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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적들의 공격, 혁명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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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1-1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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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티모르 독립지도자 사나나 구스마오의 자전적 수기II- 인도네시아군에 쫓기다

1974년 말 내전이 끝나고 나는 새로운 신문 <티모르레스테>의 발행 책임을 맡았다. 정치적 상황과 해방운동을 주요 뉴스로 다루었던 이 신문은 돌이켜보면 어설프고 미숙했지만 당시에는 그래도 최고로 꼽혔다. 이 결점투성이 신문이 어쨌든 이해될 수 있었던 시절 탓에, 말하자면 우리의 승리는 늘 약점을 지니고도 쉽게 이루어졌다고나 할까.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유일한 정치철학은 ‘자결’이었지만, 실제로 조국에 대한 중대한 책무를 우린 별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한 예로, 당시 포루투갈이 되돌아오기를 원치 않는다고 여겼던 나는 포루투갈이 재식민통치를 추구하며 시간 끌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참 뒤에나 깨달을 정도였으니…. 우리가 깨닫지 못했던 점은 우리가 ‘독립의 환상’에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포루투갈은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오해로부터 결국 모든 것이 망령들린 형상이 되고 말았다. “동티모르는 우리의 것이니 우리에게 남겨달라.” 여기에 당시 나는 전력을 기울일 뿐이었다. 동시에 나는 이미 국경을 넘어 공격해 오는 인도네시아군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기 시작했다.

“장관 엉덩이나 한번 만져볼까?”

(사진/“우리처럼 가난하고 작은 나라의 독립 기념식은 조국을 불태우는 침략전쟁을 불러야만 했다.” 동티모르 독립혁명전선(FRETILIN) 시절 산악에서)
우리는 국가로서 일방적인 독립선언이 필요했다. 그러나 우리처럼 가난하고 작은 나라의 독립 기념식은 간단하게 조국을 불태우는 침략전쟁을 불렀고, 이 의식은 그저 적에게 약탈당하는 행사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만약 독립의 기쁨이 있다면 우리의 심장 속에 감춰져 있었을 뿐이고, 드러난 모든 보물은 공유할 수 없었다. 상황의 심각성이 투영된 민중들의 얼굴은 불안감으로 가득 찼고 누구도 장래에 대해 묻는 이가 없었다. 갈피를 잡지 못했던 우리 모두의 발길은 마냥 유력자들의 정원에 붙박이가 되어갔다. 나는 ‘국경의 눈물’ 같은 비애감을 느끼며 자원해서 전쟁터로 갔다. 우리들이 바로 동티모르 독립혁명전선(FRETILIN)의 초대 중앙위원들이었다.


얼마 뒤, 딜리로부터 초대정부가 구성되었다는 소식이 전선으로 날아들었다. 전선의 동지들 가운데 몇명이 새로운 장관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장관으로 임명된 동지들에 대한 축하는 희박한 단결의 표현일 뿐이었다. 분위기는 급격히 무거워졌다. 동지 몇명이 장관으로 임명된 이들에게 장난을 걸었다. “네가 장관이니? 어디 장관 엉덩이나 한번 만져보자.” 이런 일반적인 정서가 우리 사이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아무런 준비가 없다는 회의적인 생각들과 결합되었다. 나의 정신은 교란되었고 한동안 이런 상태가 계속되었다.

1975년 12월7일, 우리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괴상한 소리에 잠을 깼다. 새벽 3시 반에서 4시 무렵이었을까? 중무장한 인도네시아 군용기들이 머리를 넘어 동쪽 해안을 따라 날아가고 있었다. 이날 오후 우리는 사령부로 가자는 숙의를 했다. “인도네시아 공수부대가 딜리에 상륙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병영에는 수많은 의문들이 흩날렸지만 어느 것 하나도 정확한 결론을 내릴 수 없는 가운데 긴 침묵이 흘렀다. 오후 늦게 우리는 구식 랜드로버자동차로 코만도다루타 총사령부에 도착했다. 그리고 우리는 딜리를 향해 쏟아지는 폭격과 함포사격이 고갯마루를 넘어서 또 나무 뒤에서 우리를 향해 꽂혀오는 것을 경험했다. 이어서 우리는 인도네시아 군인들의 약탈상을 망원경을 통해 목격했다.

인도네시아 수송선들이 물건들을 싣고 또 실으며 복부를 팽창시켰고 육중한 기중기들이 인도네시아의 탐욕을 거들었다. 수송선들이 딜리 세관의 물건들을 모조리 실어나가는 동안 딜리의 언덕들을 넘어 각종 전쟁 무기들이 불을 토했다. 같은 시간 시민들의 행렬이 끝없이 산악으로 이어졌고, 나는 탈진한 그들이 두려움도 잊은 것을 보았다. 체념한 그들의 눈망울을 보았고, 영혼을 학대당한 그들의 격심한 통증을 보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웃을 줄 알았고, 이 미소를 통해 스스로 고통을 경감시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진정한 산악혈통과 마주치다

(사진/“오늘을 위하여.” 지난해 동티모르 선거가 끝난 뒤 인도네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의 대표들과 함께한 구스마오(가운데).)
자연인 사나나. 가족들을 찾아 딜리로 잠입한 나는 병원을 방마다 뒤지고 다녔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가족들은 찾을 수가 없었다. 다시 친구나 지인들의 귀띔을 따라 옛 오스트레일리아 영사관으로 피했다는 가족을 찾아나섰으나, 그쪽에서 피난 나오는 이들은 나를 극구 말렸다. “찾을 길이 없다. 방금 우리가 그쪽에서 오는 길인데 그 주변의 교차로는 격렬한 상황이다.” 나는 말없이 현장쪽을 바라보며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런 상황에서 무슨 말이 필요했겠는가? 스스로의 무기력을 드러내고 더 큰 상처만 줄 뿐. 적들은 딜리에서 서쪽으로 진격을 시도하면서 아이레우의 우리 본부를 향했다. 우리는 고립된 기분으로 그날 밤 아이레우에 도착했고, 이미 깊숙한 산악으로 옮겨가버린 사령부를 따라 계속 행군해 들어갔다. 그리고 적들이 가까워오자, 당시 우리의 지휘관이었던 니콜라우 로바타는 “중앙위원회 위원들은 각자의 진로를 결정하라”고 명령했다. 나는 마나투토의 고향쪽을 선택했고 일부 동지들이 나를 따랐다. 산악을 가로지르는 그 길은 매우 험난했고 나는 처음으로 고향 땅의 복부로 잠복했다. 전에는 결코 느껴보지 못했던 분위기를 경험하면서. 짙은 안개가 우리를 환영하며 싸늘하게 포옹했고 거대한 유카립투스나무를 떠받쳐주고 생명을 주는 황갈색 대지는 부드러운 빛깔로 우리를 맞이했다.

산악의 어느 날 밤 한 오두막, 젊은이들의 열정적인 소리에 맞서는 늙은 부부의 절제된 화음이 차가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던 그 고향의 노래. 그 기억들을 지금도 나는 참 감사히 여기고 있다. 코토모룩(쓴콩)을 먹으며, 다우로록(야자로 빚은 술)을 마시며, 입김으로 불을 지피며 숨막히는 연기 속에서 처음으로 나의 진정한 산악혈통과 마주친 사실을 참마음으로 자축했다. 이건 전쟁의 폭발로 산산이 부서지는 가운데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은 쓴 기쁨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1976년 5월, 소이바다에서 최종적으로 항쟁을 위한 조직을 결성하고 레지스탕스 운동을 선언하는 역사적인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는 조국 해방전쟁의 진정한 지주였다. 당시 많은 논쟁들이 있었지만, 결국 행동은 이념과 개념에 대한 내부투쟁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다.

이 회의의 결정에 따라 나는 비쿼쿼지역에 배속되었다. 나는 결코 어떤 조직화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한 적이 없었고 어떤 모임들에서도 연설한 적이 없었지만 스스로 정치적 양식을 터득해 나갔다. 적들이 바우카우-비쿼쿼라인을 가로질러 해안과 해안을 장악할 즈음, 지역 부서기장에 임명된 나는 극단적으로 힘들었던 그 6개월 동안 철저하게 나의 개인적인 방식에 의존했다. 예를 들면, 다른 지휘관들이 민중에게 복잡한 정치적 발언을 할 때, 그 말들을 이해하기가 버거웠던 나는 스스로 다짐했다. 결코 이런 방식의 말을 위한 말을 하지 않겠노라고. 따지고보면, 이게 내 정치적 의지의 첫발이었던 셈이다.

사나나여, 항복하라!

어쨌든 모두가 굶주림으로 격앙되었던 그 시절, 섬의 동쪽 변방 사람들은 적들의 침공에 따라 서쪽으로 쫓겨가고 있었다. 이들은 급히 피난길에 오르다보니 먹을거리를 챙겨 갈 수 없었고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갔다. 나는 동지들을 조직해서 5일 동안 이 지역의 안전을 확보해 주었고 그 사이에 사람들은 먹을거리를 되찾거나 짐승들을 숨길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적들이 침공해 들어오자 사람들은 침착성을 잃기 시작했다. 그래도 일부 주민들은 적에게 항복을 거부하고 무작정 무리지어 서쪽으로 떠나갔다. 나는 이들을 만나 은밀한 조직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적들은 우리의 보급기지를 파괴시키기 위해 강력한 공격을 개시했고, 1978년 말 우리는 적들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해 마테비안산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나는 당시 우리의 전투의지와 자제력, 그 용감한 장면들을 생생히 두 눈에 담고 있다. 감격스럽게 찾은 땅, 그러나 걱정과 신념이 뒤섞인 의심스러운 해방구 마테비안은 결국 좀더 많은 희생을 요구하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테비안은 말 그대로 사람들로 꽉 찼고 새로 도착한 이들과 원주민들 사이에 끊임없이 문제가 발생하던 가운데, 적들이 진격해 들어오면서 나는 마테비안의 서부지역으로 배속되어 갔다. ‘폭발’ ‘죽음’ ‘공습’ ‘비명’ ‘퇴각’. 이상하리만치 민중은 조용해졌다. 희망을 버렸거나 아니면 진정으로 모두가 함께 그곳에서 죽을 준비를 했던 것인지…. 결국 우리 부대는 퇴각했고 적들은 몰아닥쳤다. 어느 날 새벽 나는 인도네시아군이 큰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잠을 깼다. “부서기장 사나나, 더이상 싸울 필요가 없다. 사람들에게 항복하라고 전해라.” 적들은 야음을 틈타 움직였고 막 전략지를 공격해오고 있었다.

사나나 구스마오(Xanana Gusmao)/ 티모르항쟁민족회의(CNRT)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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