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만에 천당에서 지옥으로 추락한 하워드 딘, 그는 왜 몰락했으며 그가 남긴 것은 무엇인가
로스앤젤레스= 신복례/ 자유기고가 boreshin@hanmail.net
‘Turn-on, Turn-off’.
하워드 딘의 ‘선거혁명 도전사’에 딱 들어맞는 제목이다. 미국 45대 대통령 선거의 민주당 경선 후보로 나섰던 하워드 딘 전 버몬트 주지사는 지난 2월18일 경선에서 전격 하차했다. 지난해 6월부터 수많은 화제를 뿌리며 미국 정치무대를 뒤흔들었던 딘의 혁명 여정은 8개월 만에 실패로 막을 내렸다.
‘제2의 라폴레트 좌절’ 딘 후보는 온라인에서 떠서 오프라인에서 스러졌다. 지난해 2월까지 딘은 철저한 무명이었다. 버몬트주를 제외하곤 이름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딘에겐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바로 ‘인터넷’이었다. 버몬트주 출신의 젊은 참모들과 자원봉사팀은 ‘진보성’을 앞세워 온라인을 공략해나갔다. 조지 부시 대통령과 보수진영의 아집과 독선을 신랄하게 공격하면서 네티즌들의 지지를 구했다. 인터넷의 빠른 전파력을 통해 딘의 이름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주 사용자인 젊은층의 지원은 폭발적이었다. 웹사이트 ‘meetup.com’의 회원들은 한국의 ‘노사모’에 버금가는 ‘딘사모’를 결성해 조직적인 후원에 나섰다. 딘을 주제로 한 블로그가 수만개에 이를 정도였다. 그 결과 딘은 지난해 5월 미국 정치 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인터넷 예비선거에서 8명의 경쟁주자를 물리치고 선두를 차지함으로써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득표율은 무려 43.87%로 과반수에 육박했다. 딘은 젊은 네티즌 지지자들을 등에 업고 대선판도를 질주했다. 그 절정은 지난해 12월. 모든 설문조사에서 딘은 부동의 1위였다. 어떤 후보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대선 맞수인 부시 대통령과의 가상 대결에서도 우위를 점했다. 언론들은 ‘인터넷 선거혁명’을 전망하며 딘에게 하이라이트를 비췄다. 그러나 오프라인 무대는 적어도 딘에게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막상 당원 선거가 시작되자 양상은 정반대로 나타났다. 지난 1월19일의 아이오와 코커스 첫 대결에서 딘은 존 케리 상원의원에게 밀려 2위에 그쳤다. 이때부터 2월17일 위스콘신 예비선거까지 16개 주에서 단 한번도 1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결국 위스콘신 선거가 끝난 뒤 딘은 경선을 포기하고 말았다. 말 그대로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데 걸린 시간은 딱 한달이었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딘의 도전 스토리는 많은 뒷얘기를 낳았다. 억측도 난무했다. 하지만 여론은 대부분 딘에게 찬사를 보냈다. 비록 실패했지만 ‘인터넷 선거혁명’이라는 위업에 도전한 것만으로도 그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뉴욕타임스>는 사퇴 다음날 칼럼에서 ‘제2의 라폴레트 좌절’이란 제목으로 딘의 실패를 안타까워했다. 딘을 미 진보정치가의 원조로 꼽히는 로버트 매리언 라폴레트 전 위스콘신 주지사 (1855~1925)와 비교한 것이다. 공화당 출신이면서도 20세기 최초의 미국 개량주의적 정치운동인 프로그레시비즘(혁신주의) 운동의 지도자였던 라폴레트는 독점자본 반대, 정치개혁, 제국주의 반대 등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뛰어난 추진력과 대중을 휘어잡는 연설솜씨로 ‘Fighting Bob’이란 애칭으로 불렸다. 위스콘신 주지사로 재임하던 1900년부터 6년 동안엔 정치개혁뿐 아니라 철도, 환경, 교통, 대민 서비스 등 각 분야를 관장하는 시민위원회를 구성해 미국 최초로 ‘참여정치’를 열었던 당사자다.
이들 시스템은 10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거의 원형 그대로 미국 전체 주에서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연방 하원·상원 의원도 지낸 라폴레트는 1924년 혁신당을 창설해 대통령 후보로 나섰으나 보수세력의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했다.
‘검은 정치자금’의 굴레 벗어던져
‘제2의 라폴레트’는 딘 몰락의 첫 번째 이유이기도 했다. 딘은 ‘파이터’, 즉 부시에 대항하는 ‘투사’였다. 그는 이라크 전쟁을 통렬하게 비난하고 부유층에 대한 감세정책을 “가진 자에 대한 특혜”라며 몰아붙였다. 공격도 직선적이었다. 그의 연설에 완곡한 표현이란 없었다. 젊은 네티즌들은 딘의 강렬한 연설에 환호했다. 그러나 결국 그게 발목을 잡았다. 진보성과 투사 이미지는 대다수 유권자들에게 거부감을 일으켰다. 민주당의 주 지지층인 저소득층과 소수계들은 딘의 연설과 정책에 쾌감을 느끼는 한편, 불안감도 함께 가졌다.
첫 판이었던 아이오와 코커스에서의 연설은 딘 몰락의 신호탄이었다. 그는 트레이드마크인 열혈 연설로 부시에게 집중 포화를 퍼부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당원들은 환호보다 ‘공포’를 느꼈다. 급격한 변화에 대한 불안감 바로 그것이었다. 특히 테러전쟁의 과정에서 ‘애국심’에 젖어 있는 건 민주당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뉴스위크>의 표현대로 민주당원들은 ‘가슴과 머리 사이에서’ 고민에 빠졌다. 결국 당원들은 투사 대신 보통 후보인 존 케리에게 표를 몰아줬다.
상대 진영의 집중 공격도 한몫했다. 경선 라이벌뿐 아니라 부시 진영에서도 딘을 상대로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좌파’에서 ‘공산주의자’까지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존 케리 후보는 아이오와부터 20여 차례의 TV광고에서 딘을 ‘철부지 싸움꾼’으로 몰아붙였다. 지난 1960년 이후 민주당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한 것은 지미 카터와 빌 클린턴처럼 온순한 이미지를 가진 중도파의 경우뿐이었다. 투사 딘 후보를 대선에 내보냈다가는 버몬트주를 제외하곤 모든 주에서 패배할 것이 확실하다고 공격했다.
또 하나의 결정적인 패인은 바로 인터넷이었다. 딘 열풍을 부른 인터넷은 ‘명약’이자 ‘독약’이었다. 사이버 폭발력에 전적으로 의존했던 딘 진영의 선거운동은 끝내 경직성을 벗지 못했다. 딘은 종래의 풀뿌리 방식을 고집했다. 인터넷을 통한 지지층의 확대가 곧 ‘현장의 표’로 연결되기에는 아직 모든 여건이 성숙하지 않았음을 깨닫지 못했다.
‘파르티잔 방식’으로 언론에 명명된 딘의 캠페인은 아이오와 코커스 패배 뒤 아무런 변화도 갖지 못한 채 열혈 지지층만 줄곧 파고들었다. 가령 딘은 뉴햄프셔 예선 이후 유세현장에서 늘 같은 양복을 입고 나타났다. 끈기와 변함없는 열정을 보여주기 위한 컨셉트였지만 결과는 대다수 여성 유권자들이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결국 풀뿌리 민주주의를 제창하며 일약 전국적 정치스타로 발돋움한 딘은 풀밭을 벗어나지 못하고 좌절했다.
하지만 딘의 성과는 결코 가볍지 않다. 특히 이번 캠페인 과정에서 보여준 인터넷 모금방식은 지난 수십년간 미국 정치를 멍들게 한 ‘검은 정치자금’의 굴레를 벗어던졌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딘은 인터넷에서만 무려 31만8884명의 기부자를 모았다. 지난해에만 4100만달러(약 5천억원)를 모금했다. 이 중 상당액이 소액 기부자들과 30대 이하 청년층으로부터 모아졌다는 점에서 미 정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압권은 지난 2월5일 사퇴하기 이전 모금 캠페인이었다. 위스콘신 예비선거에 사활을 걸었던 딘 진영은 자금이 달리자 전국의 60만 지지자들에게 긴급 이메일을 보냈다. “이번 선거에서 지면 끝장이다. 텔레비전 광고를 위해 70만달러가 필요하다. 오늘 안으로 50달러씩 기부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역사상 유례없는 깜짝 모금이었지만 지지자들은 하룻만에 70만달러 가까이 돈을 모아줬다.
인터넷 네트워크, 엄청난 자산
그가 구축한 인터넷 네트워크도 소중한 자산이다. 이미 민주당 지도부는 딘 진영에게 이 네트워크를 대선에서 활용할 것을 제안해놓은 상태다. 또 올해 대선과 함께 실시되는 각종 선거 출마자들도 딘에게 앞다퉈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 딘의 ‘정치실험’은 실패했다. 그러나 업적은 남았다. 사퇴 뒤 미국 언론은 최상의 형용사로 딘에게 박수를 보냈다. 미국의 정치문화를 바꿀 선구자 역할을 했다며 찬사를 던졌다. 사퇴 연설에서 딘은 “부시를 향한 투쟁은 더욱 강력해질 것”이라고 말했지만 미국의 유권자들은 딘이 꿈꾼 ‘정치혁명’이 이미 시작됐음을 알고 있는 것 같다.

2월15일 위스콘신주의 한 대학주점을 기습 방문해 학생들을 상대로 유세하고 있는 하워드 딘. 지난해 12월 모든 여론조사에서 딘은 부동의 1위였다.(AP연합)
‘제2의 라폴레트 좌절’ 딘 후보는 온라인에서 떠서 오프라인에서 스러졌다. 지난해 2월까지 딘은 철저한 무명이었다. 버몬트주를 제외하곤 이름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딘에겐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바로 ‘인터넷’이었다. 버몬트주 출신의 젊은 참모들과 자원봉사팀은 ‘진보성’을 앞세워 온라인을 공략해나갔다. 조지 부시 대통령과 보수진영의 아집과 독선을 신랄하게 공격하면서 네티즌들의 지지를 구했다. 인터넷의 빠른 전파력을 통해 딘의 이름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주 사용자인 젊은층의 지원은 폭발적이었다. 웹사이트 ‘meetup.com’의 회원들은 한국의 ‘노사모’에 버금가는 ‘딘사모’를 결성해 조직적인 후원에 나섰다. 딘을 주제로 한 블로그가 수만개에 이를 정도였다. 그 결과 딘은 지난해 5월 미국 정치 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인터넷 예비선거에서 8명의 경쟁주자를 물리치고 선두를 차지함으로써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득표율은 무려 43.87%로 과반수에 육박했다. 딘은 젊은 네티즌 지지자들을 등에 업고 대선판도를 질주했다. 그 절정은 지난해 12월. 모든 설문조사에서 딘은 부동의 1위였다. 어떤 후보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대선 맞수인 부시 대통령과의 가상 대결에서도 우위를 점했다. 언론들은 ‘인터넷 선거혁명’을 전망하며 딘에게 하이라이트를 비췄다. 그러나 오프라인 무대는 적어도 딘에게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막상 당원 선거가 시작되자 양상은 정반대로 나타났다. 지난 1월19일의 아이오와 코커스 첫 대결에서 딘은 존 케리 상원의원에게 밀려 2위에 그쳤다. 이때부터 2월17일 위스콘신 예비선거까지 16개 주에서 단 한번도 1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결국 위스콘신 선거가 끝난 뒤 딘은 경선을 포기하고 말았다. 말 그대로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데 걸린 시간은 딱 한달이었다.

젊은 네티즌들은 딘의 강렬한 연설에 환호했으나, 진보성과 투사 이미지는 대다수 유권자들에게 거부감을 안겨줬다.(GAMMA)

2월18일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경선 사퇴를 선언하는 하워드 딘 전 버몬트 주지사.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데 걸린 시간은 딱 한달이었다.(AP연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