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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세르비아- 차라리 ‘전범’이 다스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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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2-0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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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파 총선 압승으로 혼란스러운 세르비아를 가다… 미국 · 유럽은 소수당 연립정부권 구성 압박

키시리에보 · 베오그라드= 글 · 사진 하영식 전문위원 youngsig@teledomenet.gr

발칸의 화약고 세르비아가 또다시 요동치고 있다.
베오그라드에서 약 100km 떨어진 키시리에보는 500여명의 주민들이 사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농사가 주된 일거리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가까운 이탈리아나 오스트리아로 일자리를 찾아 떠난 탓에 젊은이들 보기가 힘든 곳이 돼버렸다.

지난 총선 때 밀로셰비치의 세르비아사회당을 지지하는 대중집회가 열리고 있다.

“친미당이 우리를 굶주리게 했다”


이곳의 고등학교에서 30년간 화학을 가르쳐온 스타노에비치(53) 교사는 과거 티토 정권기의 이른바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현재의 어려운 시절을 달래고 있다. 티토가 집권하던 당시, 젊은 교사였던 그가 받은 월급은 30년 뒤인 현재 그가 받고 있는 월급의 두배였다. 당시 티토의 사회주의 체제 아래서는 의료·교육·주택·연금·직업 등이 완전히 보장된 풍요로운 생활을 했다. 그러나 지금 화학을 가르치는 그가 교육현장에서 느끼는 비애는 만만치 않다. “25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의 교육수준이나 환경은 오스트리아보다 훨씬 높았는데, 지금은 학교 예산이 없어 고물이 된 실험도구를 그대로 쓰고 있는 형편”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더구나 이전에는 학생들이 시골에서 도시의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경우, 체류비까지 정부에서 지급했지만 지금은 학생들이 부담하게 됐고 수업료까지 부담하는 제도로 바뀌고 있다.

며칠 전 끝난 세르비아 총선에 대해 얘기하는 중에 자연스럽게 나온 말이다. 그는 “세르비아급진당(SRS)을 찍었다”고 서슴없이 밝히면서 “현 집권당이 친미·친유럽 정책으로 세르비아 국민들의 생활을 파탄시켰다”며 분노를 터뜨렸다.

지난해 12월28일 혹독한 추위 속에서 진행됐던 세르비아의 총선거에서는 650만명을 넘는 유권자들이 참가해 250명의 세르비아 의원들을 선출했다. 이번 총선에서는 19개 정당과 그룹에서 4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입후보해 열띤 경쟁을 벌였다. 또 세르비아 총선의 공정성을 높이기 위해 외국인 활동가 180명과 세르비아인 활동가 5천여명이 총선감시단을 결성하고 투·개표 과정을 참관해 세계가 여전히 세르비아에 큰 관심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번 선거에서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의외의 결과가 나타났다. 세르비아급진당이 28.5%의 표를 획득해 의회에서 82석을 확보했다. 제2당은 옛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이던 코슈투니차가 이끄는 세르비아민주당(DSS)으로 53개 의석을 확보했다. 집권당인 민주연합(DS)은 12.6%로 37석을 얻는 데 그쳤다. 그리고 이번 선거에서 완전히 소멸될 것으로 예상됐던 밀로셰비치의 사회당은 22개 의석을 차지하면서 밀로셰비치가 다시 정치적으로 부활하는 계기가 됐다. 이번 선거에서 세르비아급진당이 제1당으로 부상하자 세르비아 국민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예상대로 집권당이던 민주연합파(DS)는 국민들 사이의 저조한 인기가 그대로 투표에 반영되어 3위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번 총선 결과로 가장 당혹스러워하는 쪽은 미국과 유럽연합이다. ‘반미와 민족자주’의 기치를 내세운 세르비아급진당이 세실리 당수가 헤이그에서 전범 혐의로 투옥돼 재판을 받고 있는 와중임에도 다수당으로 부상한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세르비아급진당은 헤이그 전범재판 협력 거부와 크로아티아와의 외교관계 단절 등 많은 반미·반유럽 정책들을 내놓은 바 있다. 지금 미국과 유럽에서는 선거에서 참패해 실의에 빠진 소수당들에게 연립정부 구성을 종용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은 세르비아급진당이 주축이 된 연립정부가 들어설 경우 세르비아와 나아가 모든 발칸 지역에서 정치적 기반을 상실할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에 노심초사하고 있다.

재선거 해도 급진당 표몰이

그리고 급진당이 정권을 잡을 경우 현재 헤이그에서 진행되는 발칸전쟁의 전범재판에 상당한 차질을 가져와 나토 동맹국들인 미국과 유럽이 역공을 당할 수 있다는 우려도 깔려 있다. 이 때문에 선거 결과가 발표된 뒤 베오그라드의 미국대사관은 ‘소수당들의 연립정부 구성’이라는 사상 초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고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세계은행도 대출금을 빌미로 공개적인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1월29일, 세계은행 세르비아지부장인 로리 술리반은 민주블록의 당 지도자들을 만난 뒤 기자회견을 통해 연립내각을 신속히 구성할 것을 제안하면서, “정치 상황이 불안해 무이자 차관 1억1천만달러의 대출 계획을 취소할 수도 있다”는 협박성 경고를 했다. 그리고 세르비아와 자동차 공장 투자 협상을 벌이던 ‘누카르고’ 자동차판매소 대표 말콤 브리클린은 2억달러어치 규모의 협상을 ‘정치적인 불안정’이란 이유를 들어 취소했다.

선거 벽보 앞에 서있는 세르비아 청년들. 이들은 현 집권당이 친미 정책으로 국민생활을 파탄시켰다고 주장한다.
가장 위협적인 내정간섭 압력은 유럽연합의 외교위원장인 솔라나에게서 나왔다. 선거결과가 발표된 다음날, 솔라나는 “모든 민주세력이 함께 협력해 유럽연합의 개혁 일정을 강력하게 추진할 새 정부가 빨리 들어서기를 호소한다”는 공식 발표를 통해 선거에서 참패한 소수당들에게 연립정부를 구성할 것을 촉구했다.

이에 호응하듯 코슈투니차가 대표로 있는 제2당인 세르비아민주당은 제3당인 옛 집권당이었던 민주당과 4당, 5당까지 가세한 ‘민주블록’을 만들어 연립정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세르비아의 선거제도는 다른 나라와는 달리 유권자들이 입후보한 개인을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정강정책을 내세운 당에 투표를 하는 방식이다. 입후보한 개인들은 당의 후보 명단에 공고되고 유권자들은 이들의 면면과 당의 정책을 검토한 뒤 투표하게 돼 있다. 당의 의석 배분은 총투표 수에서 총득표 수를 계산하여 분배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득표율이 5% 이하인 정당과 그룹의 표는 죽은 표로 규정돼 다른 당에 분배된다.

물론 정부의 구성은 투표의 향배와는 달리 나타날 수 있다. 대체로 수십개의 당들이 난립하는 양상을 보이기 때문에 한 당이 과반수를 차지하기 어렵다. 바로 이 때문에 언제나 다수당이 다른 하나의 소수당과 손잡고 연립정부를 구성하게 된다. 그러나 소수당들이 연합해 연립정부를 구성함으로써 제1당이 ‘왕따’를 당하는 경우도 있어, 국민들의 뜻은 완전히 실종되는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무리수를 통해 이뤄진 정부는 제대로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정치적 위기가 오면 금방 깨지기 때문에 국정 연속성이 상실되는 문제가 있다.

현재 총선 뒤 진행되고 있는 연립정부 구성을 위한 협상에서는 1등을 한 다수당인 세르비아급진당이 나름대로 연립정부 구성을 위해 민주블록의 소수당들과 협상을 벌이고 있고 민주블록 내부에서도 갈등이 표출되고 있기 때문에 총선이 한달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도 정부가 구성되지 않고 있다.

현재 다수당이 된 상태에서도 연립정부를 구성할 수 없는 이유를 세르비아급진당의 지도자인 부대표 드라간 토도르비치는 미국 때문이라고 말했다. 급진당에서도 연립정부를 꾸리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미국과 유럽의 지원을 받던 소수정당이 감히 급진당과 손잡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정치적 기로, 연립정부 구성은 첩첩산중

지금 세르비아는 정치적으로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1999년 나토의 폭격과 2000년 10월에는 밀로셰비치의 퇴진으로 이어진 봉기가 있은 뒤, 세르비아에는 선거를 통해 최초로 친미·친유럽 정권이 들어섰다. 그 뒤 밀로셰비치와 그의 각료들, 군부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전범으로 기소당한 뒤 헤이그 국제전범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또 지난해에는 진지치 총리가 암살되는 비극을 치르기도 했다. 이런 정치적 변혁기 속에서 세르비아 국민들의 생활수준은 악화되어 유럽에서는 보기 드문 패전국의 설움을 톡톡히 당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세르비아 국민들이 경제적 불이익이나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민족적 자존심에 표를 던졌다는 사실에 여전히 희망을 가진다.” 다수당의 토도르비치 부총재가 내린 총선에 대한 평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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