜 라이벌인 모리 총리는 표정관리 하기에 바빴다.
이번 표결의 승리를 가토가 자신했던 것은 모리내각에 대한 반대여론 때문만은 아니다. 자파 의원 45명과 그를 지지한 야마사키파를 합쳐 60명 가운데 50명 정도만 불신임안에 찬성한다면, 야당 중의원 190석을 보태 과반수(240석)를 넘길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자민당 최대 파벌인 하시모토파(전 오부치파, 60석)에 이어 두 번째 파벌을 이끌고 있는 가토로서는 충분히 승산있는 싸움이라고 본 것이다.
물론 하시모토파를 비롯한 주류파의 응전도 만만치 않았다. 주류파의 선봉장은 노나카 히로무 간사장. 이번 모리내각 불신임안 부결에 혁혁한 공을 세운 그가 연 첫 포문은 가토와 야마사키를 제명처분하겠다는 으름장이었다. 이같은 협박은 양 파벌에 속해 있는 다른 의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만일 불신임안에 찬성하거나 표결에 불참할 경우, 자신의 “정치 생명을 걸고” 반드시 제명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노나카의 협박은 가토파와 야마사키파 소속 의원들을 흔들어대기에 충분했다.
주류파 협박에 굴복은 했으나…
실제로 가토에게 파벌을 물려준 미야자와 기이치 대장상을 비롯해 이케다 유키히고 전 외상 등 중진 10여명은 가토의 불신임 노선에 반대입장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물론 소장파 10여명은 결연했다. 특히 나카다니 겐 자치성 정무차관은 사표까지 내고 결전에 임했지만, 대세를 뒤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표결 직전에 이르러 찬성표를 던지기로 한 가토파 의원은 실제 3분의 1 선에 불과했다. 패배는 자명해졌고, 남은 것은 이제 퇴각뿐이었다. 그가 택한 퇴각 노선은 불신임 표결불참. 그는 표결 국회가 열리기 직전에 가진 자파 총회에서 “혼자라도 가서 찬성표를 던지겠다”고 했지만, 소속 의원들은 그를 뜯어말렸다. 그의 눈에도, 그리고 소속 의원들의 눈에도 눈물이 글썽거렸다. 자민당 주류의 높은 벽 앞에 좌초해 버리고 만 스스로에 대한 회한의 눈물이었다. 가토의 이같은 무책임한 항복선언에 누구보다 가장 실망한 것은, 물론 가토의 반란에 가장 큰 기대를 걸었던 제1야당인 민주당과 그 밖의 다른 야당들이었다. “가토는 남자도 아니다.” “자민당은 원래 그런 당이다”라며 그들은 일제히 비난을 쏟아부었다. 여론도 마찬가지였다. <아사히 신문>은 “가토, 한심하군요”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고, 가토파의 사무실엔 “유권자에 대한 배신” 등의 항의전화가 빗발쳤다. “불신임에 찬성표를 찍겠다”는 자신의 말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한 이른바 가토의 ‘유언무행’을 집중성토한 것이다. 참의원 선거 때 보자! 그가 반란에 실패한 이유로는 주류파인 노나카 간사장의 제명 엄포로 흔들리는 자파 의원들을 수습하려는 아무런 대응책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절차상 제명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식의 사실상 무대응으로 일관한 그의 작전명령 결과는 결국 분열로 인한 자멸뿐이었다. 또다른 원인으로는 리더십과 결단력 부족을 꼽는다. 가토의 정치스타일은 한마디로 안전 제일주의. 정책능력을 의심받고 있는 모리와 달리, 외교관 출신인 탓에 외교와 경제 정책에 밝긴 하지만, 정치스타일은 지나치게 신중해서 우유부단하기까지 하다는 평을 듣곤 한다. 자신의 정치 생명까지 걸어야 하는 이번 거사는 처음부터 그의 정치스타일과 어울리지 않는 행보였다는 지적도 많다. ‘가토 쿠데타’의 진압은 끝났다. 그러나 그 여진마저 끝난 것은 아니다. 불신임 표결 직후 노나카 간사장은 “이번 불신임안 부결은 모리 총리에 대한 신임이 아니다”라는 발언을 반복했다. 지지율 10%대에다 상처투성이인 모리 총리로는 앞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판단을 자민당 최대파벌인 하시모토파가 내린 셈이다. 내년 6월에 있을 참의원 선거를 현 모리내각으로 치른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따라서 내년 9월로 예정되어 있는 자민당 총재선거가 앞당겨 실시될 가능성이 높다. 내년 4월 전당대회에서 함께 치러질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불신임을 벗어난 모리의 후임도 벌써부터 거론된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후생상과 소수파벌 회장인 고노 요헤이 외상, 고무라 마사히코 전 외상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가장 큰 고민은 반란을 일으킨 가토파와 이에 동조한 야마사키파에 대한 처리문제이다. 다시 이들을 껴안지 않으면 자칫 자민당이 분열되고, 그렇게 되면 지난 1993년 55년 자민당 집권체제가 무너졌던 악몽이 되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1993년 미야자와 내각 불신임안 표결로 당이 분열되는 바람에 당의 중진들이 대거 탈당, 자민당이 야당으로까지 전락했던 뼈아픈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들을 다시 껴안지 않을 수 없다. 노나카 간사장이 표결에 불참하거나 찬성표를 던지면 탈당 혹은 제명처분하겠다는 엄포를 사실상 철회한 것도, 이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선 안 된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상황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그러나 자민당이 아니다. 이번 가토의 쿠데타 명분이 10%대의 모리 지지율이었던 것처럼, 상황 반전의 키를 쥐고 있는 것은 여론이다. 여론의 추이에 따라서는 정계개편의 가능성이 계속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불신임 부결 처리 뒤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고, 민심은 내년 6월로 예정된 참의원 선거를 벼르고 있다. 민심의 자민당 이반 현상은 사실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1993년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한 자민당은 이후 줄곧 연립정권의 형태를 띠지 않고서는 집권이 힘들어졌다. 그러나 자민당 이반 현상은 최근에 들어 부쩍 그 강도가 더해졌다. 그같은 현상은 지난 10월15일에 실시된 나가노현 지사 선거에서 잘 드러난다. 자민당을 비롯한 기존 정당과 자치단체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부지사 출신의 이케다 후미타카를 누르고, 작가 출신의 다나카 야스오 후보가 당선되었다. 몇몇 경제계와 문화계 인사의 추천을 받아 뒤늦게 선거에 뛰어들었지만, 결과는 11만표차의 압승이었다. 인터넷으로 무장한 무당파의 승리였던 것이다. 지난 6월 선거에서도 그랬지만, 원래 무당파는 주로 도시에서 그 위력을 과시해왔다. 그러나 이제 무당파 바람이 토건(土建) 정당인 자민당의 텃밭 농·어촌에까지 불어닥친 것이다. 지방 곳곳에서 조용한 반란
불신임 표결 전날 실시된, 역시 자민당 표밭인 도치키현 지사 선거에서도 이변은 계속되었다. 무소속 후쿠다 오키오(52) 후보가 자민당과 민주당을 비롯한 6개 정당의 추천을 받은 와타나베 후미오 현 지사를 누르고 승리했다. 기존 정당과 조직표에 대한 자원봉사자들을 중심으로 한 ‘조용한 저항’이 5선 연임을 노리고 있던 와타나베 현 지사를 침몰시킨 것이다.
문제는 이같은 반자민당 현상이 지방 광역자치단체장 선거, 중의원 보궐선거 할 것 없이, 도시와 지방을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데 있다. 지난 10월22일 실시된 도쿄21구 중의원 보궐선거도 그 한 예이다. 보궐선거에서 시민단체 출신의 여성 후보인 가와다 에스코는 자민당을 비롯한 3개 정당이 공천한 후보를 모두 물리치고 의회에 첫 입성을 하게 됐다. 도쿄 에이즈 소송 원고단의 부대표를 맡았던 그는 ‘무당파의 대표’라는 간판을 걸고, 자민당과 기성정당의 ‘구태의연함’에 맹비난을 가한 결과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한달 남짓한 기간 동안 무려 세곳에서 나타난 무당파의 승리는 내년 6월로 예정된 참의원 선거가 자민당 심판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민심이 자민당에 등을 돌리게 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물론 ‘일본인 납치의혹 제3국 처리방안’을 둘러싼 모리 총리의 잇단 실언, 지난달 26일 섹스 스캔들과 우익단체와의 잇단 거래의혹에 따른 나카가와 관방장관의 사임 등이다.
그러나 민심 이탈의 좀더 근본적인 이유는, 국가자산을 마구 낭비하는 바람에 재정적자가 세계 최대 규모에 달한 상태에서도, 정치가들은 여전히 자신의 표밭 관리에만 신경쓰고 있기 때문이다. 90년대 초 몰아닥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물결 속에서, 기존의 정치-경제 시스템으로는 더이상 살아남기 힘든 상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 체질을 바꾸려하지 않는 정치에 대해, 민심은 ‘무당파’라는 이름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 ‘쿠데타’의 주역인 가토는 정책통답게 이같은 변화를 예민한 후각으로 감지해냈다. 거사를 시작하면서 가토는 그의 홈페이지 첫머리에 “개혁은 정치가만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스스로 그 필요성을 자각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내용을 적어 놓았다. ‘보수본류’를 자임하는 그였지만 50%가 넘는 국민들이 그의 행동을 지지해준 것은 그에게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자신의 말을 행동으로 보여주지 못했다. 민의를 끝내 신뢰하지 못한 것이다. 정치가는 언제나 유권자의 심판이 지나고나서야 그 민의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일까.
도쿄=신명직 통신원mjshin59@hotmail.com

(사진/“패배했으나 끝은 아니다” 가토 고이치 자민당 전 간사장이 고개를 떨구고 표결 불참의사를 밝히고 있다)
실제로 가토에게 파벌을 물려준 미야자와 기이치 대장상을 비롯해 이케다 유키히고 전 외상 등 중진 10여명은 가토의 불신임 노선에 반대입장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물론 소장파 10여명은 결연했다. 특히 나카다니 겐 자치성 정무차관은 사표까지 내고 결전에 임했지만, 대세를 뒤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표결 직전에 이르러 찬성표를 던지기로 한 가토파 의원은 실제 3분의 1 선에 불과했다. 패배는 자명해졌고, 남은 것은 이제 퇴각뿐이었다. 그가 택한 퇴각 노선은 불신임 표결불참. 그는 표결 국회가 열리기 직전에 가진 자파 총회에서 “혼자라도 가서 찬성표를 던지겠다”고 했지만, 소속 의원들은 그를 뜯어말렸다. 그의 눈에도, 그리고 소속 의원들의 눈에도 눈물이 글썽거렸다. 자민당 주류의 높은 벽 앞에 좌초해 버리고 만 스스로에 대한 회한의 눈물이었다. 가토의 이같은 무책임한 항복선언에 누구보다 가장 실망한 것은, 물론 가토의 반란에 가장 큰 기대를 걸었던 제1야당인 민주당과 그 밖의 다른 야당들이었다. “가토는 남자도 아니다.” “자민당은 원래 그런 당이다”라며 그들은 일제히 비난을 쏟아부었다. 여론도 마찬가지였다. <아사히 신문>은 “가토, 한심하군요”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고, 가토파의 사무실엔 “유권자에 대한 배신” 등의 항의전화가 빗발쳤다. “불신임에 찬성표를 찍겠다”는 자신의 말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한 이른바 가토의 ‘유언무행’을 집중성토한 것이다. 참의원 선거 때 보자! 그가 반란에 실패한 이유로는 주류파인 노나카 간사장의 제명 엄포로 흔들리는 자파 의원들을 수습하려는 아무런 대응책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절차상 제명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식의 사실상 무대응으로 일관한 그의 작전명령 결과는 결국 분열로 인한 자멸뿐이었다. 또다른 원인으로는 리더십과 결단력 부족을 꼽는다. 가토의 정치스타일은 한마디로 안전 제일주의. 정책능력을 의심받고 있는 모리와 달리, 외교관 출신인 탓에 외교와 경제 정책에 밝긴 하지만, 정치스타일은 지나치게 신중해서 우유부단하기까지 하다는 평을 듣곤 한다. 자신의 정치 생명까지 걸어야 하는 이번 거사는 처음부터 그의 정치스타일과 어울리지 않는 행보였다는 지적도 많다. ‘가토 쿠데타’의 진압은 끝났다. 그러나 그 여진마저 끝난 것은 아니다. 불신임 표결 직후 노나카 간사장은 “이번 불신임안 부결은 모리 총리에 대한 신임이 아니다”라는 발언을 반복했다. 지지율 10%대에다 상처투성이인 모리 총리로는 앞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판단을 자민당 최대파벌인 하시모토파가 내린 셈이다. 내년 6월에 있을 참의원 선거를 현 모리내각으로 치른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따라서 내년 9월로 예정되어 있는 자민당 총재선거가 앞당겨 실시될 가능성이 높다. 내년 4월 전당대회에서 함께 치러질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불신임을 벗어난 모리의 후임도 벌써부터 거론된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후생상과 소수파벌 회장인 고노 요헤이 외상, 고무라 마사히코 전 외상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가장 큰 고민은 반란을 일으킨 가토파와 이에 동조한 야마사키파에 대한 처리문제이다. 다시 이들을 껴안지 않으면 자칫 자민당이 분열되고, 그렇게 되면 지난 1993년 55년 자민당 집권체제가 무너졌던 악몽이 되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1993년 미야자와 내각 불신임안 표결로 당이 분열되는 바람에 당의 중진들이 대거 탈당, 자민당이 야당으로까지 전락했던 뼈아픈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들을 다시 껴안지 않을 수 없다. 노나카 간사장이 표결에 불참하거나 찬성표를 던지면 탈당 혹은 제명처분하겠다는 엄포를 사실상 철회한 것도, 이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선 안 된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상황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그러나 자민당이 아니다. 이번 가토의 쿠데타 명분이 10%대의 모리 지지율이었던 것처럼, 상황 반전의 키를 쥐고 있는 것은 여론이다. 여론의 추이에 따라서는 정계개편의 가능성이 계속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불신임 부결 처리 뒤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고, 민심은 내년 6월로 예정된 참의원 선거를 벼르고 있다. 민심의 자민당 이반 현상은 사실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1993년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한 자민당은 이후 줄곧 연립정권의 형태를 띠지 않고서는 집권이 힘들어졌다. 그러나 자민당 이반 현상은 최근에 들어 부쩍 그 강도가 더해졌다. 그같은 현상은 지난 10월15일에 실시된 나가노현 지사 선거에서 잘 드러난다. 자민당을 비롯한 기존 정당과 자치단체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부지사 출신의 이케다 후미타카를 누르고, 작가 출신의 다나카 야스오 후보가 당선되었다. 몇몇 경제계와 문화계 인사의 추천을 받아 뒤늦게 선거에 뛰어들었지만, 결과는 11만표차의 압승이었다. 인터넷으로 무장한 무당파의 승리였던 것이다. 지난 6월 선거에서도 그랬지만, 원래 무당파는 주로 도시에서 그 위력을 과시해왔다. 그러나 이제 무당파 바람이 토건(土建) 정당인 자민당의 텃밭 농·어촌에까지 불어닥친 것이다. 지방 곳곳에서 조용한 반란

(사진/나가노현 지사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다나카 야스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