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기약없는 기다림… 쥐굴 같은 난민촌에서 이산가족의 아픔을 안고
림 핫다드(Reem Haddad)
1969년 레바논에서 태어난 핫다드는 메릴랜드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한 뒤, 현지의 가장 유력한 일간신문인 <데일리 스타>의 기자로 일하고 있다. 특히 레바논 내전과 팔레스타인 분쟁으로 인한 인간성 파괴를 고발하는 그의 현장발 기사들은 레바논 현지언론뿐만 아니라 영국을 비롯해 여러 나라의 언론들이 게재하고 있다.
지난 52년 동안 절망감에 치를 떨던 레바논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9월 초 레바논-이스라엘 국경으로 몰려가서 자신들의 영토를 점령한 채, 형제들을 학살하는 이스라엘군 앞에서 항의시위를 벌였다. 여기서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살해당했다. 이날 2명이 죽임을 당했고, 17명이 총상을 입었다. 평화협상이 개최되다가 중단되기를 거듭하는 동안, 36만여명에 이르는 레바논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인내심을 잃어갔다.
“난민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결코 중동의 평화는 없다.” 남부 레바논의 아인 엘 힐웨 난민촌 민중위원회의장 아베드 멕다의 말은 이어졌다. “단 한명의 난민이라도 존재하는 한 평화는 요원하다.”
“난민인 것이 알려지면 잘린다”
최근 팔레스타인의 시위를 이스라엘군이 유혈 진압하면서 희생자가 늘어나자, 레바논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도 긴장감이 높아졌고, 난민들은 영토회복을 거듭 맹세하고 있다.
“이건 우리의 권리다. 유엔결의 194조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자신들의 땅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아베드 멕다는 원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아랍의 모든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들 가운데서도 가장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레바논지역의 난민들은 다른 어떤 이들보다 강력하게 자신들의 성지 회복에 집착해왔다.
기독교와 회교 사이의 종파간 균형을 예민하게 여겨온 레바논 정부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레바논 정착과 시민권 부여를 거부했다. 레바논에서 현재 70여 가지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들 가운데는 충분히 교육받은 이들마저도 비숙련 노동부문에서만 제한적인 일자리의 선택을 강요당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미숙련 노동부문마저도 저임금노동자로 유입된 시리아인들이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일거리를 거의 앗아가버린 실정이다. “내가 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베이루트의 사브라와 차틸라 난민촌에 살고 있는 모함마드 아부 로다이나(21)는 어두운 미래를 말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난민 꼬리표를 달고 있는 나를 아무도 고용하지 않을 텐데, 미래를 계획한들….”
아부 로다이나처럼 수많은 팔레스타인의 젊은이들은 휑한 마음으로 일자리를 찾아 다니고 있다. “늘 같은 이야기다. 내가 팔레스타인 난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됨과 동시에 잘라 버린다.” 게다가, 레바논 공립학교에 진학할 수 없는 팔레스타인 어린이들은 유엔의 팔레스타인 지원 전담기구인 유엔원조노동사무국(UNRWA)이 설립한 학교에만 다닐 수 있는데, 이마저 몇해 전부터 유엔 예산의 대폭 축소로 교육의 질이 저하되고 있어 팔레스타인의 미래에 대한 염려가 깊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UNRWA의 예산 삭감은 난민들의 의료, 보건 분야에도 치명적인 부작용을 낳고 있다. 골목마다 오물과 하수가 범벅된 난민촌은 말 그대로 ‘썩은 콘크리트 정글’이고 난민들은 의료사각지대에서 신음하고 있다.
최근 뇌암으로 고통받던 13살짜리 소녀 나왈 유세프는 치료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채 8명 온 가족이 웅크려 자는 먼지 쌓인 단칸방에서 저승으로 떠났다. “여기저기 병원을 찾아 다녔지만, 우리가 팔레스타인 난민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모든 병원들이 진료를 거부해 버렸다.” 혼수상태에 빠진 유세프를 안고 정신없이 돌아다녔던 어머니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어린 딸이 내눈 앞에서 숨져갔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현실은 법적으로는, 유엔이 1948년 이스라엘의 국가창설을 인준하면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대이동해 위기가 발생했기 때문에 그 책임이 유엔에 있다. 그럼에도 유엔은 지난 52년 동안 근본적인 해결에는 무능함만 노출해왔을 뿐이다.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가족을 찾다
이러다보니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UNRWA의 예산을 고의적으로 삭감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국제사회가 추후 ‘협상’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팔레스타인이 받아들이라는 무언의 압력이라 믿고 있다. “지난 10년간, 특히 오슬로협정 뒤부터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사회는 미국-이스라엘이 요구한 조건을 팔레스타인이 받아들이도록 경제적 압력을 가해왔다.” 익명을 요구한 이 팔레스타인 당국자의 말은 이어졌다. “코소보전쟁에 투입할 수 있었던 막대한 전비를 지닌 국제사회가 기껏 수십만명에 지나지 않는 팔레스타인 난민을 지원할 돈이 없다는 말을 누가 믿겠는가?”
1948년 단 며칠만 공격을 피하면 되리라고 여겼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52년이 지난 오늘, 이스라엘에 의해 공식적으로 국적없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현재 레바논에는 쥐굴 같은 12개 난민촌에 36만여명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살고 있다. 전기도 없는 암흑 속의 난민들은 비닐봉지로 화장실을 대신하며 100가구가 수도꼭지 하나에 매달려 살아가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현실은 아인 엘 힐웨 난민촌만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언젠가는 돌아간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이라도.” 귀향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지닌 이곳 레바논의 난민들은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의 협상 소식에 귀기울이고 있으며, 최근 바라크 이스라엘 총리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는 그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분위기다. 되돌아보면 1993년, 아라파트 의장은 그를 추종했던 많은 사람들을 잃었다. 오슬로협정에서 난민들에 대한 주목을 회피한 채 팔레스타인 땅의 안전을 게을리한 탓으로 ‘배신자’가 되면서부터이다.
이런 가운데 지난 5월 이스라엘군의 남부 레바논 점령지역 철수는 아랍사회에, 특히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매우 큰 충격과 자극을 주었다. 1978년부터 레바논 남부지역을 점령해온 이스라엘군에 대항해왔던 시아파회교도 헤즈볼라의 지난한 투쟁이 역사적인 승리를 이끌어냈다는 사실은 팔레스타인 난민들에게도 잃어버린 땅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결정적인 희망의 메시지가 되었던 셈이다. 이 메시지는 분명하고 간결했다. 오직 힘에 의해서만 잃어버린 땅을 되찾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로 집약되었다. “무기를 드는 것만이 유일한 보증이다.” 팔레스타인의 모우닐 맥다 대령의 말처럼 “달리 길은 없다. 우린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의 영토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이라면 뭐든 한다.”
이스라엘군이 철수한 남부레바논-이스라엘 국경지역에는 즉각 수천명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몰려가서, 여전히 자신들의 땅이라 부르는 팔레스타인지역의 모래를 한움큼씩 담아들고 집으로 가져갔다. 난민들은 감격했다. “팔레스타인, 그대여 우리는 언젠가 당신 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52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가족들을 찾아 레바논-이스라엘 국경 양쪽 지역에는 수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몰려들어 서로 애절한 이름을 불렀다. “내가 라힌의 딸이오.” 이스라엘쪽 팔레스타인 여성의 피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날 아는 이가 없소?”
레바논쪽에서 비명 같은 대답과 함께 친척으로 확인된 이들이 달려갔다. 팔레스타인 이산가족들은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한동안 비탄에 잠겼고 주변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산가족들의 울음이 국경을 뒤덮었다.
그러나 철조망에 손이 찢기는 이 애달픈 재회마저도 며칠 뒤, 바라크 이스라엘 총리가 금지시켜 버렸다. 가족을 찾을 수 있다는 기대로 국경을 배회했던 52년 생이별의 한맺힌 여인 아미네 헤로우. 이 할머니는 당시 첫 아기를 임신한 지 9개월 만에 이산가족이 돼버린 현실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눈물을 삼켰다. “이스라엘군의 공격을 피해 산을 넘어 레바논쪽으로 피난가던 중에 딸아이를 낳았다.” 아미네는 꿈 많던 시절을 구슬피 회상했다. “당시 나는 남편 아리와 함께 하이파 부근의 야조울마을에 돌집을 짓고 올리브나무를 심어 풍성한 수확을 준비하고 있었지. 그러던 중에 유럽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때만 해도 그 유대인들의 정착을 위해 우리를 수천년 대대로 살아온 우리 땅에서 쫓아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지”
이제 국제사회가 대답할 때
그날로부터 이들은 52년이 넘도록 무국적자 난민이 되고 말았다. 이 난민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은다. “아랍과 유대인들은 사이좋게 잘살았다. 새로운 유대계 정착민들과도 같을 줄로만 알았는데…” 그러나 1948년 4월, 이스라엘군은 하이파를 점령하면서 모든 팔레스타인지역에 대한 공격과 테러를 감행했다. “하이파에서는 이스라엘군이 인종학살을 자행했고 우리는 살려달라고 빌었다.” 아미네의 원통한 경험이 되살아났다. “총 한 자루 없었던 우리가 별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애원하다 결국 레바논쪽으로 피난했다.” 그리고 52년의 세월이 흘러버렸다. 아미네는 6일 동안 걸어서 레바논에 닿았으나 장티푸스에 걸렸고 피난중에 낳았던 딸은 모유로 전염되어 죽고 말았다. 팔레스타인이 쓰러졌던 것처럼, 같은 시간에.
올해 68살의 아미네와 75살의 아리는 그뒤 6명의 아이를 더 넣았으나, 이 가운데 둘은 1982년 이스라엘군의 지원을 받은 레바논민병대들이 베이루트를 공격해 사브리와 차틸리 난민촌에서 대량학살을 자행할 때 살해되고 말았다.
오늘날 이들의 고향땅은 완벽하게 파괴되고, 대신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키부츠로 변해버렸다. 오직 공동묘지만 남아 있는 아미네와 아리의 고향땅. 그러나 이들의 마음속에는 이미 고향땅에 새로운 집을 짓고 과수원을 복구했을 뿐만 아니라 포도나무덩굴 아래 몇개의 안락의자도 가져다 놓았다.
“우린 유대인들과 아랍인들 모두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다. 우리를 고향으로 놀아갈 수 있게만 해준다면”
팔레스타인 난민들, 52년이 지났지만 이들의 꿈은 아직도 깨지지 않은 채 순결한 고향땅을 향하고 있다. 이제 국제사회가 대답할 순서다. 이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너무 지쳐 있다.



(사진/비극은 언제나 계속될 것인가.한 이스라엘 병사가 철조망너머 레바논의 친척에게 아기를 건네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