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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야구공은 대기업만 미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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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4-0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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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에서 실패 거듭하다 헐값에 구단 넘겨… 야구 문화 무시하고 이윤만 추구한 결과

로스앤젤레스= 신복례/ 자유기고가 boreshin@hanmail.net

‘미국 프로야구는 대기업들의 무덤인가.’

메이저리그(미국 프로야구)의 막이 올랐다. 박찬호, 김병현, 서재응, 최희섭 등 한국 선수들의 대거 진출로 메이저리그는 이미 한국팬들에겐 ‘앞마당 리그’로 성큼 다가선 지 오래다. 메이저리그는 세계 최고 수준의 야구선수들이 펼치는 꿈의 무대다. 단순히 야구경기뿐 아니라 비즈니스 측면에서도 수백억달러(한화 수십조원)가 넘는 자본이 움직이는 황금 시장이다.

매코트가 LA다저스의 스프링캠프에서 선수들에게 훈화를 하고 있다. 야구 명문 다저스를 인수한 매코트는 궁지에 몰린 머독쪽으로부터 '빈손' 구단을 인수해 화제가 됐다.


30개 팀 중 대기업 소유 3개 구단

시장 규모가 이 정도 되면 이미 ‘장사’를 넘어 ‘경영’이 필요한 상황이다. 체계적인 조직과 첨단 경영기법을 보유한 기업들이 각축을 벌일 만하다. 그러나 메이저리그엔 ‘가업’은 있어도 ‘기업’은 없다. ‘대기업 필패 징크스’가 100년이 넘는 불문율처럼 남아 있는 곳이다. 내로라 하는 초일류 기업들이 메이저리그에서는 속속 무너졌다. 한 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기업들이 구단 경영에 도전했으나 물만 먹었다. 현재 미국 야구시장에서 대기업이 소유한 구단이 있는 곳은 30개 팀 중 단 3개 구단뿐이다.

그나마 대기업 구단주의 명맥을 잇던 두 회사가 1년 사이에 약속이나 한 듯 징크스의 희생양이 됐다. 둘 다 미국 경제계를 대표하는 거대기업에 남가주 연고팀이다. 두 구단의 인수자가 기업이 아닌 개인사업가란 점도 닮은꼴이다.

디즈니사로부터 애너하임 에인절스를 인수한 아티 모레노(오른쪽)가 거포 블라디미르 게레로를 영입한 뒤 악수를 나누고 있다.
첫 번째는 애너하임 에인절스. 2002년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챔피언에 오른 신생 명문팀이다. 이 팀은 미국 엔터테인먼트와 미디어 부문의 최고회사인 월트디즈니사가 주인이었다. 지난 1996년 2억1천만달러에 구단 소유권을 사들였다. 유명한 스포츠전문 케이블텔레비전인 도 디즈니의 계열사다. 팬들과 광고를 끌어모을 수 있는 텔레비전 중계를 언제든지 확보할 수 있었다. 이같은 배경을 업고 디즈니의 에인절스는 최고 명문 뉴욕 양키스에 버금가는 성공시대를 열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불과 5년 만에 디즈니사는 1억달러(1200억원)가 넘는 적자를 안은 채 구단을 팔아야 하는 처지에 몰렸다.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했지만 관중은 계속 떨어졌다. 광고와 중계권 등 주요 수입원도 제자리걸음이거나 오히려 하락세였다. 가장 중요한 구단가치도 올라가지 않았다. 에인절스의 가치는 2억달러 선에서 맴돌았다. 목표로 삼았던 양키스의 6억5천만달러에 견주면 3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결국 디즈니사의 마이클 아이즈너 회장은 이사회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구단 매각을 결정했다.

지난해 5월 디즈니사는 피닉스의 광고업자 아티 모레노에게 에인절스 구단을 팔았다. 매각 대금은 1억8300만달러. 매입가보다도 낮은 가격이었지만 서둘러 계약서에 사인을 해버렸다. 대금을 분할하지 않고 일시에 현금으로 받은 게 그나마 디즈니사가 얻은 유일한 혜택이었다. 또 하나의 실패는 에이절스의 윗동네 구단인 LA다저스에서 나왔다. ‘코리안특급’ 박찬호의 친정팀으로 한국팬들에게도 친숙한 구단이다. 오말리가(家)의 가업으로 30년 넘게 운영되던 다저스는 지난 98년 세계적인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이 이끄는 ‘뉴스 코퍼레이션’에 넘어갔다. 이 회사는 미국 케이블텔레비전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폭스TV>의 모회사다. 다저스 매입은 미국 스포츠방송 시장을 장악하려는 머독의 야심작이었다. 뉴스 코퍼레이션은 당시 시장가보다 3천만달러나 더 주고 3억1천만달러에 다저스를 사들였다. 이 회사는 <폭스TV>를 앞세워 팀 인수와 함께 메이저리그 중계권도 거액에 따내 본격적인 마케팅에 돌입했다.

하지만 실패는 금세 왔다. 구단 매입 이듬해부터 2억달러 이상을 들여 고액 연봉의 스타선수들을 데려왔지만 성적은 제자리걸음이었다. 수입도 신통찮았다. 광고 수주는 미미했고 가장 기대를 걸었던 텔레비전 중계권 판매도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장사였다. 머독의 측근 참모로 불리는 간판 경영자들을 잇따라 투입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딱 5년 만에 머독은 ‘야구장 철수’를 지시하고 말았다.

돈 꿔주며 팔기에 급급

팔기도 쉽지 않았다. 로스앤젤레스는 미국 3대 도시인데다 다저스의 구단가치도 에인절스보다 훨씬 높았다. 그 정도 금액이면 어지간한 개인사업가들은 어림도 없다. 몇몇 투자그룹들이 입질을 했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2004 시즌 전에 구단을 매각해야 적자폭을 줄일 수 있었던 뉴스 코퍼레이션은 몸이 달았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원매자를 찾았고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구단을 넘길 수 있었다.

LA다저스를 인수한 프랭크 매코트가 부인 제이미와 다저스 유니폼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다저스의 인수자는 프랭크 매코트다. 보스턴에서 4대째 부동산 가업을 잇고 있는 개발업자다. 수년 전부터 프로야구단 인수를 노려왔던 매코트는 다저스와 인연이 닿았다. 그러나 매코트는 현금이 없었다. 대부분의 자산이 보스턴 인근의 부동산에 묶여 있었다. 가장 큰 재산은 보스턴 시내 8곳의 유료주차장 부지. 4억3천만달러에 구단 인수를 합의했지만 지불할 돈이 없었다. 자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구단을 사겠다는 계획이었다.

한시가 급한 뉴스 코퍼레이션은 아예 돈을 꿔주기로 했다. 매각 대금의 절반인 2억1천만달러를 매코트에게 빌려줬다. 현찰 없는 구단 인수를 반대하던 메이저리그 사무국과 다른 구단주들을 간신히 설득했다. 결국 5년 만에 1억2천만달러를 올려받고 구단을 팔았지만 머독의 손에는 빨간색이 죽죽 그어진 대차대조표만 남은 셈이었다. 디즈니와 머독의 퇴장으로 메이저리그에는 3개의 기업 오너만 남았다. 시애틀 매리너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시카고 컵스뿐이다. 하지만 이 중 애틀랜타는 으로 유명한 테드 터너가 모회사 지분을 타임워너사에 넘기면서 함께 끼워 팔았고 아직도 최대주주라 명목만 대기업 구단주다. 시애틀은 게임기로 유명한 일본의 닌텐도사가 구단주. 최희섭이 뛰었던 컵스는 <시카고 트리뷴> 등을 발간하는 트리뷴 컴퍼니가 오너다.

야구시장에서 대기업들이 실패하는 원인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야구 문화를 무시했다. 미국에서 야구는 온 국민이 즐기는 스포츠다. 미국인들은 날 때부터 자기 고향을 연고로 하는 야구팀의 열성팬들이다. 유명한 야구선수는 전국적인 영웅으로 대접받기도 한다. 그러나 기업들은 속성상 야구단 운영을 철저하게 마케팅 측면으로 접근했다. 구단을 매입하자마자 야구장 명칭을 팔거나 광고를 붙이고 텔레비전과 라디오 중계도 철저하게 광고 수주 실적에 따라 운영했다. 구장 티켓과 물품 가격도 시장원리에 따라 재조정했다. 선수단도 성적에 따라 냉정하게 평가했다. 편안한 여가를 즐기려는 팬들의 열기는 당연히 시들해졌다.

둘째는 방만한 경영조직이다. 대기업 구단주들은 일단 경영진부터 실무진까지 일사불란한 조직체계를 갖췄다. 하지만 이 체계는 야구단에는 맞지 않았다. 1년에 162게임이나 하는 야구는 매일매일 희비가 엇갈린다. 즉각 결정해야 할 크고 작은 사안들이 매일같이 발생한다. 대기업 조직은 의사 결정이 늦을 수밖에 없다. 몇달만 지나도 구단 주변에는 불협화음이 쌓였다.

마지막으로는 언론과의 불화를 들 수 있다. 끊임없이 수익을 내야 하는 대기업 구단들은 야구의 철학과 전통을 중요시하는 연고 언론들과는 물과 기름 같은 사이였다. 언론들은 조그마한 사안이라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철저한 기업생리에 넌덜머리를 내는 팬들의 여론을 등에 업고 기업 구단주들을 몰아붙이기 일쑤였다. 이미지와 홍보를 중요시하는 기업들은 계속되는 언론의 몰매를 견딜 재간이 없었다.

유명 구단들, 독특한 가족 비즈니스로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유명한 구단주인 뉴욕 양키스의 조지 스타인브레너는 선박운송으로 떼돈을 번 사업가다. 지난 71년 방송사로부터 양키스를 인수해 미국 최고의 팀으로 만들었다. 지난해 월드시리즈를 우승한 플로리다 말린스 역시 제프리 로리아 구단주가 12명의 투자그룹을 조직해 인수한 팀이다. 대부분의 구단이 비슷한 소유체제를 갖고 있다. 이들은 저마다 독특한 가족 비즈니스로 야구단을 운영하고 있다. 큰 돈도 벌지만 야구에 대한 철학이 뚜렷한 사업가들이다. 미국 야구시장에서 대기업들의 실패는 결국 이같은 ‘야구 사랑’을 갖추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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