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는 외침과 쿠데타에 신음하는 아이티… 대통령 망명 직후 프랑스군 · 미군 다시 들어와
파리= 이선주 전문위원 nowar@tiscali.fr
지난 3월1일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에 미군과 프랑스군이 사이좋게 도착했다.
내란을 진압하고 안정을 되찾는다는 명목으로 도착한 군인들이다. 프랑스와 미국간 동의와 협조를 내포하는 이 주둔 장면은 이라크 사태 당시는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아이티에서는 연출이 가능한 장면이 되고 있었다. 그들은 캐나다군과 나란히 아이티에 선두주자로 도착한 ‘안전유지군들’이었다. 그날은 내란에 빠진 아이티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한 채 아리스티드 대통령이 쫓기듯 망명길에 오른 바로 다음날이기도 했다.
아이티는 선거, 쿠데타, 내란 그리고 수습의 시나리오가 지루하게 반복돼온 나라다. 아이티는 남미의 카리브해협에 자리잡은 섬나라지만 아이티의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낭만과 꿈속의 카리브가 아닌, 약탈의 해적이 우글거리는 혼돈의 카리브를 떠올리는 편이 낫다. 인구 약 800만명(2003년 추정인구)을 헤아리는 아이티는 절반인 380만명이 기아로, 국민의 80%가 가난에 허덕이고 있다. 그런가 하면 노동 가능 인구 410만명 가운데 단 11만여명이 직업을 갖고 있다. 이 가운데 3분의 1이 공무원으로 구성된 나라(2003년 유엔식량농업기구 자료)라는 사실은 오늘 아이티의 정치·사회적 혼돈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국민 80%가 가난한 카리브해의 나라 이렇듯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인 아이티는 1492년 콜럼버스에 의해 발견되어, 1503년 아프리카의 노예들을 이주시키면서 시작되는 5세기의 역사를 헤아린다. 스페인을 거쳐 1697년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고, 이후 프랑스 혁명의 산물인 ‘노예제도 폐지법’에 의해 18세기 말부터 아이티인들은 탈노예 신분을 획득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의 즉위와 함께 프랑스 식민지들에 대한 ‘노예제 복구’ 파동을 잠시 겪기도 했으나 프랑스군에 대항해 승리를 거둬 1804년에 독립한다. 이로써 흑인 국가들 중 세계에서 제일 먼저 독립을 이룩한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진 나라가 아이티이기도 하다. 1825년 프랑스 왕 샤를 10세가 아이티의 주권을 인정한다. 프랑스는 대신 아이티에 식민지를 포기하는 데 대한 손해 배상금을 청구했다. 이른바 ‘독립 부채’로 불렸던 역사적인 부채다. 프랑스의 한 국회의원은 현재 아이티가 당면한 고난을 극복하고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그 돈을 프랑스가 아이티에 다시 상환해야 한다는 안건을 지난해 제안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독립 부채’ 상환이야말로 아이티 독립 200주년을 진심으로 기념하는 인본주의적인 조처라며 아리스티드 대통령도 지난해 봄부터 프랑스 정부에 상환금 환부를 청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렇게 독립국가가 되었으나 이후에도 경제적, 문화적으로 프랑스에 크게 의존해야하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흑인들과 흑인 혼혈들 사이의 권력다툼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이미 옆나라 도미니크공화국에 진출했던 미군이 1915년 아이티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특기할 만한 아무런 저항도 없었다”고 전해지는 미군의 은근슬쩍 점령 이후 1918년 농민반란으로 수만명의 농민이 학살되는 사태까지 일어난다. 그러면서 더해진 불안정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미군의 점령은 1934년까지 이어졌다. 당시 미군의 감시 아래 국내의 반란은 줄었으나, 그 대가로 이후 아이티에 군사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민중의 ‘희망’마저 쿠데타 일으켜
미국의 점령이 공식적으로 종결된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던 미국의 입김과 아버지와 아들로 이어지는 뒤발리에 세습정권, 그리고 그사이 끊임없는 반란과 쿠데타가 이어지던 20세기 후반 아이티에 메시아처럼 나타난 인물이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였다. 아이티 빈민가 출신인 그는 미국, 이스라엘, 캐나다를 돌며 공부한 뛰어난 신학도였다. 빈민을 위해 앞장서 변호사 역할을 해온 신부였다. 그는 뛰어난 연설과 카리스마적인 명성으로 1980년대 후반 권력의 주요 인물로 등장하고 암살 위협까지 받다가 1990년 대통령 선거에서 70%의 득표율로 대통령직에 취임한다. 당시로선 그야말로 민중의 승리와 아이티의 민주주의적 희망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대통령에 취임한 지 일년도 채 되지 않아 감행된 쿠데타로 아리스티드는 미국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그는 망명기간 동안 아이티의 쿠데타 군사정권에 국제적인 압력을 가하기 위해 선두에서 활약하며 ‘국제원조 봉쇄’ 정책을 감행하도록 유엔과 국제기구들에 호소했다.
유혈의 역사를 겪으면서 가난과 기아에 허덕이던 아이티 국민들에게 국제원조조차 끊긴 최악의 상태였지만, 민주주의를 갈구하던 국민들 대다수는 망명 중인 아리스티드를 정신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다 1994년에 아리스티드는 망명 생활을 접고 유엔과 미 클린턴 행정부의 지원 아래 미군의 보호를 받으며 귀국한다. 망명 생활 3년을 보낸 뒤라 대통령 임기는 얼마 남지 않았다. 법은 대통령 연임을 인정하지 않던 터라, 1996년 아리스티드는 그의 측근 르네 프레발에게 대통령직을 이양한 뒤 겉으로는 일개 시민으로 되돌아갔다. 꼭두각시 대통령 프레발을 앞세워 아리스티드가 권력을 팽창시킨 것으로 평가된 이 기간을 보낸 뒤 2000년 아리스티드는 다시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 선거를 전후로 다시 투쟁으로 온 나라를 피로 물들인다. 미군은 아이티의 안전을 외면하며 철수하고 미국과 유럽의 경제원조도 다시 끊기고 만다.
1990년대 민중의 절대적인 희망이던 아리스티드지만 그가 지배한 아이티의 상황은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의 전임자들과 다름없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 유지를 위해 반민주주의적 압제를 저지르고 부정부패를 거듭했을 뿐이다. 이 과정에서 아이티 현대사 내내 이어지는 엘리트들의 암살과 국외 망명으로 아이티 현지에 뜻있는 엘리트들의 씨가 말라갔고, 권력과 권력을 노리는 자들의 투쟁 속에서 나라와 국민들의 상황은 나날이 심각해졌다.
폭력과 부정부패로 점철되어 권력투쟁을 하는 아이티의 안정 회복은 이제 아이티 독자적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돼버렸다. 하지만 아이티의 역사에 ‘악의 꽃’처럼 들어와 경제적, 군사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미국, 그리고 역사와 문화적인 연계성으로 끈끈하게 이어져 있는 프랑스를 향해 구원의 손길을 갈구하는 이 나라를 국제사회는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아이티의 한 시사잡지는 이렇게 한탄했다. “아이티는 폭탄에 위협받고 있지는 않지만, 이라크처럼 ‘경제원조 봉쇄’로 위협받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핵무기도 없고, 또한 다른 위협을 실행할 힘도 없으며, 그렇다고 석유를 보유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국제사회의 도움 청할 길 없어 막막
지난 1월1일 독립 200주년 기념일을 전후로 나날이 심각해지던 아이티의 내란이 아리스티드의 망명과 유엔의 개입으로 겉보기에는 일단 수습의 국면을 맞고 있는 듯하다. 중앙아프리카 망명길에 오른 것으로 알려진 아리스티드는 자신이 권좌에서 물러난 것은 프랑스와 미국의 음모에 의한 납치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유엔과 미국, 프랑스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일소에 부치고 있다. 음모든 그렇지 않든 확실한 것은 독립 200주년을 맞은 아이티에 다시 외국 군대가 주둔했다는 사실이다. 아이티의 민주주의를 향한 여정은 이제 다시 원점에서 시작해야 하는 고달픈 현실에 맞닥뜨린 셈이다.

혼란에 빠진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선 약탈을 비롯한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다.(SYGMA)
국민 80%가 가난한 카리브해의 나라 이렇듯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인 아이티는 1492년 콜럼버스에 의해 발견되어, 1503년 아프리카의 노예들을 이주시키면서 시작되는 5세기의 역사를 헤아린다. 스페인을 거쳐 1697년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고, 이후 프랑스 혁명의 산물인 ‘노예제도 폐지법’에 의해 18세기 말부터 아이티인들은 탈노예 신분을 획득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의 즉위와 함께 프랑스 식민지들에 대한 ‘노예제 복구’ 파동을 잠시 겪기도 했으나 프랑스군에 대항해 승리를 거둬 1804년에 독립한다. 이로써 흑인 국가들 중 세계에서 제일 먼저 독립을 이룩한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진 나라가 아이티이기도 하다. 1825년 프랑스 왕 샤를 10세가 아이티의 주권을 인정한다. 프랑스는 대신 아이티에 식민지를 포기하는 데 대한 손해 배상금을 청구했다. 이른바 ‘독립 부채’로 불렸던 역사적인 부채다. 프랑스의 한 국회의원은 현재 아이티가 당면한 고난을 극복하고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그 돈을 프랑스가 아이티에 다시 상환해야 한다는 안건을 지난해 제안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독립 부채’ 상환이야말로 아이티 독립 200주년을 진심으로 기념하는 인본주의적인 조처라며 아리스티드 대통령도 지난해 봄부터 프랑스 정부에 상환금 환부를 청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들은 정말 '안전유지'만을 위해 들어왔는가.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거리에 나타난 미군.(SYGMA)

2월21일 기자회견을 연 아리스티드 전 대통령(GAMMA). 그는 미국의 음모에 의해 쫓겨났다고 주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