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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유교적 휴머니즘의 마지막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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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5-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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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중국의 근대 개신 유림계를 대표하는 강유위, 그는 어떻게 동아시아적 사회주의의 싹을 틔웠나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가슴 아프구나, 망국 국민의 비참함이여! 베트남 사람은 ‘동물이나 식물이 되지 못하고 불행히도 사람이 된 것을 애통해한다’고 하였으니 무릇 망해버린 나라의 백성이 된 것을 슬퍼한 일이다. …<한국통사>(韓國痛史)를 읽어보니 망한 나라가 걸어온 길이 매우 심하구나. …나는 이를 읽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옷깃을 적셨다.”(김도형 옮김, <한국통사>, 계명대출판부, 1997)


인도·베트남·한국의 ‘망국’을 슬퍼하다

중국의 근대화 운동에 기여한 강유위(왼쪽)와 한국의 민족독립 운동에 힘쓴 박은식(오른쪽)을 동지로 만든 것은 궁극적으로 민족 · 국가의 경계를 뛰어넘으려는 의지였다.
피침국의 원한에 사무친 이 문장은 박은식의 <한국통사>(1915년 상해 간행)의 서문이다. 망명객 박은식을 후원하고 그의 서문 청탁에 응해 인도, 베트남, 한국 등지의 ‘망국의 슬픔’을 뛰어나게 묘사했으며 한계 이승희(韓溪 李承熙·1847~1916)나 진암 이병헌(眞菴 李炳憲·1870~1940)과 같은 조선의 유림 지사들과도 가까웠던 사람은, 중국의 근대 개신 유림계를 대표하는 남해 강유위(南海 康有爲·1858~1927) 선생이었다.

교과서·백과사전에서는 그를 주로 ‘1898년의 청나라 변법(變法) 운동의 주인공’ ‘중국의 개혁가’로 규정하고 있지만, 강유위·박은식·이승희·이병헌과 같은 유교적 보편주의자들과는 조국이 달라도 동족 이상의 동지애를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공동 목표는 제국주의와 인종주의, 망국의 원한과 야수들의 ‘승리’ 도취, 그리고 만악(萬惡)의 원천인 국가와 군대가 사라질 ‘대동’(大同)의 도래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한국의 민족독립 운동에 힘쓴 박은식과, 중국의 근대화 운동에 기여한 강유위를 동지로 만든 것은 궁극적으로 민족·국가의 경계를 뛰어넘으려는 의지였다. 국가 폭력으로 물든 세상을 바꾸려 했던 그들은 자본주의적 야만의 도전에 훌륭하게 응답한 유교적 휴머니스트의 마지막 세대에 속했다.

유교적 휴머니스트 박은식·강유위에 대해서 그렇게 말한다면 생소하게 들릴 것이다. 박은식만 해도, ‘애국계몽적 언론인’이나 ‘독립운동가’로 알려질 뿐이지 그의 이념적 핵심이라 할 만한 ‘대동사상’의 내용을 알려고 하는 이들이 드물다. ‘중국인’ 강유위도 근대화 지향의 ‘자강운동’의 주인공으로서 알려졌을 뿐 <대동서>(大同書, 1902년 탈고, 1935년 전부 출판)에서 집약된 그의 유교사상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대동서>가 한글로 번역돼 출판됐음에도(이성애 옮김, 민음사, 1991) 찾는 사람들이 전문가 이외에 많지 않다. 피비린내 나는 시대에 어짊(仁)의 정신을 간직하여 국가와 폭력이 없는 세상을 지향했던 유림 박은식이나 강유위가 우리에게 생소하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인정해야 할 부분은, 현실의 정치에 있어서 강유위가 ‘자산 계급의 개량주의’ 노선을 대표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개혁활동의 정점인 1898년 ‘무술(戊戌)년 변법’의 좌절 이후에 차차 보수화돼 결국 복벽(複壁) 운동과 군벌 정치에 휘말리게 됐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상당수 근대주의적 지식인들이 그의 유교사상에 대해서 무관심하도록 만든 요인이 아닌가 싶다.

그를 지도자로 한 1898년의 ‘변법당’이 요구한 산업 진흥이나 근대적 교육기관의 설립, 서구식 군대 양성과 신사(사대부) 중심의 국회 신설, 그리고 입헌군주제로의 이행 등이라는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한 개혁들도 어디까지나 개명 자산가, 관료들의 이해관계를 표방한 것이지 민중적 성격이 결여됐다.

수구주의자들의 정변으로 개혁이 좌절돼 외국으로 망명한 뒤에는 부유한 화교들의 돈으로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기 위한 단체인 ‘보황회’를 꾸려 혁명가들과 첨예한 갈등을 빚었고, 손문을 청나라 조정보다 더 위험한 적으로 여기는 등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1911~12년의 혁명 이후에 여러 군벌과 관계를 맺었고 1917년에는 아예 청나라 황제 복벽의 시도를 주도하는 한편 유교를 국교로 표방하려고 했던 강유위는, 급진파는 물론 온건파들에 의해서 ‘완고당’으로 배척당했다. 한때 중국의 근대화를 주도하기 위해 젊은 시절의 마오쩌둥을 감동케 했던 구국의 호소문들을 내놓은 그가 나중에 새로운 변혁 주체로부터 버림을 받아 여생을 외롭게 보내야만 했다.

소강의 시대와 대동의 시대

그러나 관료·재산가로서 광둥성의 ‘명족’(名族) 가문에서 태어나 평생을 상층부에서 보내면서 근대화의 여러 방법들 중에서도 늘 보수적인 방법만 택하려 했던 강유위의 태생적 한계들을 인정하더라도, 오늘의 보수주의자들에게 잘 없는 중요한 하나의 특징을 간과해선 안 된다. 현실 욕구에 의해서 메이지 방식의 근대화를 주장하고 보수적인 개혁 노선을 택하면서도 그는 현실과 이상(理想)을 철저하게 구분했다. 현실에서 자본주의적인 ‘강국 중국’을 만들려는 그는, 이상의 차원에서 야만적 자본주의와 국가를 부정했다. 현실에서의 근대주의와 이상 측면의 무정부주의적 공산주의와 통하는 ‘대동사상’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게 한 이 묘한 논리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베이징 자금성 박물관에 있는 강유위의 친필 휘호. 그는 1898년의 ‘무술(戊戌)년 변법’의 좌절 이후에 차차 보수화돼 결국 복벽(複壁) 운동과 군벌 정치에 휘말리게 된다.
역사의 진보를 믿은 강유위는 그 발전 단계를 난세와 소강(小康)의 시대 그리고 대동의 시대로 구분했는데, 전제군주제를 벗어나지 못한 중국은 ‘난세’에 속한다고 봤다. 기울어지는 난세의 나라인 만큼 이미 소강시대(근대적 정치체제와 자본주의)인 서구·일본의 제도를 빌려 급선무인 ‘구국’을 단행해야 한다는 것이 정치가로서 강유위의 생각이었지만, 동시에 세계 전체가 침략의 화염에 쌓인 소강의 시대를 하루빨리 벗어나 폭력이 없는 대동의 시대를 향해 가야 한다는 것이 휴머니스트로서 강유위의 꿈이었다.

현실의 문제를 불가피함의 논리로 처리하되 ‘내일’을 망각하지 말고 그 ‘내일’의 도래를 위해서도 일하자는- 기득권밖에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오늘의 한국 수구 정객들이 이해 못할 수준의- 이상주의적 보수 개혁가 강유위의 철학이었다. 부조리와 폭력을 당해본 일도 없던 ‘명족’ 출신의 강유위가 어떻게 해서 폭력 없는 세상을 꿈꾸게 됐는가?

일찌감치 신동으로 알려진 그는 21살 때 명상에 들어 자신의 몸과 다름이 없는 남들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다면 살 의미가 없음을 깨달았고, 28살 때에는 청프전쟁 전선에 남편을 보낸 한 부인의 울음소리를 엿듣고는 국가 폭력으로 인한 고통이야말로 우선적으로 해결할 과제임을 이해했다. 폭력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을까? 강유위는 불교적 자비의 개념을 중시했지만 그가 생각해낸 ‘폭력 문제의 해결법’은 개인 득도(得道)의 차원이 아닌 ‘나은 인류 만들기’의 차원이었다.

그는 소강 시대의 민주국가들이 점차 유럽 등의 대륙을 단위로 거대 블록을 만들 것이고 시민들이 경쟁과 전쟁, 국가 단위의 집단 이기주의가 고통의 뿌리임을 깨닫고 결국 이를 뛰어넘으려는 세계적 움직임을 보일 것이라고 예상했다(오늘날의 유럽 통합이나 세계적 반세계화 운동을 생각하면 그의 선견지명은 예언자 격이었다).

전 지구 시민의 결정으로 군대, 국경, 생산시설에 대한 사유재산제도 등이 철폐되고 세계정부와 각 지역의 자치단체들은 공산적 방식으로 일체 세계인의 민생을 책임지게 된다. 세계 정부가 관리하는 대동의 세계는 최첨단 산업사회이기에 노동시간이 단축되고 물질을 균등하게 사회로부터 받아쓸 것이다. 서로를 도와주는 데 관심이 많고 동물에 대한 자비심이 발달돼 채식주의가 보편화된다. ‘경쟁’과 같은 악한 용어들이 쓰이지 않는 세상을 위해서 결혼 등을 통해 인종과 종족, 민족의 경계들이 무너지고 일체 세계인들이 하나의 혼합종족이 돼야 할 것이다. 범죄가 줄어 자연히 형벌제도 등이 철폐되겠지만 유일하게 ‘국가’를 복원하려는 ‘반동적’ 중범에게는 격리를 행할 것이다. 가족제도도 철폐돼 평등해진 남녀들은 1년씩 동거계약을 맺어 그 뒤에 마음이 맞으면 계속 연장하는 식으로 양성의 관계가 이루어질 것이다(강유위는 구미 사회의 동거 열풍을 예언한 듯하다!). 동성연애는 이성연애와 똑같은 자격을 얻을 것이다. 물질적 욕구가 충족된 이 시대의 사람들은 여행과 학습 그리고 불교적 참선의 기쁨으로 살 것이다. …

자신은 정치적으로 보수주의자였으나…

근대의 극복을 꿈꾼 마지막 석유(碩儒) 강유위…. 난세 속에서 대동의 도래를 위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동아시아 각국의 유식층에게 그 사상을 알리는 것이었지만 평등을 위한 그의 열정은 헛되지는 않았다. 강유위 자신은 정치적으로 보수주의자로 여겨지지만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다음 세대의 지식인들은 좌파의 대열로 합류하거나 좌파적 사상에 대한 열린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유교적 휴머니즘의 황혼 속에서 동아시아적 사회주의의 싹이 트게 된 것이다.

[참고 사이트]
1. 강유위 일부 작품(중국어): http://www.millionbook.net/xd/k/kangyouwei/
2. ‘무술년변법’ 운동의 개관(중국어): http://lookin.51.net/wx/
(강유위 등 관련자 사진: http://lookin.51.net/wx/wxphoto/talk/move.htm)
3. 강유위 정치활동 개관(중국어):
http://cyc6.cycnet.com:8090/xuezhu/tuqiang/content.jsp?n_id=590
4. ‘무술년변법‘을 학교에서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한 한 대만 학술지의 논문(중국어): http://vm.nthu.edu.tw/history/histeach/9-10-1.html
5. 강유위 등 중국 근대 사상가의 ‘공상적 공산주의’에 대한 영문 논문:
http://www.daltonstate.edu/faculty/bguo/utopianism.htm
6. 강유위의 사진:
http://www.wwnorton.com/college/history/ralph/resource/33kang.htm
7. 강유위가 캐나다에 있었을 때 지은 ‘무술정변 6명의 희생자(6군자)를 위한 제문’:
http://ndbb.hclmbc.org/images/Historical_Items/Pages/Image3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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