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3월 탄핵정국과 너무나 흡사한 2001년 7월 인도네시아 탄핵정국에 관한 보고서
글 · 사진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 아시아네트워크 팀장
asianetwork@news.hani.co.kr
“내키는 대로 지껄이며 말이 너무 많다.” “대통령으로서 권위가 서지 않는다.” “정치력도 없는 것이 타협도 할 줄 모른다.” “측근 비리를 옹호한다.” “허울뿐인 개혁으로 혼란만 가중시켰다.” “경제를 망쳐놓았다” “사과할 줄도 모른다.”
2001년 7월23일 인도네시아 대통령 압두라만 와히드(Abdurrahman Wahid)는 그렇게 몰매를 맞은 끝에 의회로부터 탄핵을 당했다.
메가와티의 눈물이 탄핵을 예고하다 “위헌적인 탄핵이다.” “민주를 가장한 의회 쿠데타다.” “수구 기득권층의 발악이다.” “부패한 도둑 소굴인 의회가 대통령을 탄핵하다니….” “국민협의회를 해산하라.” 와히드 대통령을 탄핵하자 인도네시아 시민사회는 속이 끓었다. 와히드를 지지해온 민주세력과 학생들은 일제히 대통령궁으로 몰려가 탄핵 거부를 외쳐댔다. 그리고 2004년 3월12일,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은 그 ‘인도네시아판’과 한치도 다름없는 몰매를 맞고 의회로부터 탄핵을 당했다. 대한민국 시민들도 속이 뒤틀렸다. 광화문과 여의도를 메운 ‘촛불시민’들은 탄핵 거부를 외치고 있다. 바야흐로 아시아판 ‘몰매정치’가 봄날을 맞았다. 그 탄핵과 이 탄핵을 바라보는 아시아 시민사회는 놀랄 만큼 빼닮은 ‘쌍둥이 탄핵’ 앞에 혀를 내두르고 있다. 다른 점이 딱 하나 있다면 인도네시아 의원들이 적어도 대한민국 의원들보다는 ‘인내력’이 조금 더 있었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의회가 와히드를 탄핵하기까지 ‘무려’ 21달이 걸렸다면 대한민국 국회는 12달 만에 해치웠으니, 그 ‘탄핵 능력’에서만큼은 이쪽이 확실히 앞선다(물론 한국에서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남았지만…). “오빠가 어떻게 이럴 수가….” 1999년 10월20일 자카르타 국민협의회(MPR), 수하르토 독재 32년을 걷어내고 민주정치로 이동하던 관문 격인 대통령 선거에서 떨어진 메가와티가 눈물을 흘리며 자리를 뜰 때부터 당선자 와히드 대통령의 탄핵 그림자는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2003년 2월 대한민국, 노무현 후보가 막판 대역전극을 통해 제1당의 환상을 업고 뛰었던 이회창 후보에게 눈물을 흘리게 만든 순간부터 ‘탄핵’의 그림자는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독재자들로부터 맛본 ‘대통령의 권위’에 길들여진 극우 언론들이 선봉장 노릇을 하며 노무현을 까자, 독재자들에게 빌붙어 ‘부와 명예’를 독식하던 정치꾼들이 사력을 다해 노무현 죽이기에 나섰다.
다시 자카르타 1999년. 수하르토 독재의 ‘은혜’를 입은 정치권과 보수 기득권 집단들이 와히드 ‘저격용’으로 빼든 최초의 무기는 바로 와히드가 거침없이 쏟아내는 ‘말’이었다. “와히드가 말이 많고 ‘대통령식’ 화법을 쓰지 않는다고 욕을 하는 건 수하르토 독재 32년 동안 침묵 압살 정치에 길들여진 이들이 느끼는 어색함일 뿐이다. 대통령 화법이란 게 대체 어디 있나. 대통령이 무슨 신이라도 되나? 대통령은 자고로 말을 많이 할수록 좋다. 그래야 시민들이 정치 돌아가는 걸 읽을 수 있다. 그게 민주주의다. 지금 시민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다. 수하르토 시절엔 장관이란 놈들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그러나 인권변호사 무니르 같은 민주화세력들은 오히려 와히드의 말잔치를 지원했다.
서울 2003년, 노무현 죽이기에 나선 무리들은 ‘대통령의 말’을 물고 늘어지며 인도네시아판과 똑같은 저질 놀음을 시작했다.
다시 자카르타 2001년. “모든 부정부패를 뿌리 뽑는다.” 와히드의 칼날이 정치가들의 목을 직접 겨냥하자, 개혁이 무서운 집단들 사이에 와히드 탄핵 소리가 나돌기 시작했다.
악바르 탄중 국민대표회의 의장은 하비비 정부 시절 400억루피(400만달러)를, 그리고 위란토 전 최고사령관은 50억루피(50만달러)의 국가 재원 착복 혐의를 받고 있었다. 게다가 위란토는 국제사회로부터 동티모르 인권유린 혐의로 피소당하기도 했다. 메가와티 부통령도 남편 타우픽 키에마스가 부정에 연루되었다고 시민들로부터 강한 의혹을 받고 있었다.
대통령궁으로부터 터져나온 스캔들
그런 가운데 대통령궁으로부터 스캔들이 터져나왔다. 와히드가 걸려들었다. 조달청 자금에서 700만달러가 대통령 이름으로 빠져나간 이른바 불고(Bulgo) 스캔들에 이어, 브루나이 술탄으로부터 기부받은 200만달러가 제때 신고되지 않아 의혹을 받은 이른바 ‘브루나이 게이트’가 겹쳐졌다.
“불고 스캔들은 대통령이 되기 전 사업적 친구였던 이가 나 몰래 저질렀던 일이고, 브루나이 게이트는 신고 지체로 생긴 오해다.” 와히드는 두 사건 모두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수하르토 독재 32년 동안 정치권 부정부패에 지겹도록 시달렸던 시민들은 민주주의 복구와 개혁 의무를 지웠던 와히드 대통령으로부터 터져나온 스캔들에 충격을 받았다.
와히드를 부정하던 반개혁파 이슬람 단체들과 날만 새면 “메가와티에게 기회를”이라고 외치던 민주투쟁당 당원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부패 혐의를 받고 반전 기회를 노리던 정치판은 졸지에 살맛이 났다. 국민대표회의는 와히드에게 의회 증언을 요구했다.
와히드는 “대통령이 국민대표회의에서 증언할 의무가 없다”고 맞받아쳤다. “도둑놈들이 경찰 흉내를 내고 있다”며 와히드쪽에서 반격설이 흘러나오자, 반경 안에 든 최고 정치가들이 곧장 흥분하며 정치판을 위기 탈출용 대통령 탄핵정국으로 몰아갔다. “절차상 문제가 있긴 했지만, 와히드가 부정한 돈을 만졌다고는 믿지 않는다. 대통령 탄핵은 개혁을 거부하는 보수 기득권층의 반란이고 민주화를 짓밟는 반역이다.” 인도네시아 민주화와 개혁세력들을 대변해온 언론자유 투쟁의 선봉장 <템포> 편집실은 즉각 탄핵의 부당성을 고발하기 시작했다.
서울 2004년, 썩은 ‘여의도’ 쓰레기판도 대통령 측근비리를 물고 늘어졌다.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에 뒤덮여 시민들로부터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쓰레기더미들이!
다시 자카르타 2001년 7월. “경제를 망친 것도 비리 혐의도 모두 대통령이 국민협의회에서 해명하고 사과하라. 아니면 탄핵이다.” 국민협의회가 와히드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국민협의회가 설정한 D-데이인 7월23일 새벽 1시, 와히드는 ‘국민협의회 기능 정지 명령’이라는 대통령 권한을 행사했다. 같은 날 아침 8시, 국민협의회는 전체 회의를 소집해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했다. 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키는 시각, 시내 한 극장에서 만화영화를 보았던 부통령 메가와티는 오후 들어 뒤늦게 국민협의회로 달려왔다. 그리고 그날 오후 메가와티는 21개월 동안 참아온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서울 2004년 3월12일, 노무현을 탄핵한 ‘그들’도 환호했다. 와히드를 탄핵하던 날, 자카르타 국민협의회와 똑같은 풍경을 연출했다.
“헌법에는 대통령 탄핵 조항이 없다. 게다가 헌법이 보장한 대통령 임기를 하위법인 ‘국민협의회령’으로 탄핵할 수는 더더욱 없다. 근본적인 위헌이다. 국민협의회는 수하르토 부패를 놓고 30년이 넘도록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또 현 정치가들 가운데 부패 혐의로부터 자유로운 이들도 없다. 위헌을 떠나서도, 이는 기본적인 자격도 없는 이들이 저지른 국난이다.” 정치평론가이자 인도네시아대학 교수인 알비 사닛은 민주·개혁 세력들의 분노를 대신했다.
“파워게임이었다. 와히드가 정치적 소수자란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해 기회를 놓친 것이다. 경제복구에 차질이 빚어진 것은 원칙적으로 와히드 탓이 아니다. 수하르토 독재가 30년간 말아먹은 걸 와히드가 21개월 만에 복구한다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수사도 한 적 없고 증거도 없이 스캔들만으로 그를 탄핵했다는 지점도 무리수였다.” 당시 와히드에게 상당히 부정적 시각을 지니고 있던 정치평론가 안디 말라랑엥 같은 이들마저 탄핵의 부당성에는 공감함으로써, 탄핵이 시민들 정서와 매우 먼 거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헌법상 나는 여전히 인도네시아 대통령이지만 현실 속에서는 더 이상 대통령이 아니다.”
피를 토하듯 한마디를 남기고 와히드는 떠났다. 그리고 와히드에게 지웠던 부패 혐의는 수사 한번 한 적 없었고, 와히드를 탄핵했던 모든 정치가들은 자신들이 지고 있던 부패 혐의를 숨긴 채 ‘거뜬히’ 살아남았다.
“너희들은 자격이 없다”
그렇게 와히드는 떠났고, 메가와티 신임 대통령을 비롯해 누구도 제2의 탄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의석 분포 속에서 인도네시아의 개혁은 물건너갔다. 메가와티는 군부와 반개혁적인 이슬람 정당들 사이에서 자리 지키기에만 온 정열을 바쳐왔다.
그리하여 인도네시아 민주시민들은 다가오는 4월 총선에서 그 썩은 ‘쓰레기들’을 심판하겠다며 이빨을 갈고 있다. “어떤 형태로든 결함을 지녔던 와히드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썩은 정치판을 죽이기 위해서다.” <템포> 기자이자 ‘아시아 네트워크’ 칼럼니스트인 아흐마드 타우픽은 ‘쌍둥이 탄핵’을 바라보며 시민사회의 심판이 정치권의 ‘탄핵놀음’을 무력화할 때, 비로소 정치개혁이 가능하다는 뜻을 전해왔다.
“쌍둥이 탄핵, 그렇다. 아직 먼 길을 가야 할, 그러나 희망적인 인도네시아와 한국의 정치개혁은 그 쌍둥이 탄핵에서 받은 ‘열’로부터 4월을 뜨겁게 달굴 것이다. 너희에게 ‘탄핵’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심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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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7월 와히드 대통령 탄핵 뒤 "67%의 시민들은 메가와티를 반대한다"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반메가와티 시위에 나선 자카르타 시민들.
메가와티의 눈물이 탄핵을 예고하다 “위헌적인 탄핵이다.” “민주를 가장한 의회 쿠데타다.” “수구 기득권층의 발악이다.” “부패한 도둑 소굴인 의회가 대통령을 탄핵하다니….” “국민협의회를 해산하라.” 와히드 대통령을 탄핵하자 인도네시아 시민사회는 속이 끓었다. 와히드를 지지해온 민주세력과 학생들은 일제히 대통령궁으로 몰려가 탄핵 거부를 외쳐댔다. 그리고 2004년 3월12일,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은 그 ‘인도네시아판’과 한치도 다름없는 몰매를 맞고 의회로부터 탄핵을 당했다. 대한민국 시민들도 속이 뒤틀렸다. 광화문과 여의도를 메운 ‘촛불시민’들은 탄핵 거부를 외치고 있다. 바야흐로 아시아판 ‘몰매정치’가 봄날을 맞았다. 그 탄핵과 이 탄핵을 바라보는 아시아 시민사회는 놀랄 만큼 빼닮은 ‘쌍둥이 탄핵’ 앞에 혀를 내두르고 있다. 다른 점이 딱 하나 있다면 인도네시아 의원들이 적어도 대한민국 의원들보다는 ‘인내력’이 조금 더 있었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의회가 와히드를 탄핵하기까지 ‘무려’ 21달이 걸렸다면 대한민국 국회는 12달 만에 해치웠으니, 그 ‘탄핵 능력’에서만큼은 이쪽이 확실히 앞선다(물론 한국에서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남았지만…). “오빠가 어떻게 이럴 수가….” 1999년 10월20일 자카르타 국민협의회(MPR), 수하르토 독재 32년을 걷어내고 민주정치로 이동하던 관문 격인 대통령 선거에서 떨어진 메가와티가 눈물을 흘리며 자리를 뜰 때부터 당선자 와히드 대통령의 탄핵 그림자는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탄핵 직후 기자회견을 하는 와히드. 그가 탄핵의 몰매를 맞는 과정은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의 경우와 흡사하다.
그해 총선에서 수카르노 전 대통령의 후광을 입은 메카와티 수카르노푸트리(Megawati Sukarnoputri)가 이끄는 인도네시아 민주투쟁당(PDI-P)은 의회 격인 국민대표회의(DPR) 500석 가운데 37%에 해당하는 185석을 얻어 제1당이 되었다. 와히드가 이끄는 국민각성당(PKB)은 11%인 57석을 얻어 제3당이 되었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가, 시민이 뽑은 462석과 군부용 무투표 38석을 합친 국민대표회의 의원 500명에다 지방의회 대표 135명 그리고 사회단체가 추천하고 대통령이 지명하는 직능대표 65명을 포함해 총 700석짜리 국민협의회에서 간접선거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현실정치’를 꿰뚫어보지 못한 채 ‘제1당’의 환상에 젖어 있던 메가와티는 단 57석을 걸고 뛴 와히드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다. 민주투쟁당은 제1당이라는 프리미엄을 업고도 그해 농사를 완전히 망쳤다. 대통령 선거에 앞서 10월3일,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국민협의회 의장 선출에서 기껏 의석 7%를 지닌 국민위임당(PAN) 대표 아민 라이스가 제1당 민주투쟁당이 밀었던 국민각성당 후보 마토리 압둘 자릴을 꺾었을 때부터 이미 인도네시아판 ‘마술정치’가 시작되었다. 3일 뒤인 10월6일, 국민대표회의 의장 선거에서는 수하르토의 세례를 받은 제2당인 골카당(Golka) 후보 악바르 탄중이 ‘무난하게’ 당선되었다. 그건 각 정당들이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배신과 음모를 바탕 삼아 치열한 합종연횡 끝에 만들어낸 그야말로 마술이었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그리고 10월21일 하나 남은 자리인 부통령 선출, 이미 쓴맛을 본 제1당 대표 메가와티는 몸을 사렸다. 당일 아침까지도 부통령직 도전을 망설이며 입을 닫았던 메가와티는 부통령 후보로 올랐던 악바르 탄중과 군부 실권자 위란토 전 최고사령관이 오후 들어 후보 철회를 선언하자 뒤늦게 마음을 굳혔다. 제1당 민주투쟁당과 ‘복수심’에 불타 눈물을 흘렸던 메가와티는 부통령직 하나에 만족해야 했다. 표적이 된 대통령의 말, 말, 말… ‘와히드 대통령, 메가와티 부통령 정부’. 인도네시아 민주주의를 향한 첫 번째 결실은 그렇게 드러났다. 그러나 와히드 대통령과 메가와티 부통령 정부는 처음부터 불협화음을 내며 삐걱거렸다. 와히드가 외치는 개혁은 정부 동반자인 민주투쟁당과 군부 그리고 이슬람을 내건 군소정당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치며 뒤뚱거리기 시작했다. 군부는 쉬지 않고 쿠데타설을 퍼트리며 개혁의 발목을 잡았고, 민주화를 염원하던 시민들은 수하르토가 깔아놓은 32년 ‘장벽’을 실감했다.
파워게임 끝에 와히드를 몰아낸 메가와티. 배신감으로 흘렸던 눈물을 21개월 만에 설욕의 눈물로 바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