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농 문제’로 몸살 앓고 있는 중국의 현주소… 도농간 소득격차 갈수록 벌어져
베이징= 글 · 사진 박현숙 전문위원 strugil15@hanmail.net
1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쉬궈웨이씨와 그의 아내는 며칠 전부터 내내 마음이 들떠 있었다. 베이징으로 돈 벌러 온 뒤 처음으로 맞이하는 설인데다, 올해 5살이 된 어린 아들을 1년 만에 만난다는 생각에 그와 아내는 기차를 타기 전부터 마음은 이미 고향 네이멍구에 도착해 있다. 아들에게 입힐 설빔이랑 부모님 선물은 진즉에 사놓았지만, 막상 고향행 좌석 기차표를 구하지 못해 할 수 없이 입석표를 샀다. 그래도 입석표나마 구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그것마저 구하지 못한 사람들도 주변에는 수두룩하다.
고향에는 봄이 오지 않는다
쉬궈웨이씨는 베이징의 한 아파트단지 부근에서 오토바이 자전거 인력거꾼을 하고 있고, 그의 아내는 근처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을 하고 있다. 두 사람이 한달 내내 베이징에서 버는 수입은 2천위안(약 30만원)이 채 안 된다. 그래도 고향에서 농사를 지을 때보다는 3~4배 이상의 고소득(?)이라고 한다. 고향인 네이멍구 츠펑 근교의 농촌에서 돼지·양·닭 등을 기르고 옥수수 등 각종 농사를 지어도 한달에 순수입 500위안(약 7만5천원) 이상의 수입을 올린 적이 없었다. 그것도 부모님과 아내 등 전 가족의 수입을 다 합친 것이다. 더 이상 농사로는 먹고 살기 힘들다는 판단이 들어 여기저기 빚을 내서 마을에서 조그만 소매점도 해보았지만 그 역시 벌이가 신통치 않아서 ‘파산’을 했다. 그 뒤 쉬씨 부부는 미련 없이 고향을 떠났다. 베이징에서 허드렛일이라도 하면 아무리 못 벌어도 고향에서 농사짓는 것보다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린 아들을 부모님께 맡기고 두 부부가 함께 베이징으로 돈벌이를 떠나왔다. 베이징으로 온 뒤 그들은 ‘역시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번씩 하곤 한다. 농사지을 때의 소득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하늘과 땅이기 때문이다. 설을 나흘 앞둔 베이징 남역에는 귀성 인파로 한바탕 전쟁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돈이 있건 없건 고향에서 설을 지낸다”는 중국인의 전통적인 풍속은 올 설에도 어김없이 수많은 농민공(도시로 돈벌이를 떠나오는 농민노동자)들을 한바탕 귀향 전쟁으로 몰아넣었다.
설 연휴가 한창인 1월24일, 중국 광저우 시내의 한 지하도에서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불을 둘러쓰고 잔뜩 웅크린 채 앉아 있다. 언뜻 보면 도시 부랑자나 거지로 오해하기 쉽지만 무리지어 앉아 있는 모양새가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다. 그 중 한 사람이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선전에서 건축공으로 일하는데 노임을 떼먹혀서 고향으로 가지도 못하고 여기 죽치고 있소. 벌써 1년치 노임을 못 받았단 말이오. 사장이 도망갔다고 합디다. 어떻게 해서든 밀린 노임을 받아내 고향을 가야겠는데, 대체 어디 가서 사장을 찾아낸단 말이오?”
‘농민공’들의 하소연, 분신으로 이어져
2003년 10월24일, 중국 충칭시의 한 농촌 마을에서 촌부 시옹더밍도 이와 비슷한 하소연을 했다. 그의 하소연을 들은 사람은 마침 농촌 시찰 중이던 국무원 총리 원자바오였다. 그는 자신의 남편이 도시에서 건축공으로 일하고 있는데, 1년치 노임을 받지 못하고 있다며 “총리님이 제발 해결해달라”고 읍소했다. 그의 사연을 전해 듣고 격노한 원자바오 총리는 그날로 당장 “농민공들의 밀린 월급 문제를 조사, 해결하라”고 하달하였고, 그 뒤 ‘농민공의 밀린 월급 문제’는 일약 중국 최대의 ‘톱뉴스’가 되었다. 촌부 시옹더밍은 그해 연말 가 선정한 ‘올해의 경제인물’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시옹더밍이 원자바오에게 농민공들의 밀린 월급 문제를 하소연한 뒤 전국 각지의 지방정부에서는 설을 앞두고 월급을 받지 못한 현지 농민공들에게 월급을 대신 지급하는 등 농민공 문제에 대한 대대적인 여론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더불어 농촌·농업·농민 문제라고 불리는 이른바 ‘삼농 문제’가 다시 중국 사회의 화두로 떠올랐다.
2000년 3월2일, 중국 후베이성 치판샹의 젊은 당서기 리창핑은 그날 밤 국무원 총리 주룽지에게 한통의 편지를 썼다. “농민들은 정말 고생하고 있고, 농촌은 정말 가난하며, 농업은 정말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원자바오에게 농민공들의 밀린 노임 문제를 호소한 충칭의 촌부 시옹더밍과 마찬가지로, 리창핑의 편지는 중국 전역에 이른바 ‘삼농 문제’의 심각성을 불러일으킨 일대 ‘사건’이 되었다. 당시 주룽지 총리의 각별한 ‘관심’을 받으며 시옹더밍과 마찬가지로 리창핑은 일약 중국 사회의 ‘스타’로 떠올랐지만, 아직까지 중국 내 삼농 문제는 ‘고생과 가난,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급기야 지난해 10월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는 농민들의 잇따른 분신자살 기도가 있었는가 하면, 올해 초에는 두 부부작가가 2년간 자비를 들여 직접 발품을 팔아 중국 농촌의 참상을 취재, 기록한 <중국 농민 조사>라는 르포집이 출판되어 중국 전역에 삼농 문제의 실상에 대한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중국의 <당대문학>이라는 잡지에 연재되다 책으로 출간된 이 르포집은 중앙정부가 경악했을 정도로 중국 농촌 문제의 참상을 생생하게 고발하고 있다.
삼농 문제가 중국 사회의 핵심 문제로 대두되면서 올해 2월8일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와 중국 국무원에서도 18년 만에 처음으로 농민의 수입 증대와 삼농 문제를 내용으로 하는 ‘제1호 문건’을 발표했는가 하면, 후진타오 국가주석은 일본 공명당 대표들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취임 이래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바로 “삼농 문제 해결”이라고 답변하기도 했다.
최근 중국사회과원에서는 도시와 농촌간의 소득격차는 기존의 통계 발표와는 달리 이미 세계 최대 수준인 6배까지 차이가 나고 있다는 조사발표를 했다. 이에 따르면 도시와 농촌 사이의 평균 소득차는 1995년에 2.8배이던 것이 2002년에 3.1배로 나타났으나, 농민들은 도시 주민들과는 달리 의료비와 실업보험, 양로비 등 각종 사회보장 혜택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공식적인 통계에서는 계산되지 않는 이러한 요인들을 다 포함한다면 도농간 소득격차는 6배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격차는 세계 최대 수준이다. 이는 사회안정을 심각하게 해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폭동까지도 유발할 수 있다. 실제로 현재 중국 농촌 곳곳에서는 농민들과 지방정부간에 잦은 마찰이 일어나고 있고, 지난해 발행된 격월간 잡지 <전략과 관리>에는 현재 중국 농촌에서 조직적인 저항이 일어나고 있다는 조사서가 발표되기도 했다.
80년대 중반 이후 다시 ‘배고픈 시절’
1977년 당시 중국 안후이성 서기를 맡고 있던 완리(현 공산당 원로간부)는 농가를 시찰하는 가운데 한 농민청년에게 “무슨 요구사항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청년은 “배부르게 먹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그 뒤 1978년 중국 개혁·개방 정책은 바로 이렇게 배부르게 먹기를 원하는 농민들을 위해 대대적인 농촌개혁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농촌개혁 초기 잠시 ‘배부르게’ 밥을 먹을 수 있었던 농민들은 개혁의 중점이 도시로 옮겨진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다시 ‘배고픈 시절’을 맞게 되었고, 1980년대 후반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른바 ‘민공조’(民工潮) 현상이라는 말을 만들어내면서 도시로 돈벌이를 떠나오고 있다. 남아도는 농촌 인구와 경작지의 부족, 그리고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지는 도농간 소득격차는 8억 농민들에게 ‘파산선고’를 하게 만들었다.
1년 만에 어린 아들과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쉬씨 부부가 탄 네이멍구 츠펑행 기차에는 이렇게 ‘파산당한’ 수많은 농민들이 손에 선물 보따리를 한 아름 안고 꾸역꾸역 밀물처럼 올라타고 있었다.

도시의 한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농민공들. 도시로 돈벌이를 떠나오는 농민들은 도시 하층민이 되고 있다.
쉬궈웨이씨는 베이징의 한 아파트단지 부근에서 오토바이 자전거 인력거꾼을 하고 있고, 그의 아내는 근처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을 하고 있다. 두 사람이 한달 내내 베이징에서 버는 수입은 2천위안(약 30만원)이 채 안 된다. 그래도 고향에서 농사를 지을 때보다는 3~4배 이상의 고소득(?)이라고 한다. 고향인 네이멍구 츠펑 근교의 농촌에서 돼지·양·닭 등을 기르고 옥수수 등 각종 농사를 지어도 한달에 순수입 500위안(약 7만5천원) 이상의 수입을 올린 적이 없었다. 그것도 부모님과 아내 등 전 가족의 수입을 다 합친 것이다. 더 이상 농사로는 먹고 살기 힘들다는 판단이 들어 여기저기 빚을 내서 마을에서 조그만 소매점도 해보았지만 그 역시 벌이가 신통치 않아서 ‘파산’을 했다. 그 뒤 쉬씨 부부는 미련 없이 고향을 떠났다. 베이징에서 허드렛일이라도 하면 아무리 못 벌어도 고향에서 농사짓는 것보다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린 아들을 부모님께 맡기고 두 부부가 함께 베이징으로 돈벌이를 떠나왔다. 베이징으로 온 뒤 그들은 ‘역시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번씩 하곤 한다. 농사지을 때의 소득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하늘과 땅이기 때문이다. 설을 나흘 앞둔 베이징 남역에는 귀성 인파로 한바탕 전쟁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돈이 있건 없건 고향에서 설을 지낸다”는 중국인의 전통적인 풍속은 올 설에도 어김없이 수많은 농민공(도시로 돈벌이를 떠나오는 농민노동자)들을 한바탕 귀향 전쟁으로 몰아넣었다.

베이징 남역 안에서 한 농민공이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삶의 고단함이 가득 배어난다.

베이징 고가도로에서 농촌에서 상경한 한 여학생이 “학비가 없어 학교를 그만두어야 하는 형편”이라며 도움을 호소하는 대자보를 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